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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일간 영혼의 여행 2<김홍술 목사의 광화문살이>
김홍술 목사 | 승인 2015.05.04 11:21

세월호 진실규명을 촉구, 광화문에서 42일간 단식을 하신 김홀술 목사님의 에세이를 8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3.

   
 
방인성 목사는 나보다 이틀 뒤인 8월 27일 들어왔다. 그리고 이튿날 28일에 우리는 김영오씨가 병원서 단식 46일 만에 단식을 중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참으로 다행이었고 방인성 목사가 40일 단식을 이어가는 게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절묘했다. 이날 더욱 흥미로운 건 방 목사의 60회 회갑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방 목사는 ‘회갑 선물치고 너무 감격스런 선물을 유민아빠로부터 받은 거다.’며 기뻐했다. 한편 방 목사의 주변 지인들은 이날 급조하여 단식장 부스 방에 모여 조촐한 회갑 감사예배를 준비하여 함께 했다. 이정배 교수는 격정적인 설교를 통해 은혜의 자리로 이끌었고, 원로 조화순 목사는 방목사와 나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사랑과 눈물의 축복기도를 빌어 주었다. 팔순을 넘긴 조 목사는 단식에 함께 하지 못하는 마음을 너무 미안해하시면서 매일 찾아와 곁을 지켜주며 함께 기도하시겠다고 다짐하였다.

다음날 단식 5일째 되는 이날 나는 방 목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40일간의 먼 마라톤 코스에 외롭고 힘들 터인데 내가 동행하며 같이 뛰어도 되겠느냐고... 방 목사는 여부가 있느냐며 너무 고맙다고 반색하면서도 걱정스럽고 미안스러워 했다. 그리고 원래 마라톤 레이스에 ‘페이스메이커’가 있는데 ‘김 목사가 페이스메이커가 되는 거다.’며, 페이스메이커가 선수보다 앞서는 적도 있다고 했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눈물과 애통에 잠겨있는 유가족의 아픔에 동참하고,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 특별법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동행을 약속했다. 김창규 목사는 주일은 청주의 교회에 내려갔다가 다음날 곧장 올라와 우리 둘의 곁을 함께했다. 다른 열 명의 행동단원이 미안해하는 마음을 대신하는 모양이었다.

   
 
사실 나는 일주일간이나 늦어도 2주 안에는 마치고 부산으로 내려가려 했었는데, 마음에 오는 어떤 움직임이 처음 올 때 계획을 밀어버렸다. 부산의 내가 살고 있는 공동체 ‘부활의 집’에는 연약한 형제들 6명이 나만 보고 추석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그 작은 형제들을 제치고 더 우선해야 하는 비중이 세월호 기도 단식에 있다는 걸까? 그 날 나에겐 고민과 갈등이 다시 밀려왔다. ‘부활의집’은 상경하는 날부터 엄청난 집중호우가 쏟아져 집 뒤편 높은 공원의 토사가 밀려 내려온 사태가 벌어졌다고 소식이 왔었다. 공원, 구청, 소방서 등에서 찾아오고 식구들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하는 모습이 선하였다.

아, 세월호에 희생당한 304명 통한의 영혼들이 구천에 떠도는데... 그 생때같은 소년소녀 260여명이 엄마아빠 부르면서 버둥거리다가 뜨거운 피 토하지도 못하고 숨 앗겨갔는데... 건국 이래 이런 애통하고 참혹한 역사가 있었던가? 대한민국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 중 그 어떤 슬픈 사연을 안고 사는 사람이라도 비켜갈 수 있단 말인가? ‘부활의 집’의 지극히 작은 형제들이여, 그대들의 아픈 생을 잠시 양보해다오! 오늘은 십자가의 예수가 그대들로부터 나와 진도 앞바다에 수장되었으니 나 그 예수를 뵈러 가리라! 21세기 반 조각 조국 대한민국에 이렇게 오신 예수를 나 만나리라! 그리고 물어보리라!

아, 우리 대한민국이 그 짧은 반세기 만에 정녕 부자가 되었단 말인가?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으로 부상한 놀라운 성장으로서 배고픔과 헐벗음으로부터 벗어났으니 그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과연 ‘세월호’와 ‘청해진 해운’은 대한민국의 축약판이었다. 인간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야수가 되어버린 ‘졸부’ 대한민국이었다. 일찍이 예수가 묻기를 ‘하느님을 택할 건가 재물을 택할 건가’ 했었는데, 우린 이미 재물을 택하였다. 진실이요, 정의요, 생명인 하느님보다 물신인 자본을 택하였다. 잠시 진리와 양심과 도덕을 덮어두고 이익과 국익을 택했다. 그래서 저 ‘청해진 해운’처럼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환상의 삼합을 이루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이었다. 열심히 일하여 가족과 함께 단란한 행복을 누리고 싶은 민중이었다. 이렇게 자본주의 세상이 천박하게 폭삭 내려앉아버린 대한민국에 왜 하필 그들이 선택되어 그 목숨 그 아깝기 그지없는 아이들의 생명까지 제단위에 바쳐야 했을까? 결코 원하지도 않았던 순박하기 그지없는 민중들과 그들의 새순 같은 아이들이 왜 그 추악한 죄의 짐을 져야한단 말인가? 

자본과 종교와 권력이 영악하게도 민중들을 착취하고 마취시키며 갈취해도 몰랐다. 민중은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에 내몰렸고 먹이사슬에 꽁꽁 묶여서 구조화되어버린 세상을 만들었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동조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민중으로서 미안함을 너머 깊은 죄의식과 공황에 헤매고 있다. 한때 깨어있는 양심들이 민주주의와 정의평화를 위해 저항하다 고난을 받았으나, 달콤한 권력과 자본의 유혹에 재갈이 물려져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아, 참으로 원통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었다.

#4.  

   
 
광화문 국민단식장 천막 곁 분수대에서 뿜어대는 물줄기는 복사열을 식혀주는 대는 역부족이었다. 낮에는 중국인 관광객들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지만 점점 세월호 방문객들이 늘어났다. 늦은 오후가 되면 퇴근하는 직장인들이나 일부러 나오는 일일 단식 참가자들로 북적인다. 부산에서 무명 목사로 올라 온 나에게는 방문 손님이 거의 없지만, 방 목사와 김 목사에겐 점점 손님들이 늘어갔다. 밤이 되면 그나마 더위는 좀 누그러졌는데 천막 옆을 바짝 붙어 달리는 차량들의 질주가 장난이 아니었다. 바닥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이며 게다가 간간 대형 차량이 지나가면 천막이 쓰러질 정도로 출렁거림이 컸다.

   
 
격려, 응원, 위로, 미안한 마음으로 연대 차 찾아오는 방문 손님 가운데는, 생수를 포장 박스채로 사 오시는 분이나 죽염 등 좋은 소금이라면서 사 오시는 분도 있었다. 어떤 분은 책도 사 오시고 작은 화분을 들고 온 분도 있다. 며칠 째 되는 날이었을까, 우리 동료 목사 중 농촌목회에서 ‘생명목회’라는 차원으로 진화한 차흥도 목사가 찾아왔다. 차 목사는 단식에 대해서 나름 대가였는데 우리 두 목사에게 장기단식에는 효소가 필요하다며 권한다. 자신이 생산하는 ‘산야초 효소’였는데 그냥 대 주겠다는 거였다. 우린 전문가의 고마운 제의를 받아들이고 물에 조금씩 타서 음용하기로 했다.

나와 방 목사는 그 험난한 환경에서 일주일 여가 지났는데도 아주 적응이 잘 되었다. 낮의 그 뙤약볕 더위와 북적이는 인파와 손님들, 그리고 밤의 엄청난 진동과 소음과 매연 그리고 넘어질듯 한 천막의 휘청거림이 잠자리를 위협했지만 평온한 잠을 잤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이상하다 여길 정도로... 마치 성경의 말씀처럼 암탉의 포근한 날개 아래처럼 품어 주는 그런 느낌이랄까? 우리 둘은 똑같이 경험한 이 묘한 은혜를 이야기 나누기도 하였다.

동조단식 형식이고 또 ‘페이스메이커’로 함께하는 40여 일간의 단식이, 내 생애에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엄청난 사건인데 이렇게 예상 밖에 이끌릴 줄은 몰랐다. 내 신앙적 유년시절부터 금식이라는 건 무척이나 많이 했었지만, 주로 7일간을 일체 물은커녕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는 고요한 산중 홀로금식이었다. 그런데 이런 악조건 환경에서 거의 죽음을 불사하는 장기간의 사실상의 금식이 가능할 건가? 사람들은 방 목사의 페이스메이커로 가는 내게도 완주할건가에 관심을 갖고 묻기도 했다. 나는 뭐라 딱히 말하기도 그렇고 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그냥 가기로 했다’고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두 주간이 차가는데도 기운만 조금씩 깔릴 뿐 몸과 마음은 너무도 평온하고 안정적이었다. 단식장 건너편에는 119 응급구조대가 있었고 일주일 정도가 지나는 시점부터는 청년한의사협회에서 자원진료단 한분씩 매일 와서 기본건강 체크를 하였다. 단식장 내에는 우리를 포함한 10여명의 장기단식자가 있었다. 우리보다 앞선 문재인 의원은 내가 나흘째 되던 날 10일간의 단식을 접고 돌아가면서, 같은 부산서 온 내게 들러서 ‘고생하신다’며 ‘건강하길 바란다’고 인사하고 떠났다. 그가 돌아간 후 ‘새민련’에서는 하루 두 명의 의원이 돌아가면서 릴레이 단식으로 이어갔다.

우리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월호법 정국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고 방문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특별한 개인기도 시간을 가질만한 상황이 못 되었지만 아침에 일어나 사람들이 없는 잠시 묵상에 잠기곤 했다. 손에 잡힐 듯이 보이는 청와대를 바라보고 간절히 만나주기를 요청하는 유가족들의 안타까운 마음과, 두려움과 완악함에 휩싸여 모르쇠로 문을 닫고 있는 대통령과, 세월호의 정국에 두 갈래로 갈라져 소모적이고 허망한 세월만 보내고 있는 국민들을 향해, 정의롭고 자애로우신 하늘 아버지께 마음 깊은 곳의 간청을 올릴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종교인 단식장 천막에는 우리 두 목사가 자리를 잡고 중심을 잡자, 에큐메니칼권의 본가인 KNCC 총무와 정평위 소속 목사들, 최근 결성된 ‘민주쟁취 기독인연대’와 기장 교단을 비롯한 몇몇 교단 관계자들, 목정평, 예수살기, 생명평화마당, 여민목 등 수없이 많은 단체나 개인들이 찾아왔다. 방 목사가 주로 활동하던 복음주의권 단체나 교회의 목회자 일꾼은 물론 교인들의 방문도 종일 이어졌다. 특히 눈에 띈 점은 2.0 목회자 모임과 성결교단 목회자 모임인 ‘성결행동’의 조직적 참가였다.

한편 특이하게도 아랍권이나 인도에 선교사로 헌신하던 분들이 가족단위로 찾아와 1박 단식까지 하거나, 유럽권이나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목회하거나 사업하는 이민 동포들이 찾아와 깊은 연대를 함께 하는 감동적인 자리였다. 세월호는 국내와 해외를 막론하고 오프라인이나 온라인, 직업이나 어떤 사회적 신분을 떠나서 국가 중심적 사고와 국민(민중) 중심적 사고의 구별을 짓는 사건이었다. 즉, 국익과 국가안보와 국가경제를 중요시하고 특수한 안보상황과 그것을 위해 국민은 양보해야 한다는 층과 사람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 공동체의 소통과 믿음, 정의와 진실에 국가는 복무해야 한다는 층이 나뉘는 역사적 정점이었다.

김홍술 목사  hongsulk195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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