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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重慶), 장준하(張俊河)의 그 약속의 땅 1<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5.14 16:12

<장준하와 박·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

이미 에큐메니안 독자들은 기억하시겠지만 필자가 새삼스럽게 글의 자리를 별도로 이 사건을 밝히는 것은 어쩌면 이 사건이 국가라던가 군대, 금융재벌 더 나아가 교육·문화재벌들에 의해 장악되어 온 세계사(世界史)를 감히 일신할 수야 없다 해도, 새 세계 구현에 어떤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장준하와 그의 일행이 찾아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후로 지향해야할 국책노선일 수도 있겠다는 확신이, 결국은 세계의 인민이 추구해야할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있어서이다.

에큐메니안의 독자 중 필자의 <함석헌·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를 읽고 계시는 분들은 이미 팩트로써의 <장준하와 박·이 사건>을 알고 계시리라 믿어 다시 언급하지는 않으려 한다. 다만 그 사건, 곧 <장준하와 박·이 사건>이 주는 의미를 밝혀 필자의 소임을 다 하려는 것이다.

작은 놈이 큰놈을 친다(?) 작은 놈이 큰놈을 친다(!)

   
 
생각해보라.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것도 그 큰놈이 말없이, 당연스럽게 맞아주는(?) 일이 말이다. 필자는 지난 4월 23일자 본 칼럼 “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4”에서 “이 ‘장준하와 박·이 사건을 자리를 달리하여 전하려 한다”면서 그 이유를 밝힌 바 있다. 거기서 필자는 그 사건을 “우리 역사에서는 물론이요, 세계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민주주의의 전형(民主主義 典刑)」”이라면서, “그 사건의 고귀함·아름다움·참스러움이 가히 <오순절 예루살렘 공동체>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사건으로 확신”된다고 했고, “... 그 <박·이의 징벌사건현장> 그것은 아주 정확한 <하나님 나라> 모습이기 때문이다” 했다.

필자는 이 사건을 장준하의 “중경6000리”에 한 사건으로 취급해 버릴 수가 없어서였다. 받은 충격, 깨달음 그리고 그 사건이 주는 메시지가 처음 읽었던 (돌베개) 그때는 물론 지금도 하늘로부터의 생음성으로 필자의 가슴을 뒤흔들고 있기 때문에......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중경을 향하는 이 일단(一團)의 성심(聖心)을 그 일단의 존립을 불가능하리만큼 오염시켜대는 범인(?)들의 척결을 위한 방법으로 장준하는 그 <전체의 뜻>을 물었다. 참선은 악을 껴안는데 있는 것이지만 살림의 현장에서 그 구별은 어쩔 수가 없었다. “부부생활과 성의 향락과의 한계도 애매”하게 만들어버린 당사자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몇 사람 외에는 지휘부(?)의 징계요구에 전적인 찬의를 보냈다. 그 전원의 결의가 박·이를 처벌하는 힘이 된 것이다.

그 처벌법이 이미 알려진바 대로 30대의 뺨을 치는 것이요, 이 30대 뺨이 징계대상으로 지적된 자가 다섯, 그 다섯 가운데 거구의 몸집을 가진 둘이 곧 박·이였고, 이 둘이 곧 장준하의 몫이 된 것이다. 역시 전해진 말이지만 이 둘은 장준하의 광복군 일단이 임천에 있을 때, 인근의 주민들에게 용서받기 어려울 만큼의 민폐를 끼쳐 중국육군형무소로의 이송 직전 장준하의 희생적이요, 헌신적인 역할로 위기를 모면한 역사를 지닌 자였다.

거구의 그 힘이 그들로 그 같은 무례를 범하게 한 것일까? 그렇다면 거구라는 것, 힘이라는 게 결코 좋은 거라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세워놓고 보니 박·이만이 거구가 아니었다. 징계 처리해야할 다섯이 “모두가 어깨 폭들이 떡 벌어지고 꽉 균형이 잡힌 거구들”이었다.

이들 앞에서 이들을 30대의 뺨치기로 징벌을 해야 하는 이가 장준하와 김준엽이었다. 조금은 유약한 듯한 외형이었다. 대원들은 일자진을 친 채 숨소리마저 죽이고 징벌자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장준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필이면 내가 때려야 할 자가 박과 이라니... 무슨 운명인가? 무슨 인연인가? 그러나 칠 놈은 쳐야했다. 이제 박과 이를 치는 자는 장준하가 아닌 전체(全体)였다. 전체의 명(命)에 의해 치는 것이니까.

「철석!」 뺨치기가 시작되었다. 둘, 셋, 넷... 열여섯, 열일곱 번째의 뺨을 쳤을 때 ‘거룩’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장준하는 그 현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초등학교 아이들처럼 철부지의 장난으로 이역 수 천리를 떠나와 기껏 하고 있는 짓이 동지의 뺨을 치는거냐 싶어 와락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눈으로 솟구치는 것이 있었다. 아, 그런데 아무런 반항도 없이 순순히 고개를 돌려 대주는 이 고마운 동지의 얼굴이, ... 거기 눈물이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것이야말로 기적이었다. 그 거구의, 그래서 무례와 오만을 행하던 그 주먹(힘)의 박(朴)이 한 주먹이면 끝나버릴 한 작은 자 앞에 맷집을 자원하며 눈물을 쏟고 있다니 말이다. 이야말로 기적 아닌가? 30대 뺨치기가 끝났을 때의 현장의 모습은 실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 거룩과 아름다움의 극치 바로 그것이었다.

「철석!」 30대 치기를 모두 끝냈을 때 장준하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벌은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벌을 주는 것이었을까? 하나님의 나라는 「죄와 벌」이 용해되는 곳일런지도 모른다.

박의 30대 뺨치기를 마치면서 휘청거리는 장준하를 붙들어 꽉 안아주는 힘 있는 두 팔이 있었다. 그 징벌을 받아낸 그 박이었다!

   
 
장준하의 글이 계속된다.
“그때였다. 계속해서 며칠동안 흐려있던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제법 눈송이가 굵었다. 나는 하늘을 우러렀다. 괴롭고 쑥스럽던 규탄이 흰 눈이 내리면서 이 분위기는 일변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들 내리는 눈을 쳐다보면서 그대로 쭈그려 앉아 있었다. 그대로 눈 속에 파묻히고 싶은 듯이 우리는 숙연한 시간을 연장시켰다. 마치 어떤 절대자의 심판을 기다리는 듯이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침묵이 지속되는 그 속에서 새로운 우리들의 결의가 가슴마다 눈처럼 희고 깨끗하게 쌓여지기를 기원했다. ... 눈송이가 커지면서 더욱 그 황홀경에 사로잡힌 동지들을 지켜보던 김준엽 동지가 산회를 선포해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우리의 분위기는 다시 그 전처럼 아름다웠다.”

이 아름다움의 회복이 아닌 승화는 작은 놈이 큰놈을 징치(懲治)했다는 팩트에 있지 않다. 작은 놈이 큰놈을 징벌했다는 것만으로도 작지 않은 말거리, 위로거리가 될 터이지만 보다 더한 미·성(美·聖)의 승화는 어떻게 해서, 무엇이 그 작은 것으로 그 큰 것의 무례와 오만을 제거해내게 한 것일까에 있다.

그것은 우선 장준하 속의 외로움, 참 찾음에 기인한다. 있을 것을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의의 추구, 참 찾아가는 일에 드려진 사람, 그것이 장준하였다. 이것이 장준하의 위대성이다. 30대의 뺨을 맞은 사람, 맞으면서도 증오가 아닌 회심의 눈빛이었다는 박! 사람 누구에게나 자신의 죄에 눈물을 쏟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법으로, 힘으로 불러내지 못한다. 참을 이루자는 맘이 그 아름다움을 불러낸다.

30대의 뺨을 치고 쓰러지려 할 때의 장준하를 뺨 맞은 박이 붙잡아 안았을 때 거기는 이미 악도, 선도, 죄도, 징벌도 따로 있지 않았다. 한 맘, 한 뜻, 한 사람, 한 삶이 있을 뿐이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 뜻, 하늘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징벌자(?) 장준하와 피징벌자 박이 하나로 얼싸 안은 거기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나님 나라는 바라보는 곳이 아닌 이루어 가는 것임을 거기서 증언하고 있었다.

힘을 키우려 마라. 힘을 가지려 마라.
참을 키우라. 참 참을 찾아가라. 모든 악이 힘을 바람에서, 역사의 승화가 참 찾음에서 오는 것이니...

함석헌(咸錫憲)이 전하는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진시황이 폭력으로 초(楚)를 쳐서 망하게 하고 점령해버렸지만 초의 세 집(三家)만 남는다 해도 나중에 진(秦)을 기어이 이기고 바로 설 것이다. 왜냐하면 진이 초를 친 것은 폭력으로였지만 초나라 사람이 일어나 진과 싸우는 것은 힘에 빼앗긴 내 나라 찾자는 것이라, 그것은 참이니 참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뜻입니다. 힘이냐? 참이냐? 참이야말로 이기는 것이란 말입니다”(楚蜼三戶=초유삼호나 亡秦者 망진자는 必楚 필초니라 · 전집8 씨에게 보내는 편지 237쪽.)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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