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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重慶), 장준하(張俊河)의 그 약속의 땅 2<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5.22 16:06

무한의 자산(無限資産), 일상(一常)의 살림

50명의 대원이 정말 무사히 중경행 군용선을 탈 수 있었다니...
갑판에 그대로 주저앉은 장준하는 50여명의 대원이 어쨌든 그 험산, 험도를 뚫고 넘어 중경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코스의 군용선에 승선할 수 있었다니 그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지극한 보호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파촉령의 정복이 그랬고, 중경을 향해 출항하는 오늘 1945년 1월 20일, 작년 7월 7일 쓰까다 부대를 탈출한 이후 6개월 13일간의 그 생명을 걸고 달려온 날들의 하루하루가 그랬다. 그 갑판에 장준하 홀로였다. 그 일체(一體)의 친구 김준엽도 곁에 있지 않았다. 승선하여 선실이 정해지자 전 대원이 하나같이 마치 다량의 수면제라도 복용한 듯 배낭들을 베개 삼아 잠들어 버렸다.

   
 
장준하는 홀로 나와 갑판 위 뱃고동에 등을 붙이고 두 다리를 쭉 뻗은 채로 주저앉았다. 다행히 밖의 바람은 없었지만 양자강 지류의 기후는 견디기 어려울 만큼 추웠다. 그런 추위 속 갑판에 주저앉은 장준하는 파촉령을 넘고 내려 이제는 육로의 장정을 끝내게 되는 흥산(興山)에서 다시 대원들이 육로와 해로로 갈리게 되든 며칠 전의 그 어처구니없던 사건을 차근차근 되씹어 본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장준하와 그 대원들은 1월 6일 노하구를 떠나면서 참 다행스럽게도 노하구에 본부를 둔 중국육군 제5전구의 전적지원으로 한 달분 가량의 식량,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방한동복에 일정액의 경비지원까지 받게 되어 당당한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이때의 선발대장, 취사반장이 아주 자연스럽게 장준하로 내정되었는데, 장준하와 몇몇 지휘부원들의 합의 하에 물품은 공용으로 하기로 하고, 현금은 개인별로 나누어주어 개인이 사용권을 갖도록 했는데, 이 ‘개인의 사용권’이 큰 문제를 야기하게 되었다.

대원들 중 10여명의 대원들이 행군 도중, 유숙(留宿)하게 되는 경우, 또 한동안 쉴 곳을 얻어 쉬어가는 경우마다 아예 일 삼아 자리를 따로 잡고 돈 먹기 화투치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들 그러리’하는 분위기였고, 그럼에도 “하지 말라”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되겠느냐?”며 “대원 전체를 생각하라”는 정도의 권면이라도 하는 이는 장준하였다.

노하구에서 파촉령을 넘고 내려 여기 흥산에 이르기까지 열사흘 길, 그 사이 개인적으로 분배했던 그 지참금에 아주 부당한 변질이 생겨 있었다. 제 몫이 없어진 놈이 있는가 하면 두 몫을 가진 놈, 심한 경우 세 몫을 가진 놈이 있게 된 것이다. 바로 그 화투놀음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흥산에서 중경 행에는 두 코스가 있었다. 하나는 선박을 이용해 가는 하루 뱃길이 있고, 다른 하나는 산길, 들길을 헤쳐 가는 이틀 길의 육로가 그것이었다.

이 길의 선택이 문제였다. 노하구를 출발하면서 현금의 경우, 절대공금 분 외에는 개인에게 나눠 사용권을 갖도록 했던 것인데, 그 화투놀음에 자비를 몽땅 털려버린 이들이 10여명의 이르렀다. 이 놀음에서 지참금을 몽땅 털려버린 대원들이 생긴 것이다. 이 행단을 인도하는 행정책임자인 진 교관의 이야기로는 육로로 가는 사람들의 경우라 해도 여기 흥산에서부터 이를 길의 파동까지는 완전한 중국군의 주둔지역이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면서, 단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파동에서 중경행 군함이 부정기적으로 있는 것이어서 여기서 객선을 이용해가는 팀과 육로로 가는 팀이 파동에서 함께 승선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장준하는 화투놀이에서 돈을 따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이들을 은밀히 만나 딴 돈들을 잃은 이들에게 돌려주어 파동행 객선을 함께 탈 수 있도록 하게 해달라며 권했지만, 참 돈이란 무섭고도 지독한 것이었다. 딴 돈이 몇 푼 되지도 않을뿐더러 자기들도 오는 사이에 다 써버려서 내놓을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무서웠다! 인간이라는 게 무서웠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겠노라며 목숨을 걸고 일군을 탈출한 너는 뭐며, 생사를 함께 해온 일행의 진로가 육로와 해로로 나눠지는데, 제 주머니 속에 두 몫, 세 몫의 돈을 담고 있으면서도 나 몰라라 하는 너는 뭐냐? 장준하는 혼돈스러웠다. 생각 같아서는 ‘너 죽고 나 죽자’며 달라붙어 가진 돈을 다 빼앗아내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지를 못했다. 갑판에 주저앉은 장준하의 생각이 이제는 화투판에서 돈 잃은 놈들에게로 향해 꽂혔다.

“그렇게 사는 게 아닌데...”
“글쎄, 그게 어떤 돈이라고...”
그러면서 장준하는 생각을 더했다. “어떻게 사느냐가 정말 중요한 것이지. 일상의 생활이야 말로 무한자산(無限資産) 아닌가?”

그렇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이기려 할수록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살림이기 때문이다. 그 삶이란 내가 해야 하는 것, 하나님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이지. 다행히 수로를 통해 파동에 이르니 중경행 군함이 사흘 후에 있단다!
“장동지의 하나님이 장동지의 소원을 들으셨구먼. 육로로 떠난 대원들도 다함께 가게 됐으니 말이요.”

말이 강이지 양자강, 그것은 한국에서라면 바다보다 더한 실로 망망대해였다. 파동에서 중경까지는 뱃길 여드레를 달려야했다. 사방이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어 끝없이 수평선이 펼쳐진다. 중경에서 파동으로 내려오는 것은 사흘 뱃길인데 파동에서 중경은 여드레 길인 것은 중경 쪽에서 파동 쪽으로 흐르는 양자 강수의 거센 물결 때문이라 했다. 지금 장준하의 일행은 그 거센 양자강 격류를 역류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그가 탄 군함은 양자강의 격류를 헤쳐 오르기 팔 주야를 다했다.

1945년 1월 31일, 장준하 중경(重慶)을 밟다

세월에 비할 수야 없다 해도 장준하에게 있어 그 중경은 모세에게 있어 「가나안」 그 약속의 땅만큼 지극한 곳이었다. 장정 7개월을 광야 40년에 비할 수는 없다 해도 민족구원의 이상은 더와 덜이 있을 수가 없었다.
“장동지, 저 멀리 보이는 곳, 저곳이 바로 중경이요.” 진 교관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면서부터 장준하는 울기 시작했다. 진 교관도 장준하의 호곡을 말릴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그의 곁을 떠났다.
“아, 여기가 중경, 여기가 중경이라니...” 여기 우리 정부청사가 있고 주석이 계신다. 이미 장준하는 “나라 없는 백성”이 아니었다.

중경시 연화지 칠성강(重慶市 蓮花地 七星崗)에 터 잡고 있는 저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를 보라. 보라, 저 깃발을! 그 깃발은 대한민국의 국기 곧 태극의 깃발이었다.(이 태극기는 대한민국 해방과 함께 임정의 귀국시 장준하가 휴대하고 귀국, 보관. 그의 의문사 직전 이화여대 박물관에 기증, 현재 보관 중임 – 필자 주)

이날 1945년 1월 31일 오후 2시였다.
정부 청사 뜰 앞에 두 줄 횡대로 대한민국 광복군 총사령관을 맞는다. 저 유명한 이청천(李靑天)장군이었다. 장준하는 서러움에 겨웠다. 평양에서 일본군42부대 사령관, 서주 일군보충대, 쓰까다부대 등의 사령관들의 모습과 겹치면서 그 서러움은 더해왔다.

   
 
아, 우리 사령관이시다! 카랑카랑한 목소리, 이상스러운 눈빛, 꼿꼿한 몸가짐이 아니었더라면 허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목소리, 그 눈빛, 그 몸자세가 장준하를 위로했다.
아, 우리 광복군 대장!
단에 오른 사령관은 「앞으로 나와 함께 이곳에 여러분들이 있을 것이니까 차차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것이고, 오늘은 피곤할 텐데 여러분에게 긴 얘기를 하지 않겠습니다. 곧 우리 정부의 주석이신 김구 선생께서 나오실 것입니다. 이만 끝.」

장준하의 돌베개는 자신의 김구 주석과 첫 대면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렇게 이 장군이 말을 맺자마자 벌써 저 윗 층계에 푸른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앞서고, 뒤에는 역시 머리가 희끗희끗한 일행 몇 분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 장군의 소개가 없더라도 능히 저분이 김구 선생이구나 하는 것쯤은 육감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사진 한 번 본 일조차 없었지만, 거구(巨軀)에 중국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우리 임시정부의 주석이신 것을 어떤 영감 같은 느낌이, 확신까지 하게 만들어주었다. 아직까지 우리가 알기로는 윤봉길(尹奉吉), 이봉창(李奉昌) 의사들의 배후 조종인으로서 무서운 정략, 지략의 인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검소한 인품은 우리들에게 또 다른 충격을 주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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