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30년이야. 택시운전을 하는 일은 그저 밥벌이가 아냐. 작지만 중요한 통일운동이라 생각해.”유기진 선생의 30년 택시운전. 그것은 단순히 생계를 연명하기 위한 댓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가치관과 삶을 실현하기 위한 소중한 운동이었다. (사진 한재호)

#새벽 
이른 새벽, 4.19기념탑 앞에 유기진(82) 선생이 서 있다.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상념에 잠기던 선생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연다.

“내가, 이 4.19기념탑 근처에 살게 된 게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 곳에 온 뒤로 한 번도 떠날 생각을 안 했어. 하루를 이 곳에서 시작하면서 나를 다시 가다듬고 긴장을 다지는 거야. 사회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젊은이들, 그 사람들이 지금의 내 삶을 다시 똑바로 서게 하고 바르게 해요.”

선생은 다시 공원을 향해 걸었다. 어깨를 쭉 펴고 빠르게 내딛는다. 힘차게 한 발 한 발을 구르면서 팔을 휘젓는다. 저만치 떠오르는 태양 빛에 공원은 붉게 물든다.

# 베테랑 택시운전사
아침운동을 마친 선생은 바지런히 공원 입구로 향한다.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서다. 선생의 직업은 택시운전사, 30년 동안 줄곧 운전대를 잡은 베테랑이다. 서울시내 웬만한 길은 훤하다는 유기진 선생. 하지만 30년 택시운전 경력에 그에게 남은 건 ‘밝아진 길눈’ 뿐 아니다.

“사람들과 경험이 남았지. 내게 손님과의 대화는 제일 중요해요. 손님이 타면 많은 얘기를 하지. 세상 돌아가는 각종 문제에서부터 개인사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중요하게 나누는 대화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사안들이에요.”

택시를 이용하는 모든 손님은 직업,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소중한 대화 상대다. 어느 택시운전사가 손님과 대화하지 않을까마는 선생이 대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데 있다. 택시 손님과의 대화는 또 다른 운동의 방식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 택시운전대를 잡은 이유도 그거였어요. 내가 민족화합을 위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택시다 싶었어.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서 얘길 할 수 있는 직업이 어딨겠어요? 그래서 운전대를 잡고 만나는 사람마다 많은 얘길 나누기 시작했어요.”

▲ “사회 현상 뒤에 가려진 중요한 본질, 미국에 의해 지배받는 이 구조를 이해했으면 좋겠어.”무엇보다 답답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현상 뒤에 가려진 본질을 잊는다는 사실이다. 유기진 선생은 그것이 제일 안타깝다. (사진 한재호)

# 대화의 이유
“손님, 요즘 벌이가 어때요?”에서부터 “최근 양극화 문제가 심각하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로, 농민시위가 한창이던 때는 “농민들, 이거 다 죽이는 거 아닌가요?”에서 “FTA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까지. 선생은 택시손님들과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조심스레 질문을 던지고 이야기를 나눴다. 나이나 성별, 직업에 따라 사회문제에 대한 반응도 다양했다.

아무래도 젊은이들이 사회문제에 대해 조금 더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했고 나이든 중년이상의 손님들은 다소 보수적 성향을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어떻든 선생이 전달하고 싶은 본질은 ‘미국에 지배받는 한국의 상황’이다.

“근본원인이 뭔가, 이거죠. 사회양극화, FTA로 인한 농민문제, 스크린쿼터, 자유무역 체제 등에서 우리는 미국에게 어떻게 지배받고 있는가. 사회현상에 가려져있는 그 밑바닥의 본질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 일은 쉽지 않다. 사회현상에서 출발해 거꾸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찬찬히 풀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야기가 한창 진행되는데 목적지에 도착하곤 해서 매듭을 짓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선생은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 일상의 힘
택시운전사인 선생이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손님과의 대화를 나누는데는 그의 남다른 이력이 있다. 유기진 선생은 장기수(長期囚)다. 북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육촌형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조직생활을 하게 됐고 열아홉살에 인민군이 됐다. 훈련을 받고 3.8경비대에 배치됐다가 특수훈련을 거친 선생은 포 소대장으로 임명받아 전쟁의 와중에 낙동강을 건넜다. 하지만 전투 중 부상을 당했고 결국 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선생에겐 빨치산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형무소 생활을 하고 사회로 나왔을 때 뭘 해야 할지 몰랐지. 정부에선 여전히 날 감시했고 먹고 살기는 어려웠어. 처음엔 연탄배달도 하고 구멍가게도 하고…그렇게 고생고생하다가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그냥 이렇게 먹고 사는 게 다가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어서, 어떻게든 민족화합을 위한 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

그렇게 택시운전대를 잡았고 서른 해가 흘렀다.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됐고 얼굴의 주름은 깊어졌지만, 선생의 마음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민족의 화합과 통일운동을 하루하루의 일상 속에서 실현하는 것의 힘을 믿는 마음이다.

▲ “청력이 다할 때까지 택시운전을 할꺼야. 그 다음엔 또 다른 운동이 기다리겠지.”나이가 나이인지라 안 좋아진 청력이 제일 걱정이다. 하지만 청력이 다 하는 순간까지 택시운전대를 놓지 않겠다는 유기진 선생. (사진 한재호)

# 작은 물결
“통일운동에 나서서 열심히 하는 많은 이들이 있죠. 그들의 역할이 컸고 지금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 또한 그 결과지.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어요.”

먹고 살기 바빠서, 혹은 잘 몰라서 민족화합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일부의 외침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게 선생의 말이다. 통일에 대해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조금씩 바꿔 나가는 노력 없이는 민족화합은 어렵다는 얘기다.

선생은 요즘 고민이 하나 있다. 고령이다 보니 귀가 잘 들리지 않아서다. 보청기를 껴 볼까도 했지만 자연스레 늙어가는 것, 굳이 인위적으로 막을 필요가 있나 싶어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귀가 어둡다보니 손님과의 대화가 어려워지는 게 큰 고민이다.

“몇년이고 조금 더 버텨볼 생각이에요. 그러다가 택시운전하면서 손님들하고 대화하는 게 어려워지면 그만둬야지. 거기까지가 택시운전으로 내가 할 몫을 다 한거고. 그 뒤에는 뭔가 또 다른 할 일이 있지 않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선생은 전철역 근처에 기자를 내려주고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출발했다. 또 다시 손님을 태우고 이야기하기 위해, 작은 물결이 결국 거대한 화합의 물줄기를 만들 것을 믿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김진아 기자  nebo9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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