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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 그 다시 시작되는 생명장정(生命長程) 2중경(重慶)에서 토교(土穚)로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6.11 14:53

그 토교행의 결정에 의기충천, 기뻐마지 않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장준하도 놀랐다. 중경! 중경이 어디인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묶어 기어이 다시 찾으리. 참 못 이루는 조상의 땅, 조국의 땅을 다시 찾자는 꿈 하나로 버티는 임시정부, 그 요람 아닌가? 그런데 그 중경을 떠난다니……. 사실 장준하로선 한편으론 두렵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전 동료들이 무슨 대경사를 만난 듯한 모습들이니 말이다. 죄송스러워졌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모두의 힘들이 모여져서 였구나! 그랬던 건데 마치 이제까지 장준하는 이 무리들을 자신이 이끌어 온 듯한 오만 속에 빠져있었음을 참회해야 했다. 야, 토교? 아무러면 어떠냐? 우리하기 나름 아니겠나? 가자 거기로!  그랬다. 장준하가 이 무리들의 앞장서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이 무리들이 따라오거나 끌려온 것은 아니었다. 이 전 대원들도 장준하와 꼭같이 역사의 부름을 받은 무리들이었다.

   
▲ 광복군 시절 장준하(뒤쪽 오른쪽 첫번째, 장준하기념사업회)
토교(土橋)로 가다
중경의 서북쪽 12km 지점에 자리한 마을이었다. 이제 <약속의 땅>으로 알았던 그 중경을 떠나 새 땅을 찾아간다. 2월 20일이었다. 장준하의 일단이 중경을 찾아온지 꼭 50일만의 일이다. 중경을 떠나는 장준하는 후의 그의 명저 <돌베개>에서 중경을 떠나는 그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중경생활은 결국 우리들 스스로를 위해서나 임정을 위해서나 조국광복을 위해서나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알고도 남게 되었다.” 토교로의 이동은 특히 장준하에겐 거의 종교적 차원에 가까운 깨달음을 주었다.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약속의 땅’이란 어느 공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는 땅, 있어야 하는 땅이다.”라는! 그렇다면 장준하의 가슴엔 어쩌면 김구까지를 포함한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각엔 반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심혈(心血)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장준하에게 있어 그가 찾아가는 새 땅 토교(土橋)는 임정으로부터 주어지는 어떤 군사적 임무를 맡게 되기까지 대기하기 위해 찾아가는 땅이 아니었다. 제 나라, 제 민족을 빼앗긴 채 남의 땅에도 피해 있으면서도, 잃어버린 조국의 광복보다는 정파 싸움에 혈안이 되어있는 그 「조직의 임정」을 거부하므로 찾아가게 되는 땅인 것이다. 이제 토교야 말로 민족의 역사, 민족의 혼을 지켜내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필자가 장준하와 그 일단의 토교 이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각엔 반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한 것은 이같은 정신사(精神事)를 두고 한 말이다.

토교를 떠나는 장준하에게 격한 아픔과 격한 기쁨이 교차하고 있었다. 중경, 정파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해도 우리 임정이 있는 땅 아닌가? 그런데 이 중경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오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이날 아침 장준하에겐 그의 역사에 잊을 수 없는 한 특별한 선물이 주어진다.

<한국광복군 소위>(韓國光復軍 少尉) 계급장이 수여된 것이다. 그가 이제까지 사관으로서 지닌 계급은 중국 중앙군 육군 준위였다.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서 간부훈련을 마치고 받은 계습이었다. 그 임천분교에 한광반이 있었고, 한광반의 일원으로 훈련수료를 한 것이었지만 아직 한국광복군의 행정력이 미흡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는 중국군 계급으로 만족해야 했었다.

그런데 지금 장준하의 가슴에 한국광복군 사관계급장이 달렸다. 한국광복군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장군에 의해서였다. 그래서 사무쳐 오는 격한 기쁨이었다. 1945년 2월 20일이었다. 장준하는 그래도 다른 곳이 아닌 토교로의 이전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곳 토교의 대부분의 교민들이 기독교인들인데다 김구 주석을 위원장으로 한국 독립당의 간부들이 중국정부의 지원으로 단지를 조성하여 한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어서였다.

이 토교의 뒤편 약간의 언덕바지에 한교기독청년회관(韓穚基督靑年會館)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중경을 떠나 코교를 찾은 일단들은 바로 이 회관에 입주하게 되었고, 바로 다음 날은 장준하도 알지 못하는 기이한(?) 일이 생겨난다. 마을 입구에 이제까지 그렇게 육중하고 반듯하기 본적이 없는 대형입간판이 세워진 것이다. 이름하여 <대한민국광복군토교부대>(大韓民國光復軍土橋部隊)라 했다!

<대한민국광복군토교부대>
그것은 실로 기적같은 일이었다.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서주의 쓰까다 부대를 탈출한 이후 불로하변의 한치륭(韓治隆) 부대, 임천(臨泉)의 중국 중앙군 군사학교 분교, 그리고 저 유명한 삼국지의 제갈량의 고향이라는 하남성 남양(河南城 南陽)을 거쳐 그 연대활동의 과로로 쓰러져 사경을 헤맸던 노하구(老何句)며, 아, 그 죽음의 준령 파촉령을 넘어 흥산(興山)에, 그리고 육로의 보행을 마감하는 파동(巴東)을 거쳐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서 기어이 임정의 땅 중경(重慶)에 이르기까지 장준하와 그 일단은 실로 헤매어 온 집단이었다. ‘학도병출신들’, ‘일군탈출병들’, ‘임천출신들’이란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장준하와 그의 일단들에게 공식 명칭이 주어진 것이다. 이름하여 <대한민국광복군토교부대>!

이렇듯 대형간판이 바로 세워지게 된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이들 다수가 이름있는 정규대학 출신에 일군 탈출자들이라는 것, 둘째는 결코 만만히 대할 수 없는 반골들이라는 것, 마지막으로 중국군 간부훈련을 수료한 중국군 장교들이라는 사실들이 한국광복군과 동시에 중국군 중경전구(中國軍重慶戰區)의 지휘부를 긴장하게까지 이끈 것이었다. 장준하, 김준엽, 노능서 등이 O.S.S의 특수요원으로 선발되기 이전이며 토교부대는 특수부대가 되어 있었다.

필자가 이 토교부대를 이미 특수부대가 되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이 토교부대의 관리에 대해 한국광복군 편의 특별한 요청이었기도 했지만 중국육군중경전구의 깊숙한 전략이 병행했다는데서이다. 당시 현역인 중국 공군소장 최용덕(崔庸德)을 한국광복군의 토교부대장에 임명한 것은 사실은 한국광복군 사령부가 아닌 중국 군부였다. 장준하는 ‘됐다’했다. 이젠 미련 없이 죽을 자리를 얻은 것 같았다. 대한민국광복군토교부대! 그것은 사실 장준하 자신에 의한 산물이었으니까.

다시 든 몽둥이
그러나 중경 임정의 자세는 바뀔 줄을 몰랐다. 토교부대의 이상의 구현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장준하를 격분케 한 것은 토교부대 창설 며칠이 지나면서 임정에 <경위대>라는 조직을 구성키로 급조, 토교부대의 부대원들을 은밀히 각개호출 토교를 이탈, 중경 임정의 경위대 가입을 유혹하는데, 부정한 자금으로, 심한 경우 미인계까지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토교부대를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분노를 넘어 슬픔이 가슴에 차올랐고, 목 메이게 했다.

중경을 다녀온 대원들 중 상당수가 자신들과 임정, 특히 내무부(부장 申翼熙)와의 사이에 오고간 대담의 내용은 물론 중경을 다녀온 사실까지도 은폐하려 하는데서 더욱 그랬다. 토교부대의 창설에 세계를 얻은 듯 했던 장준하 아니었나! 장준하의 토교부대에 대한 관심은 정말 특이한 것이었다. 적어도 토교부대는 장준하에겐 조국광복의 씨앗이었으니…….

그런데 이 토교부대를 임정의 경위대니 하면서 흔들고 있는 것이다. 장준하는 다시 토교부대의 몽둥이 출동을 선언했다. “결코 강제가 아니요. 우리 토교부대의 대원을 유혹해 빼어간다니, 이는 결코 좌시할 수 없소. 이젠 끝장을 봐야겠소.” 그러면서 장준하는 몽둥이 하나를 들고나섰다. 그런데 놀라지 말라. 정말 삽시간에 20여명이 “좋소. 갑시다.”며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니 말이다. 저들의 또 다른 손에는 몇 십 매씩의 잡지 <등불> 호외판이 들려있었다. 지난 밤을 지새우면서 등사기로 찍어낸 것들이었다.

“경위대를 해체하라!”, “광복군 토교부대원들을 조국 광복의 전선에서 죽게 하라.”
청사에 들이닥친 대원들은 전단지를 뿌리면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저들이 주목한 것은 내무부장 신익희였다. 구호를 외치면서 청사에 들어섰을 때, 신익희는 이미 청사를 빠져나가버렸다. 피신한 것이었다. 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경위대를 해체하라!”, “우리 모두를 조국 광복을 위한 전선에서 죽게 하라!”
그렇듯 모든 대원들이 의분으로 들끓고 있는 바로 그 때 의외의 인물이 아주 평온한 얼굴로 토교대원들 앞에 나타났다.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錫) 장군이었다. 처음 대하는 모습이었지만 장준하는 그가 저 유명한 청산리 전투의 명승장 이범석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게 영감이라는 것이었을까?

마치 무슨 밀약이라도 있었던 듯 20여명의 반동군(?)들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몽둥이를 들고 씩씩거리던 무리들이다. 철기를 투시한다. “나 이범석이외다. 난 지금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찾고 있소이다. 지금 당장 그런 젊은이들이 필요하외다.” 무리를 지어 선 자들 중 조용히 들고 있던 몽둥이를 내려놓는 이들도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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