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회 칼럼 단신
긴급조치 1호 위반, 74년 시국기도회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에 대한 추가 진술서
이해학 목사(한일시민선언실천연대 공동대표) | 승인 2015.06.11 15:35

요즈음 41년전 긴급조치 민사재판을 하고 있다. 긴급조치9호 재판은 이미 기각으로 판정이 났고 긴급조치1호 재판으로 민주주의 흉내를 내느라고 바쁘다.

2013년 4월, 대법원이 “긴급조치는 위법”이라고 판시해놓고선 지난 3월 26일, 대법원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긴급조치 발령에 대해 "국가배상법상 불법 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를 발령한 것은 '고도의 정치행위'였기 때문에 정치적 책임은 있지만 민법상 불법행위 책임은 없다”며 자기모순적 판결을 내 놓았다.

민족의 역사가 서구제국과 일본의 침략에 방향을 잡지 못한 해방정국에서 박정희라는 한 기회주의적 출세욕망에 사로잡힌 군인이 국가권력을 쿠테타로 찬탈하고 불의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유신헌법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강요하고, 국민적 저항이 거세지자 궁여지책으로 긴급조치를 처방한 통치기술을 사법부는 합리화하고 있는 것이다. 민주국가라는 장치가 자기기능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사법부이다.

그러나 사법부가 스스로 권력의 똥개가 되어 버리면 국가 폭력의 피해자가 구제받을 길은 없다. 언제 사법부가 독자적으로 역사 회복을 위해 깃발을 들었던 때가 있었던가? 사법부는 정의를 상실한 시대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흙탕물이다. 이제  깨어있는 민중들의 민란 같은 죽음의 행진은 희망이 안보여도 계속되는데도. 

1974년 1월 17일 아침 나는 10여분 만에 아내 몰래 <나를 염려하는 이들에게> 라는 글을 남기고 집을 나왔다. “우리시대의 정치적 어둠이 너무 짙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다. 새벽을 깨우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느낀다. 우리 모두 새로운 조국의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요지의 글인 것 같다. 나는 나의 무모한 행동에 주변사람들의 염려를 알기에 자신을 변호하는 소위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양심선언 이라는 용어도 그 뒤 김지하가 사용해서 유명해졌다) 그길로 달려가서 대통령령긴급조치를 짓밟아버렸다. 긴급조치법 발표 후 최초의 일이다.
 

   
▲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비상군법회의 법정에 선 개신교 성직자들(오른쪽부터 김진홍, 이해학, 이규상, 인명진, 박윤수, 김경락)
한승헌 변호사는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에 긴급조치 1호에 대한 글 중 젊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정면돌파’에 이렇게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처럼 표독스러운 정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개헌서명운동을 계속하다가 긴조 1호 위반으로 검거된 정면돌파형 그룹이 있었다. 김진홍(활빈교회 전도사·32세), 이해학(성남 주민교회 전도사·29세), 이규상(수도권특수선교위원회 전도사·34세), 인명진(도시산업선교연합회 목사·29세), 박윤수(창현교회 전도사·29세), 김경락(도시산업선교연합회 총무 겸 영등포 중앙교회 목사·36세) 등 기독교(개신교)계의 젊은 성직자 6명이었다.

그들은 1월17일 오전 10시,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7층에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 예고 없이 들어갔다. 총무인 김관석 목사를 동석시킨 가운데 ‘1·8 긴급조치 철회 및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촉진하기 위한 시국선언 기도회’를 열었다. 이해학 전도사가 ‘1·8 조치는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는 등 3개항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리고 참석자 일동은 개헌청원 서명록에 서명한 다음,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기독교 관계 기관 및 단체들을 찾아가 선언문을 배포하고 개헌청원 서명을 받았다.

그들은 검거되어 ‘남산’으로 통칭되는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수사관들은 누가 주범인지를 따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김진홍, 이해학 두 젊은 전도사는 서로 자기가 주범이라고 우기는 바람에 오히려 수사관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수사요원들은 중정이 생기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두 사람을 존경한다고까지 했다. 그런가 하면 수사관들이 자기가 담당한 사람을 주범으로 만들기 위해 다투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성명서와 현수막의 글씨를 쓴 김진홍 전도사를 주범으로 하기로 합의(?)했다.

어떤 한 사람의 어떤 사건은 동시대의 모든 이들이 영향을 받는다. 긴급조치 9호 재심 재판이 아무 소용없이 기각으로 끝났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사건을 극히 짧고 어둔한 표현으로 더듬어 다시 긴급조치 1호에 대한 진술서를 다음 같이 써서 재심재판부에 제출하였다.

<진술서 이해학>

진술인은 1974년 1월 17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실에서 김진홍, 이규상, 인명진, 박윤수, 김경락과 함께 긴급조치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체포되어 남산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긴급조치1호 위반 형사처벌과 관련하여 조사받고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받고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안양교도소에서 석방되었습니다. 수사과정에서 당한 불법행위 등 본인이 당한 피해 내용에 대하여 추가 진술을 합니다.
  
1. 1974. 1. 17. 진술인을 포함한 본 건 피고인들은 당시 KNCC 김관석 총무 집무실에서 긴급조치 반대 시국기도회를 갖고 본인이 성명서를 읽었습니다. 성명서 내용은 “하나, 긴급조치 철회하라. 둘, 유신헌법 폐지하라. 셋, 민주주의를 회복하라.” 이었습니다. 반대서명을 받으러 다른 사무실을 돌다가 갑자기 달려든 정보원들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되었습니다. 이때 자기들이 누구인지 신원을 밝히지도 않고 범죄사실 고지도 없었고, 미란다 원칙 고지도 없이 무조건 연행하여 동대문 경찰서를 거쳐 남산 중앙정보부로 이송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본인은 지난해(1973) 9월 재미교포 신문기사에 당시 국내 신문에는 한 줄도 안 난 박형규 목사 구속 사실과 그의 설교문이 실린 신문을 복사하려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 맡겼다가 체포되었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5일간 빨가벗기고, 군화발로 짓이기고, 침대목으로 사정없이 맞아, 온몸이 시퍼렇게 고문당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 때는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후, 그 납치 팀이 나를 공산주의자와 연결하여 김대중과 연계시키려는 공작을 하였습니다. (그 때 4층에서 조사팀장이 경찰에서 파송 온 일제 형사출신 일명 ‘최철통’ 이라 불렀음.) 나는 겁이 나서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기에, 지금까지 어디에도 이 사실을 발표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표현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도 있다”고 협박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너무 치욕스런 부끄러움 때문에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3개월 전에 있었기에 나는 차라리 우리를 태우고 가는 자동차가 어디에 부딪쳐 사고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였습니다.

2. 중앙정보부에서는 여섯이 각방에 들었고 주로 세 사람의 조사관이 취조하였습니다. 얼마 후 서울구치소로 옮겨졌지만 구치소로 옮겨진 후에도 4일 정도 밤마다 정보부로 데리고 가서 밤샘 조사했습니다. 정보부에서 잠 안 재우기와, 같은 말 다시 쓰고, 다시 묻는 것을 반복하였습니다. 말로는 “우리가 이렇게 신사적으로 대해주는데 지난해에 정보부에서 자살했다고 발표한 서울법대 최종길 교수를 우리가 죽였겠느냐? 괜히 빨갱이들이 선동하는 것이지.” 하면서도 원하는 대답을 하지 않으면 자신들도 모르게 화가 폭발하여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습니다. 그리고는 못 먹는 담배를 권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가진 습관을 참느라 애쓰는 것 같았으나, 화가 나면 본색이 들어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 경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말도 안 된 질문을 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면 자기를 비웃는다고 역정이 터져 뺨을 때리는 등 한참을 화풀이를 하고는 약을 한주먹씩 먹곤 하였습니다.
  
나는 지난해 이들 앞에서 ‘벌거벗은 매뚜기’라고 느끼며 고문 받은 산 경험이 있기에 나에게 하듯 하면 능히 사람 죽이고도 남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해 헌법개정백만인청원운동으로 구속한 장준하, 백기완님은 긴급조치를 소급적용하였지만 우리는 최초로 긴급조치를 짓밟고 구속되었기에 우리에게서 평양을 다녀왔다는 고백을 강요하고 간첩과 접촉한 것처럼 만들고자 하였으나, 우리들의 인맥이 너무 단순해서 자기들의 의도대로 연결하지 못한 듯합니다.
  
3. 남산 중앙정보부의 거대한 음모는 주범 바꾸기입니다. 나를 수사하던 조사관이 갑자기 분노하며 내게 호소하기를 “이해학이 분명히 주범인데 김진홍을 주범을 만들려 한다. 윗선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투덜댔습니다. 나는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대질신문을 하자고 말 하였지만 김진홍 조사관까지 와서 자기도 어쩔 수가 없다고 나보러 양보하라고 끈질기게 종용하여, 결국 김진홍이 주범으로 나는 종범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중앙정보부와 윗선이 만들어 낸 음모적 조작입니다. 왜 그랬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내가 이 사건을 기획한 것은 74. 1. 8일 대통령긴급조치 발표후 서울제일교회 사무실에 모인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Korea Metropolitan Community Organization) 실무자 모임에서 총무인 권호경 목사는 이제 긴급조치 하에서는 빈민을 조직하고 그들을 의식화 하여 자기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인으로 살도록 돕는 빈민선교를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토론한 결과 이제부터는 정치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투쟁을 조직할 책임을 누가 맡는 게 좋은가 질문할 때에 김동완이 이해학이 맡는 게 좋겠다하여 나는 조직의 합의로 이번 거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맨 처음 당시 가깝게 지내던 청계천 활빈교회 김진홍을 찾아가서 설득하였습니다. 그가 쾌히 허락하고 인명진(영등포산업선교회), 인명진이 김경락(감리교 산업선교회)을 동참시키고 내가 이규상, 박윤수를 설득하여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수사에 기본도 안 지킨 중앙정보부가 주범을 바꾸었습니다. 그것도 외압에 의해서. 수사관들 말로 중앙정보부 생긴 이래 서로 주범싸움을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감동스런 평가를 하였습니다.
     
4. 검찰청에서 문모 검사는 내게 한 마디의 조사도 안하였습니다. 내가 구치소에서 포승줄에 묶여가지고 검사실에 들어가 서 있었습니다. 검사인 듯한 자가 나와서 힐끗 보고서는 “꿇어 앉쳐 놔! 나 이발 간다.” 하고 나간 것이 끝입니다. 모든 조사는 보조원이 질문하는데 중앙정보부에서 온 문건을 반복하는 선이었습니다. 다시 긴급조치에 도전한 것은 평화로운 민주국가에 도전한 것이며, 적을 이롭게 할 목적이 있다고 자백토록 이리저리 질문을 반복해서 엄청 실랑이를 하였습니다. 또한 검사실에서는 긴급조치에 항거하는 것은 이적행위라고 규정하고 간첩들이 하는 공작활동의 일부이기에 국가보안법을 적용시키겠다고 겁박하였습니다.  
  
5. 군법재판장에는 방청석에 제한된 가족 외에는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였습니다. 1심 주재판인 이세호 대장은 영락교회 집사이면서 우리에게 “왜 신앙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지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느냐?”고 다그쳐, 유일한 변호사인 한승헌 님은 참다운 신앙인은 역사에 대한 사회적 책임자세로 서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을 해왔습니다. 나중에 부정축재로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옷 벗은 이세호 대장은 결국 우리의 행동은 북한만 이롭게 하였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6. 그 해는 40년만의 혹한이라고 하여 날씨가 계속 추었습니다. 그런데도 수사과정에서 가족, 변호인 접견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구치소 독방에 수감하고 침낭이나 책을 받게 되어 있는 데도 일체 주지 않는 차별을 받았습니다. 영하 25도가 오르내리는 추위에 판자냉방에서 발이 얼고 귀가 얼어서 20여년이상 가려웠습니다.   
  
7. 구치소에는 요시찰 대상자로 노란 딱지를 붙여 간첩 빨강딱지와 구분하고 있었고, 운동시간도 안 주었습니다. 민청학련 학생들이 무더기로 들어와 현행법에 운동시키도록 되어있다고 여론을 돌려 여기저기서 항의하니 일반 수형자와 별도로 짧게 운동을 시켜주었습니다. 식사는 곰팡이가 하얗게 핀 단무지를 비롯하여 먹을 수 없이 주었고 멀건 한 된장국물을 마시면 법자식기 바닥에 까만 모래가 한 겹 끼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연탄재더미에 뿌린 배추를 씻지도 않고 그대로 솥에 넣어 끓인 된장국입니다. 인간을 배려하지 않은 불량한 관리 속에서 영양실조로 머리가 한주먹씩 뽑혔고 손톱이 얇아져서 저절로 부러졌습니다.

8. 특히 진술인의 구속기간 동안 지방 정보원들을 가동하여 고향인 전라북도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에 사시는 작은 아버님이신 이선용을 비롯한 친척들을 찾아가 진술인이 ‘빨갱이’라고 유언비어를 퍼뜨려 친척 간의 관계를 훼손하여 놓았습니다. 조카 이애자는 이유 없이 성남에 있는 삼영전자 공장에서 해고되기도 하였습니다.

9. 1975. 2. 15일 석방 날부터 성남경찰서 정보과에서는 권길상, 김성남 두 형사를 그림자같이 밀착 경호를 하여 내가 만나야 할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하고 차단하였습니다. 그들은 내가 두 딸아이들 유치원 소풍을 따라가도 동행을 하고, 목욕탕은 물론, 고향 순창 조상들 성묘 길도 함께하였습니다. 지리산 노고단 등반길에도 그림자 같이 붙어서 제 삶을 비참하게 하였습니다.
  
10. 특히 인혁당 사형 날 분노의 삭발 한 나를 납치해서 인혁당 가족 돕기에 갈 수 없어 결국 아내만 다녀왔습니다. 지미카터 한국 방문 시에 행여 인권문제 제기할 것을 염려하여 나를 납치하여 차에 싣고 온양에 있는 한 여관에 감금하여 나는 단식투쟁을 하였습니다. 내가 서울 행사나 모임에 갈려고 하면 문밖에서 막아 못 가게 하기를 수도 없이 하였습니다.   
  
11. 교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교회오지 마라” “주민교회 다니면 폐가 한다”며 고시 공부하는 청년에게 “합격해도 신원조회에서 떨어뜨린다.” “주민교회 빨갱이 교회다.” 협박하고, “다른 교회로 가면 집사를 시켜주겠다” 회유도 하였습니다. 제가 출소할 때 교인들이 3분의 1로 줄어서 겨우 노인네 몇 분과 학생들 무직 청년 20여명밖에 없었습니다.   
  
12. 어느 초등학교에 불온 삐라가 붙었는데 그 삐라가 주민교회와 관계있는 것처럼 단정하고, 또 이를 계기로 주변에서 주민교회를 혐오하도록 유도하는 조사를 받았습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연행해서 붓글씨 필적검사를 받는데 <수령님 빨리 오십시오>등을 안 쓴다고 하면 옷을 벗기고 때리고 욕하고 위협하며 강요하였습니다. 또 밤이 다가도록 귀가시키지 않으니 믿지 않는 가족들의 원성은 대단하게 되었습니다.   
  
13. 성남시는 민방위훈련, 예비군훈련, 중소기업인 모임 등 모든 교육에 주민교회를 음해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하였습니다. 김남식 이라는 목사를 강사로 하여 ‘이해학은 빨갱이고, 주민교회는 불순한 반정부 집단’이라고 악선전을 공개적으로 하여, 제 개인의 명예훼손은 물론 선교활동을 방해하였습니다. 또한 주변 군부대 비행장, 행정학교에 배치된 사병들에게 “이해학을 아느냐?” 질문하여 안다고 하면 제대까지 내내 한직에서 고생토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민주국가가 할 짓입니까?   

14. 저와 교인들은 정보공해에 시달렸습니다. 경찰· 기무사· 정보부· 시청과 동사무소 등이 경쟁적 이었습니다. 설교는 물론 문화활동까지 문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교회 청년들이 연극을 하였는데, 전원 경찰서에서 조사 받으며 머리가 터져 피가 나도록 고문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죽음도 축복이다>란 연극에서 죽지 못해 괴로워하는 왕은 박정희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극본은 이미 시중에 나온 책에 실린 오소운 극작가의 글이었습니다. 그 연극을 게시판에 공고를 하였는데, 어느 정보원은 보고를 하고 어느 정보원은 안하였답니다. 그래서 보고를 소홀히 한 정보원은 시말서를 쓰고 결국 강도 높게 보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악순환의 연속에서, 전화는 항상 도청하고, 편지 검열당하여 때로는 목포에서 보낸 편지와 충주에서 보낸 편지 내용이 바뀌어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모임이나 만날 약속은 아예 날짜 지나서 들어오는 치밀함도 있습니다. 우체국에는 아예 이해학 우편물을 관리하는 직원이 배치되었다고 우체국에 근무하는 교인 친척이 알려주었습니다.  

15.  공단에서 노동자 주례를 하였는데 노동자를 위장결혼식이라고 선동하고 폭력혁명을 한다고 선전하고 경찰을 수개 대대 동원배치 하였습니다. 모든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주민교회 다니는 학생들을 파악하고 못나가게 음해하였습니다. 교회에 오는 학생은 입구에서 각 학교 교사들이 출석을 막고 데려가서 종교활동을 방해 하였습니다. 판사님, 어느 나라 이야기 입니까? 우리나라 자유대한민국에서 제가 겪은 이야깁니다.  
  
16. 노동자들이 성남시 상대원 공단에서 발견한 것이지만 취업을 막는 노예문서인 ‘블랙리스트’에 우리교인 84명이 들어있어 제도적으로 생존권을 박탈한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그곳에어머니 한맹순을 비롯한 아상락(성가대 지휘자)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실제로 중앙병원 간호사로 가기로 약속되어있던 한미애(현재 미국 하와이 거주)는 이유 없이 입사가 거절되었습니다. 이는 국감에서도 지적사항이었고 <화해와 진실을 위한 과거사청산위원회>에서 주민교회에 대한 국가폭력을 인정하고 국가는 적절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민주와 정의를 위장한 정권하에서 자행된 만행을 <기독교 100주년사>에서는 주민교회 탄압 사건을 12페이지에 소상히 기술하고 “한 사람을 체포하기 위해 극히 신경질적이고 병적인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16. 미국 씨애틀에서 <반핵평화 세미나>에 강사로 초청을 받았으나, 국가적 요시찰로 분류하여 해외출국정지되어 여권을 내주지 아니해서 못 나갔습니다. 나 대신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의 금영균 목사가 나갔습니다. 그 이후에도 다섯 번이나 신청을 불허하다가 이 조치는 김영삼 대통령 때 겨우 풀렸습니다. 저는 갇혀 있을 때만이 아니라 석방되어서도 오래 동안 국민권, 생존권, 인권 등을 박탈당하였습니다.
  
이상은 진술인이 국가와 사법부로부터 당한 불법부당 한 사항입니다. 여기에 추호의 거짓이 있다면 본인이 책임을 지겠습니다.

2015. 6. 2.    위 진술인 이 해 학

이해학 목사(한일시민선언실천연대 공동대표)  hebulge@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