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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상><이적의 민통선 예수 20>
이적 목사 | 승인 2015.06.16 11:06

김포시 민통선안에서 민통선평화교회를 개척해 18년간 목회를 해온 이적 목사의 자전적 성격의 에세이 <민통선 예수>를 매주 연재합니다. 또한 이번 '청문회' 편은 분량상의 이유로 두번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 주-

“이 선생님 이제 시작입니다. 선생님이 기다리던 소식입니다. 선생님이 <5공비리 특위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되셨어요.” 소식을 전하는 삼청투쟁위의 간사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도 내가 5공 청문회가 열리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난 직후부터 청문회 증인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 우리 측에서 증인이 많이 나서게 되었어요. 이제 됐어요. 하늘이 준 기횝니다. 이때 확실하게 까발리는 거예요. 살인마 전두환을 알리는 제일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선생님 축하드려요.” 나는 이 사실이 축하 받을 일인지 불행한 역사를 한탄 할 일인지 참으로 판단 짓기 어려운 순간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축하 받을 일임은 분명히 했다. 삼청을 폭로하기 위하여 두 번의 감옥살이와 세상 사람들로 부터의 멸시와 천대, 심지어는 고향사람들과 형제들에게까지 무시당해가며 이 순간까지 버텨온 내가 아니었던가, 세상 사람들은 고시나 승진시험에 붙어서 출세의 기로에 서면 축하를 받겠지만 나는 그와는 반대의 입장이었다. 권력에 싸움을 걸어야 하고 싸움 거는 위험한 일이 성공이 되면 축하를 받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개인에 대한 눈앞의 이익보다 민족에 대한 이익을 추구하는 멀고도 긴 여정이었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그 해는 내게는 두 가지의 기념비적인 큰 사건이 생겼던 해였다. 한 사건은 삼청교육대가 폭로되던 나의 첫 저서가 발간된 해였고 또 한 사건은 청문회가 열렸던 숨 가빴던 한 해로 기록되던 해였다.

1988년 12월 23일
나는 청문회가 개최되는 날, 미리 서울에 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22일 날 놀라운 정보 하나를 더 듣게 되었다. 12월 24일날 꿈에도 잊지 못하던 오기택 대위가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이 되어 있다는 출석일자까지 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임근실의 죽음을 폭로한 댓가로 오기택이 역사적인 증언대에 서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전율했다.

나는 오기택이 그 사건으로 인하여 처벌을 받던 받지 않던, 그가 80년대에 뭍사람들로 부터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급기야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몰아넣은 장본인이라는 사실과 그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나는 이제 나의 임무가 지켜졌다는 기쁨 앞에 전율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아, 오기택, 오기택 네가 심판대에 서게 되었구나 네가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되었구나> 그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그 심판은 순전히 나의 힘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내가 이 나라 역사에 숨겨진 베일을 벗겨낸 유일한 공헌자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나의 오만이고 착각이었을 것이다. <겸손하라, 더 낮아져라> 성경의 기본정신이 되는 이 기본적인 성구 앞에서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들을 나는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내게 하나 둘 내가 마음먹었던 일들을 이루어주고 있었음을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오만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지독히도 겸손한 한 인간이었으며 사회과학과 민족문학을 떠받드는 합리주의자였고 실용주의자였다. 그러나 내 자신이 실용주의자와 인간적 합리주의에만 빠져 있었지 정작 알아야 할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상황 앞에 하나님은 내게 일의 성공과 실패를 당근과 채찍처럼 휘두르고 있었음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여간 청문회가 실시되던 그해는 나의 삼청폭로에 대한 공로는 순전히 나의 작품이며 ,나는 우리 민족 앞에 내 온 몸을 던져서 그 모순을 바로 잡았다는 자부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드디어 청문회 날이었다.
내가 앉아 있는 청문회장 앞 주변으로는 TV카메라와 신문기자들의 사진기가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침착을 잃지 않으려고 애를 썼으나 나의 모습이 전국으로 보도될 것에 대하여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야당인 평민당 등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떠 있었다. 민정당은 나의 입으로 나오는 또 다른 증언에 긴장하는 것이고 야당들은 나의 폭로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마에 땀이 솟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는 참고인 및 증인석이라는 작은 팻말이 놓여 있었고 가슴에는 국회 출입증이 매달려 있었으며 마이크가 내 앞에 버티고 있었다. 곧 이어 5공 비리 청문회가 시작 된다는 위원장의 방망이 소리가 <땅땅땅>세번 울리고 나서 카메라와 모든 국회의원들의 눈이 일시에 내게로 쏠리고 있었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하며 두 어깨에 힘을 꽉 주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위원장은 나의 인적사항을 확인했다. 나는 대체로 목 울대에 힘을 주어 그의 물음에 또박또박 답을 했다.

당시 장세동을 비롯한 권력의 실세들이 전부 내가 앉은 자리를 거쳐 갔다. 심지어는 재벌인 정주영씨까지 이 청문회장에 앉아서 진땀을 뽑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죽음에까지 몰아간 김만기 사회정화위원장, 박세직 올림픽위원장 삼청교육대를 훈련시켰던 수많은 사단의 사단장들이 이 자리를 거쳐 가며 혼쭐을 당하였다. 나는 피해자다. 그들은 가해자로 이 자리를 거쳐 갔고 나는 피해자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그들은 역사의 죄인일지언정 나는 죄인일수 없었기에 떳떳한 자리였다.

나는 절대 떨 수 없었고 당당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위정자 집단인 민정당 위원들의 답변에 유의해야 한다고 이빨을 깨물었다.

제일 먼저  평민당의 최락도 의원이 질문자로 나섰다. 그는 나의 연행 과정과 억울하게 연행되는 사연에 대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질문을 던졌다. 나는 당시의 상황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또박또박 답변했다. 그는 나의 억울함을 청문회장에서 밝혀주려고 하는 것 같았으며 나 같은 사람을 끌고 간 정부에 일격을 가하려는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최낙도 의원:당시 이적씨는 억울한 감호 처분을 몇 년 받았습니까?
이적:네, 3년을 받았습니다.
최낙도 의원:그것은 재판에 의한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아니하고 군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당한 것이지요?
이적:네, 그렇습니다.
최낙도 의원:그것은 법률적으로 행할 수 없는 불법 아닙니까?
이적:네 그렇습니다.
최낙도 의원:증인은 임근실씨를 잘 알지요?
이적:네, 잘압니다.
최낙도 의원:그럼 임근실씨에 대하여 묻겠습니다.

최 의원은 그때부터 임근실 씨의 죽음에 대하여 물고 늘어졌다. 청문회장은 일순 분위기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시선도 일순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최낙도 의원:임근실씨는 어떻게 압니까?
이적:원래 2소대였으나 악질 수련생이라 하여 우리 3소대로 옮겨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소대가 악질조교들이 가장 많은 소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 소대로 보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첫 만남이 되었습니다.
최낙도 의원:기록(증언)에 의하면 81년 2월초에 임근실이가 땅에 떨어진 밥을 주워 먹다가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되어있는데 그게 맞습니까?

드디어 최낙도 의원은 임근실 사건을 유도하며 세상에 폭로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임근실이 죽음에 이른 과정을 글이 아닌 말로서 직접 증언케 한 최초의 삼청교육대 미스터리를 폭로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근실은 부대 기록에는 <병>으로 자연사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적:그렇습니다. 취사장에서 밥알을 주워 먹었다고 하여 특별교육대에서 개 맞듯이 맞아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임근실은 민간인이 불침번을 설 수 없다고 거부했고 강제노역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조교들의 폭행에도 저항했습니다.
최낙도 의원:계속 말씀 하시죠
이적:임근실은 나와 함께 소대 배식을 위하여 취사장에 갔습니다. 그때 함께 갈 때 그는 이미 조교들의 구타에 의하여 골병이 들어있었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 힘든 모습이었습니다.
최낙도 의원:배가 매우 고팠습니까?
이적:그렇습니다. 우리는 배가 고파 거의 아사지경에 있었고 임근실이 취사장에서 밥알을 주워 먹음으로서 더 많은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당시에 썼던 수양록이라는 것을 가져왔는데 한번 읽어봐도 되겠습니까?

<오늘 저녁 임근실이가 배가 고파 짠밥을 주워 먹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벌거벗을 몸이 되어 연병장에 집합했다. 영하의 혹독한 날씨가 사람을 전율케 했다. 차라리 너무 고통스러워서 빨리 얼어 죽고 싶었다. 조교들은 임근실 씨가 <교도소에서 10년을 살았으면 살았지 이곳에선 하루도 못살겠다.>고 말한 것을 명분으로 참혹한 단체고문을 준다고 하였다. 나는 비록 임근실 씨의 그 말 때문에 고통을 당하더라도 그가 말한 그 절규에는 우리의 절규도 함께 포함되어 있기에 그 대담성과 솔직한 발언에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뒷날 나는 이 수양록은 검열 때 적발이 되어 임근실과 함께 가혹한 물고문을 당하였습니다.

최낙도 의원:물고문은 누구에게 당했습니까?
이적:오기택 대위가 보는 앞에서 조교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고 정도형 조교 하고 헌병대 지 대장(중사)에게서 당했습니다.
최낙도 의원:그때의 기온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적:영하 17도 가량 되었을 살인적 추위였습니다.
최낙도 의원:임근실 죽음에 대하여는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이적:네, 임근실씨는 부대 자체에서 만든 특수교육대에 끌려갔습니다. 그 특수교육대는 정도형을 비롯한 중대에서 제일 악질로 소문난 조교 4명이 담당이 되어 특수교육을 시키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임근실은 하루종일, 오리걸음과 구보, 집단 구타, 무차별 폭력으로 생사를 오락거리다가 끝내 연병장에서 쓰러졌습니다. 조교들은 임근실 씨가 쓰러지니까 임근실 씨가 엄살을 떤다고 하여 이미 눈을 감고 있는 시체 위에 집단 군홧발 폭력을 퍼부었습니다. 엄살이라는 그들의 폭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폭력을 퍼부어도 임근실 씨가 꼼짝을 하지 않으니까 그때서야 이상한 조짐을 느낀 조교 하나가 소대장인 염근석 중사를 불렀습니다. 염근석 중사가 임근실의 몸 위에 군홧발로 흔들어 보니 그때서야 임근실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이거>죽었잖아 하고 죽음의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최낙도 의원:그때 시간이 몇시나 되었습니까?
이적:오후 4시~5시 가량 되었을 겁니다.
최낙도 의원:그때는 조금씩 어두워지려고 하는 시간이었는데 임근실이 낮은 포복을 하라고 하니까 결국 쓰러져 버렸고 조교들는 죽은 줄도 모르고 시체 위에다 계속 구타를 가했다 그런 말씀이죠, 그때 그 장면을 목격하고 들었던 사람들은 엄청난 분노를 느꼈겠군요.
이적:느꼈어도 어쩔 수 없었죠. 임근실이 죽은 후 중대장이 들어와 <오늘 여러분들이 조사단에 불려가서 말하는 행동에 따라 여러분에 대한 대우도 그 행위에 따라 비례 할 것이다.>라고 공갈성 협박을 했고 우리는 실제 임근실 죽음에 대한 조사단에 불려갔어도 그 사실을 폭로치 못했습니다. 설사 조사단에 폭로했어도 그 폭로는 쉬쉬했을 것이고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을 것입니다.
최낙도 의원:중대장의 협박이 무서워서 조사단에 임근실이 맞아 죽었다는 말을 못했다는 말…
 
최 의원은 질문도중 목이 메이는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나도 목 울대에서 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를 삭이려고 애를 썼다.

이적:우리가 침묵한 덕분에 조사단은 되돌아갔고 그 뒷날 아침에 오기택 대위는 우리가 침묵해 준 댓가로 밥 한 식기씩 꾹꾹 눌러서 배부르게 먹도록 해주었습니다. 동료의 죽음과 밥 한 그릇을 맞바꾼 셈이죠.
최낙도 의원:지금의 심정은 어떻습니까? 그 당시 피 묻은 역사를 체험했고 오늘날 민주화 역정에서 이런 문제들이 낱낱이 밝혀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불법적으로 보이는 보호감호처분을 억울하게 받았고, 2년씩이나 억울한 감옥살이를 한 점, 또는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 밥알 몇 알 주워 먹고 맞아 죽는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 이런 사실에 대하여 증인이 느끼는 심정을 간단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적:저는 잡혀가기 전에는 사회 과학적 인식이나 정치 같은 역사적 의식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순수 서정문학을 하는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잡혀가서 막상 아무 잘못도 없이 국가로부터 있을 수 없는 폭력을 당해보니까 아하! 이 나라가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구나 잘못돼도 엄청나게 잘못되어가고 있다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여기 있으면 개죽음이라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살아나가야 한다고 발버둥 쳤습니다. 그래서 2년 7개월을 죽음 속에서 살아나온 지금의 심정은 우리 역사에 두 번 다시 이런 반역사적인 작태는 재현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는 것입니다.
최낙도 의원 :이상 본 위원의 질문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마지막 소회를 말하자 최낙도 의원은 모두가 잘 들었을 것 이라는 얼굴을 해보이며 질문을 마쳤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이적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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