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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12>『논어11권』 先進編
이은선(세종대교수) | 승인 2015.06.16 11:43

<명구>
『논어11권』 先進編 18 : 子曰 回也其庶乎 屢空. 賜不受命 而貨殖焉 億則屢中.
                 (선진편 18 : 자왈 회야기서호 누공. 사불수명 이화식언 억즉누중.)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회(공자의 제자 안연)는 거의 道에 가깝게 도달했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 사(공자의 제자 자공)는 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재산을 불렸는데 그의 예측이 자주 적중했다.

<성찰> 

   
▲ 공자의 제자 안회(출처: 유학문화사이트).
오랜만에 『논어』 말씀 앞에 다시 앉았다. 지난 한 달여 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교육정의’에 관한 글을 쓰느라 다른 여유가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의 정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해방 이후 한국 사회가 역동성을 잃지 않은 이유는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이 자주 회자될 정도로 교육을 통한 신분이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거의 불가능해졌다는 연구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이렇게 교육정의가 훼손되는 것이 참으로 염려스러운 것은 그 교육불의는 세대 간의 문제이고, 그래서 그 악영향이 세대를 걸쳐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이번에 성찰하고자 하는『논어』선진편은 후편의 첫 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공자와 그의 제자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스승 공자를 중심으로 당시에는 보기 드문 공부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던 공문가(孔門家)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거기서 각 구성원들의 인격적 특성과 그들의 달란트, 일들에 대해서 공자가 어떤 평가를 했고, 서로 어떻게 삶과 가르침을 나누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선진편의 이름이 연원된 1장에서 공자는 “선진(先進, 선배)들이 예악(禮樂)을 행한 것은 야인(野人) 같았고, 후진들이 예악을 행한 것은 군자(君子) 같다고들 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예악을 행하게 된다면 나는 선진들을 따르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예악이란 오늘날로 하면 ‘인문학’에 해당될 것이다. 한 공동체가 인간다운 삶과 문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기초적인 자유 교양 공부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야인’과 ‘군자’를 대비시킨 것에 착안해 보면 공자 시대에도 이미 예악(인문학) 공부가 어떤 특별한 직위와 직업(군자)으로 보상되지 않으면 안되는 식으로 생각했지만, 인문학 공부는 그런 직위나 직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의 일상과 보편적 인간성(야인)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공자의 지적이겠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요즈음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사라지고, 대신 사회에서는 흥행한다고 비난조로 이야기하지만 나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그러한 진행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제 인문학을 더 이상 어떤 구체적인 호구책을 마련해 주는 공부가 아니라 인간 누구나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공부로 생각한다면 오늘의 대학이 전문적인 직업훈련소가 된 마당에서 인문학이 그러한 대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 공부를 통해서 여전히 교수라는 직업을 보유하고 있는 나는 점점 더 불편한 마음이고, 그래서 빨리 야인으로 돌아가고 싶다. 인간이 인간되는 공부를 ‘전공’으로 해서 ‘이득’(利)을 취한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우리가 이번 표제문으로 삼은 18장 구절에는 공자의 두 제자 모습이 서로 대비되어서 나온다. 그 제자 중에서 안회는 특별하다. 그는 공문가 제일의 호학자로서 얼마나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그 배운 것을 실천하고자 노력했던 사람이었나 하는 것을 『논어』全편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 지난 옹야편에 보면 공자는 다른 사람들은 하루나 한 달도 제대로 仁을 지키기 어렵지만 안회는 3달 동안이나 인간다움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공자 스스로도 처음에는 안회가 어리석은 사람인줄 알았지만 그가 어떻게 지속성을 가지고, 또한 스승에 대한 한없는 신뢰와 존숭을 가지고, 가난했지만 처지를 원망하지 않으면서 공부에 매진하는가를 알고 그를 깊이 인정한다. 그래서 안회가 40세가 안되서 죽자 공자는 “아! 하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나를 버리셨나보다!”(噫 天喪予 天喪予) 라고 통곡했다.

여기에 반해서 안회와 거의 동년배였던 또 다른 제자 자공은 언변에 뛰어났고, 특히 이재에 밝았으며, 정치력도 뛰어나서 공문가에서 제일 부유하여 공자의 주유를 실질적으로 도왔다. 그는 시대적 조건과 명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재산을 모으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 일에서 예측도 잘 맞아서 부를 쌓는데 성공한 제자라고 공자는 그리고 있다.

이 두 제자상의 유비는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과격하게 말하면 맹자의 유명한 ‘의리지분’(義利之分)의 설로도 이야기할 수 있는 두 제자의 삶 중에서 공자는 그러나 안회를 단연 수제자로 꼽았다. 공자는 그런 그가 안타깝게도 요절하자 심하게 애통해 했고, 심지어 옆의 제자들로부터 스승의 애통함이 너무 지나치다는 말을 듣자 그는 말하기를, “내가 통곡했던가? 이 사람을 위해서 통곡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서 통곡한단 말인가?”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알려진 바에 의하면 자공은 공자가 돌아가신 후 상례를 주관하여 다른 제자들은 3년 후에 흩어졌지만 그는 다시 3년을 더해서 6년간 공자의 묘를 지켰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오늘 우리 삶에서도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계를 경험할 수 있을까? 오늘 인간 문화에서 하나됨을 경험하는 장으로 거의 에로스적 사랑만이 회자되는데,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의 사승 관계는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한 기적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일까? 이렇게 예전 인간 삶에서는 실재였던 것이 지금은 거의 전설과 신화가 되어가니 인간 마음 밭의 모습도 달라질 것이고, 우리 공부의 장과 방법도 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학교와 대학의 미래가 크게 변할 것임을 예고한다.

안회는 이랬던 사람이었다. 즉 그의 스승 공자가 광 땅에서 위험에 처했을 때 안회가 뒤에 처지자 공자가 말씀하시길,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다.”, 이에 대해서 안회는 “선생님이 살아 계신데 제가 어찌 감히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스승을 사랑했고 일심동체로 생각했던 안회는 그러나 스승보다 2년 앞서서 세상을 떠났다. 안회의 아버지는 공자가 그 아들 안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공자에게 부탁했다; 선생님의 수레를 팔아서 덧관을 마련해 달라고. 하지만 공자는 그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며 말하길, “재주가 있든 없든 역시 각기 자기 자식을 위하여 말하게 마련이요. 내 아들 리가 죽었을 때에도 관을 쓰고 덧관은 쓰지 못했소. 내가 걸어 다니면서까지 수레를 팔아서 덧관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은 내가 대부의 뒤를 다르기 때문이요.” 하였다.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자식과의 관계가 우선인가 아니면 안회와 같은 제자와의 관계가 더 그러한가? 공자와 같은 성인도 이런 고민과 갈등이 있으셨던 것 같다. 또한 비록 하늘이 자신을 버렸다고 통곡할 정도로 아끼던 제자였지만 그 제자가 죽은 이후에도 계속될 자신의 삶과 역할을 생각하시고 타고 다니던 수레까지는 팔 수 없었던 마음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자책하시는 모습이 이 장에 나온다; “회는 나를 아버지같이 대하였는데, 나는 그를 자식같이 대하지 못하였다.”고 애통해 하셨다.

우리도 이와 유사한 갈등과 고민을 많이 한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비중 문제는 정말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일하는 많은 여성들이 심리적 과부하에 걸려있고, 특히 거기에 더해서 명분과 치레를 중시하는 남편을 두었다면 그 여성의 삶은 고달프다. 현대 인지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는 현대 인간은 “인간이 인간을 잃어버린” 상황에 빠져있다고 지적하였다. 모두가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고, “타인에게 영적으로 다가가려는 욕구가 더 이상 없고”, 그래서 “인간과 인간 간의 연결교량을 발견할 수 없다는 그 사실로 인해 현시대에 우리가 병이 듭니다.”라고 우리 시대의 영적 상황을 잘 지적해 주었다.

정말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앞에서 공자가 보여준 것같이, 비록 그 자신도 유사한 갈등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타인과 그 정도로 정신적인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을까? 부모와 자식 간에, 부부간에, 친구 사이에서, 선생과 학생 사이에서, 동료들과의 관계 등 우리가 맺고 사는 많은 관계들에서 “사람들 모두 서로 스쳐 지나가는” 단절과 차가움을 넘어서 어떻게 기적 같은 따뜻한 인간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이어지는 다음 편 ‘안연편’에서 기대해 본다.

이은선(세종대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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