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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이여, 오늘 또 다시… (출 1-13장)<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20> 출애굽기 13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6.16 12:31

라이트(G. W. Wright)와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행위 (magnalia dei) 라고 부른다. 이것이 일어난 경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택받은 백성들이 요셉의 죽음 이후 400여 년 이집트에서 지내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는 듯 보였지만, 그들을 늘 주시하고 계셨다. 이제 이집트 파라오의 억압이 더는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스라엘과 이집트 모두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분이며, 전능하신 분임을 보여주실 때가 찼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데리고 나가 조상들의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겠다고 말하였을 때(출 5:1), “여호와가 누구이기에 내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아니하리라.” (출 5:2)라며 파라오는 큰소리를 탕탕 쳤다. 더구나 파라오의 그 거절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는 히브리 노예들을 더욱 혹사했다. 그가 공사 현장감독에게 내린 명령은 다음과 같다:

7 너희는 백성에게 다시는 벽돌에 쓸 짚을 전과 같이 주지 말고 그들이 가서 스스로 짚을 줍게 하라 8 또 그들이 전에 만든 벽돌 수효대로 그들에게 만들게 하고 감하지 말라 그들이 게으르므로 소리 질러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우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 하나니 9 그 사람들의 노동을 무겁게 함으로 수고롭게 하여 그들로 거짓말을 듣지 않게 하라(출 5:7-9).

사태가 이렇게 되자 혹을 떼려다 혹 하나를 더 붙인 격이 된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다:

너희가 우리를 바로의 눈과 그의 신하의 눈에 미운 것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출 5:21)

이에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하소연하였다:

22 주여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나이까 23 내가 바로에게 들어가서 주의 이름으로 말한 후로부터 그가 이 백성을 더 학대하며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출 5:2-23)

말이 좋아 해방이요, 해방을 향한 위대한 결단, 대장정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다 앞선 사람들이 이룩한 결실을 따먹고 사는 후대 사람들이 붙인 말이다. 그 당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온갖 고초와 박해, 심지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만 하였다. 아무리 대의명분이 그럴듯하더라도 그 당대 사람들이 쉽게 따르거나 동조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그러나 그 어떤 방해나 어려움도 하나님의 계획과 히브리노예들이 꿈꾸는 해방을 향한 열망을 꺾어놓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출 6:1)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자신이 “여호와임을 알리는”(출 6:7; 7:5, 17; 8:6, 10, 22; 9:14, 29; 10:2; 11:7; 14:4, 18) 표적 열한 가지를 차례로 일으키셨다(우리 말 성경으로 출 7:8-12:51). 곧 이런 표적들은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출 5:2) 라고 말하는 파라오에 대해서 여호와께서 자신을 알리려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이런 뜻에서 표적은 단순한 심판이 아니었다. 히브리민족을 승리자로, 이집트 바로 왕을 패배자로 만드는 데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히브리 민족과 이집트 사람들이 다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 이르며, 여호와를 섬기는 거룩한 백성을 탄생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표적들을 내리신 목적이었다. 그리고 여호와를 여호와로 바르게 아는 것은 곧 그분의 권위와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말이요,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표적사건은 교육과정이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과 선택(선별)을 언급하면서, 로마서 9:17에서 출애굽기 9:16절을 인용하였다:

내가 너(= 파라오)를 세웠음(헤에마드테카 ← 아마드)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출 9:16)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엑스에게이로)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롬 9:17)

출애굽기에서 아마드(= 내가 너를 멸망시키지 않았다, 내가 너를 살려놓았다)란 말은 본디 ‘내가 너를 살려 놓았으니’라는 뜻인데, 우리말 번역은 킹제임스번역과 같이 ‘세워놓다’고 번역하였다. 이 말은 본디 ‘태어나다, 지음을 받다’는 뜻이 아니라, ‘멸망시키지 않았다, 살아 있게 해 주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파라오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긍휼이요, 은총이다. 이런 말로 시작하여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을 향해 파라오가 완악하게 된 것과 유대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않음으로 완악하게 된 것을 대조시켰다(롬 11:7-25). 더 나아가 하나님이 파라오를 완악하게 하신 결과 히브리민족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완악하게 하신 결과 외국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다면 완악해진 유대인은 어떻게 될까? 사도 바울은 이를 자세히 설명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말씀은 그 미래를 암시해주었다: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6-27)

   
 
파라오가 완강하면 완강할수록, 표적의 강도는 더욱 강력해졌다. 처음에는 귀찮고 번거롭기는 하지만 크게 해가 되지 않은 표적으로 시작하더니, 그 피해가 점차 동식물에 확대되어가다가, 급기야는 목숨을 잃는 표적으로 발전하였다. 유대의 미드라쉬는 이 부분을 놓고 이스라엘 인구의 증가를 막으려던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인구증가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백성이 줄어들게 하였다고 설명한다.

어떤 학자들은 이 열한 가지 표적을 이집트 사람들이 섬기는 특별한 신(우상)을 겨냥한 것이라고 본다(특히 종교사학파). 예를 들어 나일강물이 핏빛으로 변한 것은 나일강의 수호신을, 파리 표적은 이집트인들이 섬기는 하트콕을, 가축에게 내려진 표적은 그들이 섬기는 황소 신 아피스를, 그리고 흑암 표적은 이집트의 태양신 라를 각각 대적하였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일리있는 주장이다. 물론 본문이 적용되는 범주를 위와 같이 비좁게 만들어 놓을 필요는 전혀 없다. 어쨌거나 표적이 여러 차례 거듭되자 파라오도 조금씩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우렛소리와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 (출 9:27-28)

이 깨달음과 약속이 실천으로 금방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생각이 다르고 나올 때 생각이 또 다르다’는 말처럼, 이 표적이 사라지자 다시 완강해지고 말았다.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활동 앞에, 특히 ‘이의 표적’이 일어났을 때, 이집트의 마술사들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이는) 직접 신이 하는 일이다” (출 8:15 공동번역)라고 자인하였다. 이로써 왕의 정책 결정과 행동방향을 조언하는 지혜자들이 더 이상 파라오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것이 그에게 적지 않은 타격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이번에는 이집트 관료조직 중에도 균열이 생기며, 파라오의 지지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 신하들이 파라오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이집트가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 (출 10:7)

물론 몇몇 표적은 이집트 사람에게만 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도 임하였다. 위 표에서 보듯이, 이 열 가지 가운데 4-6, 8, 10-11번째를 빼놓고는 이스라엘 민족도 표적에서 면제되었다는 기록이 없다. 이는 그들도 이집트 사람과 함께 이 표적을 겪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표적들이 닥칠 때, 이스라엘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곤 하였다. 이는 이 세상의 좌와 악, 유혹은 하나님의 역사 앞에 서서히 그리고 갑자기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해줌과 동시에, 그것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성도의 정신을 좀먹으며, 넘어뜨리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표적(고난)은 인간을 하나님의 인도 아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도록 서서히 변화시켜 나갔다. 가벼운 시련이 앞에 있을 때, 자신의 한계와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사람과 표적이 거듭되어도 완강하게 저항하는 사람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가로놓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이 굴복과 순종이 빠르면 빠를수록 표적은 은혜-축복으로 바뀌지만, 그것이 늦으면 늦을수록 그 운명은 엎친 데 덮친 격(설상가상 雪上加霜) 이 된다. 신명기 2:30이다: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가 통과하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넘기시려고 그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신 2:30)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막아내거나 감당하지 못할 표적이 인간과 세계를 압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이 표적의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을 곰곰이 살펴보아야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천재지변이 사람과 아무런 관련 없이 우연히, 저절로 일어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하늘)의 노여움을 살 수밖에 없는 과오, 표적의 씨앗을 뿌리며 살아왔던 지난날의 허물을 회개하곤 하였다.

우리는 이집트를 휩쓴 표적도,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읽을 수 있다. 이집트 땅에서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아니 자식에게까지 그 노예 신분을 물려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탄식과 아우성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촉발시켰다. 그곳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에 신음하며, 풀려날 기약도 없이 사는 히브리 노예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표적의 씨를 품고 있다. 이것이 어찌 그 옛날 모세 시대에만 통하는 이야기이겠는가? 오늘날에는 노예가 없습니까? 물론 그 시대와 똑같은 모습의 노예는 없다. 그러나 돈의 노예처럼 된 사람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 성이나 술, 약품에 중독, 이데올로기와 시대풍조의 노예, 지식과 경험의 노예, 습관과 버릇에 고착,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의 노예 등 그 항목을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노예의 모습이 다양하게 현대사회에 널려 있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을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정신에 따라 빛내며 갈고 닦지 못한 채, 이 세상에 속한 그 무엇인가에 얽매여 살아간다면, 그것이 바로 노예생활이다. 성경은 이 걷잡을 수 없는 노예화의 물결,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가는 이 세상 곳곳에 도사린 유혹과 시험에서 벗어나는 길이 하나 있다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다. 곧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만” 무릎을 꿇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믿음이 굳건하면 굳건할수록, 세상과 세상 풍조 앞에 더 당당하고 더 바르게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 4:10) 주님의 본보기를 따르는 사람은 세상 풍조와 다른 사고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 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거나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이런 뜻에서 모세 시대의 출애굽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모두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체험해야할 사건이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과 거기에 이어지는 유월절 및 무교절로 하나님 은총을 기념(기억)하는 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언약과 예배공동체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이다. (19-40장 참조)

탈무드는 우리에게 이 출애굽 사건을 다음과 같은 자세로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였다:

어떤 사람이 반신불수가 된 랍비를 찾아와 교훈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하나 들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랍비는 유명한 바알셈의 제자였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든지 듣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 랍비는 찾아온 사람에게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선생님의 스승에 관해 말해주십시오.’ 라 대답하였다.

그러자 이 랍비는 자기 스승이 좋은 교훈을 가르치다가 신명 나는 일이 있으면, 말로만이 아니라 손짓 발짓 다 해가며, 실감 나게 가르쳤다고 말하였다.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할 때면, 랍비 바알셈은 마치 자기가 미리암의 북소리와 춤 앞에 서 있던 것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스승을 흉내 낸다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 모양을 따라 하였다. 그 랍비는 자기 이야기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자기가 반신불수라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 스승이 했던 행동을 흉내 내다가, 순식간에 반신불수에서 깨끗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왕에 하나님 역사를 이야기하려면 바로 이렇게 하라고, 탈무드는 권하는 것이다.

   
▲ 유월절 음식(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e/e1/Pesahplate.jpg)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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