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월드컵의 계절이 돌아왔다. 2002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가 4강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낸 후, 세상은 마치 4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은 우리나라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하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4년 전 우리는 축구라는 드라마를 통해 민족적인 ‘꿈이 현실이 되는’ 사건을 경험했다. 여기서의 꿈이란 세계무대를 주도하는 ‘강대국’을 열망하는 것으로서, 식민지배, 동족상잔, 분단, 군사독재 통치 등 가혹한 20세기를 주변국 3등 국민으로 살아온 민족의 한을 푸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월드컵 4강을 통해 강대국의 꿈이 실현되는 환상을 체험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물론 일차적으로 월드컵이라는 행사의 위상 때문일 것이다. 월드컵은 축구라는 단일 종목으로 치러지면서도, 온갖 종목의 스포츠를 망라하여, 거의 모든 나라가 참여하는 올림픽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 진행되지 않는가?

관중들을 순식간에 역사 이전의 존재로 돌려놓는 축구

축구가 그 어떤 스포츠보다 전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달구어내는 원인은 아마도 축구 그 자체가 갖는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축구는 그 고유한 속성으로 말미암아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획득하며 극적으로 우리 시대의 욕망을 둘러싼 성공과 실패의 스펙터클을 연출한다.

축구는 푸른 잔디가 깔린 직사각형의 드넓은 운동장에서 각자 고유한 임무를 맡고 있는 열 한 명의 근육질 남성들이 거의 두 시간에 걸쳐 모든 육체적 정신적 역량을 쏟아내는 스포츠다. 특히 축구는 탄성 강한 둥근 공을 남성의 육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다리만을 사용하여 움직인다.

다리는 인간의 신체 기관들 중에서도 대체로 이동에 국한된 기능만을 가진 가장 단순하고 원시적인 신체 기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축구는 가장 효과적으로 인간의 원시성을 재현하는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드넓은 풀밭에서 차고, 뛰고, 부딪치고, 구르는 22명의 남성 육체들의 움직임은 관중들을 순식간에 역사 이전의 존재로 돌려놓는다. 기원 이전의 원(原)역사! 자연의 일부로서 오직 육체의 물리적이며 폭력적인 능력에 의존하여 생존의 내기에 겁 없이 뛰어들었을 것 같은 신화 속의 세계! 축구라는 스포츠가 민족주의와 친연성을 갖는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축구 고유의 특성 때문일 것이다.

민족이야말로 근원적인 의미에서 기원 신화를 중심으로 결합되는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가? 거의 모든 나라의 대표적인 스타디움이 축구장을 중심으로 하는 기념비적 거대 건축물로 지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축구장에 운집한 관중들은 그 원시적인 격전을 바라보며 육체적이며 폭력적인 힘의 표상인 초월적인 가부장의 직계자손들로 자아를 재구성한다.

경기장의 거대 건축물은 바로 그 민족이라는 아버지가 가졌다고 여겨지는 남근적 능력의 표상으로서 존엄하게 서있다. 이 순간 그러한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공동체의 구성원이라는 사실 자체가 주체할 수 없이 숭고한 감동의 근거가 된다.

원시적인 열정을 선수 통해 대리 충족하는 일종의 물신주의적 환상(?)

이러한 감동이 동력이 되어 축구를 보는 관중들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다. 축구는 얌전히 앉아서 관전할 수 있는 경기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공과 선수들의 움직임 자체가 너무나도 선동적이다. 경기가 벌어지는 동안 관중들은 마치 사육제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일상의 규율을 벗어난 광란의 상태에 이른다. 물론 이러한 광란은 철저하게 통제된 환경 속에서 제한적으로 발산될 뿐이다.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나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원시 축구는 지금 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집단들 사이에서 벌어진 거의 폭력과 난동에 가까운 유사 전투였다고 한다. 현대 축구는 이와 같은 야만성을 최소화하고 선수와 관중을 명확히 구분하는 합리화 과정을 거쳐 18세기경에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합리화 과정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관중들의 원시적인 열정이 선수들을 통해 대리 충족되는 일종의 물신주의적 환상이 아닐까?

선수들이 드넓은 벌판에서 원시적인 전사의 자유와 용맹을 상연하는 동안, 철저하게 제도화된 삶에 주눅 든 관중들은 치밀하고 촘촘하게 설계된 관중석에서 소리치고 열광하는 제스처를 통해 선수와 환상적인 동일시를 체험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실생활의 결여가 크면 클수록 환상적인 스펙터클은 더욱 이상화된다. 물론 그러한 동일시는 매우 빈곤한 것이다. 관중들은 그 이상을 원한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골칫거리로 알려진 훌리건들은 이처럼 현대 축구의 합리성을 도발하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겠다.

2002년의 "대~한민국", 공동체 이상에 관한 것 아니었을까?

2002년 한국의 관중들은 훌리건의 광적인 폭력이 가지는 무정부성을 지양하고 축구를 진정한 관중의 사육제로 재구성하는 매우 창조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들은 차에게 빼앗긴 도로와 정치권력의 유세장에 불과했던 광장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새롭게 인식했던 것이다.

그들이 외친 “대한민국!”이라는 응원 구호는 단순히 현 체제에 충성하는 국가주의적인 의미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시민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새롭게 체험하면서, 전망하기 시작한 국가 또는 민족 공동체의 이상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는 일정한 현실 비판성을 갖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축구 관중으로서의 ‘붉은 악마’가 이룬 성과들은 개최국이었던 우리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과 배려로 가능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철저하게 2002년에 국한된 현상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또 한편 우리는 2002년의 감격을 그보다 5년 전의 IMF 신탁통치라는 치욕적인 좌절의 상처와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일반 시민들의 차원에서 볼 때 IMF 관리 체제의 핵심은 신탁통치, 그러니까 경제 주권의 이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경제 권력의 실패를 고스란히 시민들의 부담으로 돌린 책임 전가에 있었다. 하지만 정부와 보수언론은 이를 국가 또는 민족적 수치로 의제화 하였다.

이렇게 볼 때 2002년의 경험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공존하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IMF의 상처를 극복하고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여 강대국의 대열에 당당히 진입하는 환상의 체험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들이 2002 월드컵을 관제적 행사로 치르려는 권력의 의도를 가로질러 그들 스스로 닫힌 공간을 열어 제치는 사육제로 전취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창조해야 할 공동체의 이상을 체험하고 꿈꾸는 축제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후자의 경향이야말로 이후 미선이와 효순이의 추모행사를 극미(克美)라는 시각에서 대중적인 촛불집회로 확대하고, 또 이어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적인 염원을 담보하는 후보에게 극적인 승리를 가져다 준 근본적인 힘이었을 것이다.

시민들은 자본과 권력과는 다른 꿈을 꾼다

그렇다면 대체 2002년과 2006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2002년과 2006년 사이에 전개된 시간은 아마도 대중의 자발성과 창조적 실험을 통해 열려진 공간이 고스란히 권력과 자본에 의해 전취되는 기간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 이러한 열망에 편승하여 대통령으로 선출된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시민/민중적인 열망에서 벗어나 보편성의 위치를 점유하려 하였다. 즉 그들은 “온 국민을 대표하는 자”로서 처신하려 하였다. 그것은 기득권을 누리던 소수가 내세워온 허위적인 보편성으로서, 시민적이며 대중적인 요구를 ‘좌파’라는 편파성에 가두어 두던 권력의 담론이 아니었는가?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의 보편성 주장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시민적인 열망에 대한 공공연한 배신 선언이었다. 공약이었던 개혁은 보수세력의 저항을 핑계로 지연되고 있으며, 역으로 핵폐기장 건설지역 선정, 새만금 사업 결정, 대추리사태, 한미 FTA 추진 등 정작 보수정권조차 머뭇거리던 사안들을 거침없이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지방선거는 오직 노무현 정권과 열린우리당의 심판이라는 의미만을 갖는 절망적인 시민적 의사표현이 아니었을까?

한편 2002년 붉은악마 응원단을 중심으로 전개된 시민들의 창조적 자발성이 만들어낸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들은 철저하게 자본이 전유하여 상품의 순환을 매개하는 기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매스컴과 자본은 2002년과 전혀 다른 의미의 월드컵 열기를 부채질 하고 있으며, 권력은 이를 공허한 국가/민족주의로 동원하고 있다. 다시 말해 2006년 월드컵은 급박하게 전개되는 민족적이며 민중적인 현안들에서 도피하는 환영적인 공간으로 선동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2006년 월드컵은 시민들의 가슴이 숯덩이처럼 타들어 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2006 월드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분명한 것은 비판과 냉소로는 스포츠를 허구적 민족주의로 전유하려는 세력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월드컵에서 시차로 인해 밤새워 펼쳐질 거리응원이 전개되는 양상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시민들이 그 축제적 열기 속에서 오늘날의 교착상태를 타개할 어떤 퍼포먼스를 연출하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참여하고 즐기는 가운데 자본과 결합한 매스컴이나 권력이 마련한 틀을 넘어 결코 멈출 수 없는 인간적 생명의 요구를 토해내는 그 에로틱한 몸짓들을 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시민들은 자본과 권력과는 다른 꿈을 꾼다. 지난 지방선거가 제도적인 틀 안에서 외쳐진 절망적인 불만이었다면, 이번 거리 축제는 우리의 꿈과 요구를 선취하고 즐기는 축제의 밤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제도와 권력이 통제할 수 없는 향유가 분노와 절망으로 굳어진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충분히 이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정혁현  keno21@chol.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