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19일 금요일, 흐림

메르스에 묻혀버린 며칠간의 서울에서 그 동안 우리 모두가 얼마나 인간 본질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나 깨우쳐진 바 많다. 달포 전 소피아씨가 모처럼 고국을 다니러 와서 하는 말이 한국이 “너무 잘 살아서 겁나요. 마치 무슨 죄값이라도 치룰 것 같아서요.”라던 걱정처럼 경제적으로 윤택해져 먹고 살 만하면서 사람들이 너무 건방지고 오만해진 태도가 그니의 눈에 생경했나보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던 명목은 지식과 권력이었는데, 돈과 권력이라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을 얼마든지 팔겠지만 결국 그것이 허상임을 깨우치는 순간들이 쑤나미처럼 자꾸 한반도에 닥치고 있다. 우리가 주먹에 쥔 것을 믿고 자랑하지만 든든해 보이던 발밑이 얼마나 허방인가를 깨달으면서 몸서리쳐지는 보름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경고하고 일신을 망쳐가면서 막아내려는 소수 인간들이 그래도 있어서 한 사회와 인류의 역사를 지탱해가고 있음도 사실이다.

오늘 비행기에서 관람한 영화 “Nobody nowhere"의 제목처럼 ” ‘아무도 아니고’ ‘어디에도 없는’ 여자 하나를 내세워 십상시인가 뭔가가 사실상 군림하는듯 소문난 나라, 돈 되게 해 준다면 무조건 찍어 올린 우상이 위기가 올 적마다 허상으로 드러나니까 국민이 얼마나 놀랐을까? 세월호가 침몰하고 한참 지나 현장에 모습을 보인 그니가 흘리던 눈물을 보고 그래도 뭔가 수습이 오리라 기대했던 유가족과 국민, 세월호 일주기를 온 국민이 애도하는 마당에 홀로 남미 여행을 다녀오더니 ‘너무 힘들어 앓아누웠다’는 쇼를 상연해 주던 언론, 오로지 그니를 지지하던 강남 사람들이 메르스에 속수무책이던 정부를 보고서, 자기들이 즐겨가는 삼성병원이 ‘메르스의 메카’였음을 퍼뜩 알고서, 요즘은 ‘그래도 박근혜’라는 핑계를 어디서 찾아내고 있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수상한 눈초리를 교환하고, 아는 사람들은 모임이 꺼림칙해서 회동도 이루어지지 않고 학교와 병원과 호텔이 폐쇄되어 가는 정국에서 우리 눈에 타인, 고통받는 타인들이 보이고 그들의 신음과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으면 좋으련만... 어느 해부턴가 새해인사를 “부자되세요.”라고 건네던 어리석음을 지금이라도 돌이켜 깨달았으면 좋으련만... 인간 행복이 오로지 돈에서 온다는 전염병이 젊은이들을 지나서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만연되는 증세가 멈추었으면 좋으련만... 늑장 정부가 호들갑을 떨어 아내나 남편이 임종하는데 메르스환자라는 이유로 가족이 임종도 못하게 만드는 일까지는 그만두면 좋으련만...

9시에 우이동집을 나와 수락산 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여행자로 가득 차 있었다. 10시 30분에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권을 발급받고 짐을 부치고 112번 게이트에서 루프탄자를 탔다.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제네바에 가는 길은 15시간이 걸린단다. 그래도 전에 비하면 너무도 편한 세상이다. 1981년에 6개월 먼저 로마로 유학간 남편을 만나러 초딩 2학년짜리 빵기, 두 살짜리 빵고를 데리고 ‘싸게싸게’ 동경, 엥커리지, 암스텔담 그리고 로마로 가던 비행기는 두 번 갈아타고서 하루 종일 걸리는 여행이었는데 지금은 반나절에 도착한다. 두 살 여섯 살의 사내애들이 내내 기내에서 깔깔거리고 몸살을 하는 애들을 말리느라 정신없던 ‘엄마’는 35년 후 걔들을 보려고, 큰애가 낳은 두 손주를 보러가는 ‘할머니’가 되어 있다. 그 대신 내 곁의 보스코가 비행기 여행이 지루한지 자그마한 베개를 옆으로 베다가 이마에 대고 엎드리다가 허리에 대다가 하면서 몸살을 하고 있다.

두 시간 쯤 공항에서 대기하다 9시 10분발 제네바 행에 탑승하고, 넓으나 넓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활주로까지 가는데 20분 걸리고, 밤 10시 35분에 제네바 공항에 도착하여 출구를 나오니 큰아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할머니를 기다리며 잠 귀신 쫓던 시우도 결국 곯아떨어져 살금살금 애들 방으로 들어가 그새 훌쩍 자란 두 손주의 잠든 볼에 뽀뽀를 해주고 나니 자정이 되었다.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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