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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 교회를 졸업한(?) 이야기 5<최정규 칼럼>
최정규 | 승인 2015.06.23 14:35

1970년대 파독 광부였던 최정규 선생님의 노동자의 삶과 교회, 신앙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도시생활을 체험한 나는 다시 예전처럼 형을 도와서 열심히 일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동네마다 '콩쿨대회'라는 것을 열었다. 노래자랑 대회였다. 그런데 우리 마을 이웃 동네는 콩쿨대회를 매년 하는데 우리 동네는 그때까지 한 번도 못 했다.

우리 동네에는 최가들이 80%가 되는데 무척 보수적이었다. 누나들은 양장을 입고 다니지 못했다. 그래서 누나들은 읍에라도 나가려면 양장 옷을 싸들고 동네 끄트머리 외딴 집에서 갈아입고, 갔다가 올 때는 또 갈아입고 오는 거였다. 남자들도 여름에 런닝셔츠를 입고 다니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최가들은 문중사당과 서당을 운영하고, 할아버지들은 갓을 쓰시고, 큰 지팡이를 허리 옆으로 끼고 다니셨는데, 양장이나 런닝셔츠를 입고 다니면 집에까지 쫓아오셔서 부모님들을 꾸짖었다. 그러면 누나나 우리가 부모들로부터 벌을 받는 때였다.

   
▲ 사춘기 시절의 필자(오른쪽).
마을 분위기가 이런 정도라 콩쿨대회를 여는 것은 힘들겠지만, 그래도 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때 이웃 마을에서 콩쿨대회를 주관하는 친구들로부터 "야! 너네는 콩쿨대회도 한 번 못하고, 맨날 우리만 따라 댕기냐!"며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학교 다니고, 좋은 옷 입고 다니는 놈들한테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같은 처지에서 사는 놈들한테까지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성질이 났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 친구들은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어느 날 이웃 동네 콩쿨대회가 끝나고 막걸리 뒷풀이를 하는데 친구 놈들이 또 "야! 정규야 너 다니면서 느끼는 거 없냐! 느그 동네에서 콩쿨대회 한번 해봐 임마!"라며 약을 올리자 나는 "야! 우리 동네도 한다."고 말을 해버렸다. 고민이 시작됐다.

만약 내가 콩쿨대회를 준비한다고 하면 집안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난리를 칠 것이 너무 빤하다. 괜히 막걸리 마시고 '쪽팔리기' 싫어서 대회를 연다고 큰 소리를 쳐놨는데, 정말 큰일이었다.

서당에서 "장부일언은 뭐 어쩌고"하는 구절에 세뇌되었던가. 아무튼 그 후 나는 나름대로 노래자랑 대회 장소를 확보하고 동네 사람들에게 선전까지 해가면서, 잔뜩 폼을 잡고 열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대회를 며칠 안 남겨둔 어느 날 정미소 아저씨가 느닷없이 안된다고 하였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능구렁이가 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품앗이 일 나가서 논 김매기를 했다. 몸은 땀으로 목욕하다시피 했다. 나는 오전 일을 끝내고 텅 빈 집에서 까실한 보리밥을 시원한 샘물에 말아서 먹었다. 내가 정지(부엌) 뒷문턱에 앉아서 텃밭에서 따온 풋고추를 멸치젓에 찍어 먹어대고 있는데, 작대기만한 능구렁이 한 마리가 흙 담벽을 내려오면서 유심히 내 얼굴을 쳐다본다.

이런 때면 언제나 하듯 보리밥을 조금 퍼서 던지면서 "삼시랑님, 지발 저도 쪽팔리지 않고 사람 대우 좀 받고 살게 해주세요. 무엇이든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좀 해주세요. 그리고 생겨나서 처음으로 행사랍시고 하는 ‘동진강 콩쿨대회’가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면서 불상 앞에서 빌듯 마구 빌었다. 나는 제발 콩쿨대회가 성사되기를 정말 기원했다. 촌놈의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다.
 
어젯밤 동네 점방에서 방앗간 아저씨가 콩쿨대회 장소로 사용을 허락할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나는 그 동안 방앗간 아저씨께 수십 번도 더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장소를 부탁했었다. 그러자 아저씨는 며칠 후 몇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이며 마침내 승낙을 해줘서, 난생 처음으로 목에 힘주고 폼도 잡았는데 이제 와서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며칠 남지 않은 지금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하느냐."며 따졌다. 아저씨는 "어른이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지 무슨 말이 많냐"며 화를 내면서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했다.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란 말을 듣고 나도 열을 받고 일어서서 따라 나가려니까 점방어머니가 내 손을 잡는다.

"꺼먹둥아!" 아버지 없는 설움도 미치겠는데, 꺼떡하면 ‘애비 없는 호로자식’이라고 무시하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미친놈처럼 별짓을 다 하고 다닌다는 걸 아는 점방어머니가 "에미 이야기 좀 듣고, 막걸리 몇 잔 들고 참어라."며 나를 달랬다.

나는 일명 동네 아들이자 동생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부모님 연배는 무조건 어머니, 아버지로 불렀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많으면 다 누님, 형님, 형으로 불렀다. 그렇게 사는 나에게는 아들이 없는 분들은 아들처럼 대해 주었다. 그 점방어머니는 돈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내가 가면 무엇이던 주셨다.

능구렁이는 내 관상이라도 보듯 능글맞게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다가 나중에는 측은한 인상으로 흙담 밑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또다시 몇 번인가 내 얼굴을 쳐다보다가 마름 속으로 사라졌다. 물 말은 보리밥을 풋고추 멸치젓에 찍어 먹어치우고, 내 신세의 처량함이 비통해서 멍하니 능구렁이가 사라져 가는 쪽을 보다가 내 눈에 '파라치온' 농약병이 눈에 띄었다.

농약병이 눈에 들어오면서, 나는 내 한몸을 어떻게 할 기운도 잃어버린 채 이 세상이 싫어졌다. 힘든 노동도, 배고픔도, 쪽팔림도 견디기 힘들었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농약을 꿀꺽꿀꺽 마셨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푸른 평야가 펼쳐졌다. 어느 곳을 향하듯 나를 실은 구루마(작은 수레)는 한참 가다가 갈림길에 섰는 데, 우리나라 농촌이 아닌 서구의 농촌이 보였다. 나를 실은 마부는 서양식 밀짚모자를 쓴 농부에게 무엇을 물었다. 한참 후 그 문지기 같은 농부는 "아직 올 때가 아니니 가라"고 했다. (지금도 선명한 것은 교회에서 많이 봤던 천국행 길, 지옥행 길로 갈라진 갈림길에서 예수가 서있는 그림이었다) -

동네 집안아저씨 댁에서 식모살이 하던 여동생이 잠간 들렀다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모정(마을 정자)에서 휴식하던 형님께 알려서 경운기에 나를 싣고 부안읍내 병원으로 가던 중 기절해서 쓰러져 있던 내가 느닷없이 몸부림을 치더니 '쌩똥'을 싸더란다.

어머니는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형님은 "이제 내동생이 죽는구나" 하면서 통곡을 했다고 한다. 부안병원에서 위 세척을 하고서 3~4일 후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깨어난 나는 어머니에게 항의했다.

"그냥 죽게 놔두지 왜 살려 냈습니까!"
"그래 그럼 죽어라, 니 애비 농약 쳐먹고 디지고, 아들 새끼 농약 쳐먹고 죽겠다고 설치고, 나도 농약 먹고 죽을란다. 다 죽자. 다 죽어!" 어머니는 한참 동안 엉엉 우시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차츰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나를 어느 날 형님이 막걸리 한 잔 하자면서 나를 불렀다. "정규야! 인자 너도 다 컸으니 정신차려라! 글고야! 우리 성지(형제) 간은 절대로 자살은 없다. 아버지가 우리한테 가르쳐 준 것이여. 다시는 그런 짓 허덜 말어. 글고 내가 니 성(형)이여! 성! 헌티 무엇이던지 이야기 혀!" 나는 그때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거 같았다. 아버지 같은 성의 지원으로 동진강 콩쿨대회는 장소를 동진강 나룻터로 잡았다.

쪽팔리지 않게 콩쿨 대회는 성황을 이루었다. 아마 첨으로 쪽팔리지 않는 일 한 거였다.

최정규  choi504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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