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1970년~1979년) ~ (1)

1)<후진국사회문제연구회>
대학에 입학한 1970년의 나의 첫 대학생활은 가슴 벅차기보다는 고달픈 것이었다. 오전 7시에 천호동 자택을 나와 568번 버스를 타고, 행당동에서 청량리행 버스를 갈아타고, 청량리역 앞에서 학교버스로 다시 갈아탄 후 태릉 교양과정부 교정에 도착하면, 9시 첫 수업 시작 시간을 맞추기에 급급(急急)하였다.

오후 5시에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6시 30분 학교버스 막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을 먹으면 오후 9시가 훌쩍 넘었다. 그런데다가 대학 합격자들에게 실시되는 건강검진에서 나는 폐결핵 중증(中症) 판정을 받아 약을 복용중이기도 하였다.

더욱 힘든 것은 납부금 등 학비 뿐 아니라, 일 년 전에 별세(別世)한 부친(父親)이 남겨 두고 간6가족의 생계 문제를 해결해야 하다는 부담이었다. 그나마 첫 해는 부친이 남겨준 광주(光州) 집을 팔아 솔가(率家)하여 숙부가 사는 천호동 쪽에 작은 집 한 채를 사고 남은 돈으로 첫 등록금과 당분간의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 70년대 서울대학교 교정의 모습.

이런 나에게 고교 선배들인 강우영(자영업, 당시 문리대 정치학과 2년)과 김수호(전 <한국은행> 근무, 당시 상대 경제학과 2년)가 찾아와 <후진국사회문제연구회>(이하 <후사연>)를 소개하면서, 입회(入會)를 권유(勸誘)하였다. 강 선배와는 고등학교 시절 문학동인(文學同人) <원시림>(原始林)에서 같이 활동하였고, 김 선배와는 관현악부에서 같이 활동하였다. 김 선배는 음대지망생으로 오해될 만큼의 현란한 실력의 제1 바이올린 주자(奏者)였지만, 나는 맡을 사람이 없는 학교의 비올라를 같이 맡아보자는 친구, 이자영(재 뉴질란드)의 꼬임을 거절 못했던 얼치기 비올리스트였다. 그 당시의 고등학교로는 드물게 의욕만 가지고 관현악단을 결성한 젊은 음악선생은 단원선발에 어려움을 느꼈던지, 비올라라는 악기를 만져 본 적도 없는 우리(나와 이자영)같은 문외한(門外漢)도 받아들여 “도파 도솔”을 가르쳐 가면서 마침내 그해 연말에 연주회를 열기까지 한 용감한(?) 분이였다.

아무튼 “석 자 만큼 빠진 코”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존경하는 선배님들의 명령과 같은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 선택이 나의 일생을 좌우(左右)할 줄을 그 때는 몰랐다. 나는 “개천에서 난 용(龍)”이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더 의미있는 삶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선배들의 권유를 따랐을 뿐이었다.

김수호, 강우영처럼 각각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들을 권유하고 지도했던 설립회원들은 각 단과 대학의 2학년생들인 신동수(현 자연식품 음식점 경영, 당시 국사학과), 장성효(전 <중앙일보> 논설위원, 당시 사회학과), 손예철(현<경상대학>교수, 당시 중문학과) 김상곤(전 <경기도> 교육감, 당시 경영학과), 심재권(현 <새정련> 국회의원, 당시 상학과) 등이었다.

<한국사회연구회>(문리대). <사회법학회>(법대), <산업사회연구회>(공대) 등 다른 사회과학 서클들이 단과별 모임이었던 것과는 달리, <후사연>은 당시로서는 첫 복수 단과들의 연합 서클이었다.

첫 번째 모임인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한 신입 회원들은 강영원(전<대우 인터내셔널> 사장, 당시 정치학과), 나병식(작고, 전 <도서출판 풀빛> 대표, 당시 국사학과), 손호철(<서강대> 교수, 당시 정치학과), 진홍순(전<KBS> 본부장, 당시 중문학과), 박재묵(전<충남대> 교수, 당시 사회학과), 강철구(전 <이화여대> 교수, 당시 서양사학과), 김문수(전<경기도> 지사, 당시 경영학과), 조기대(전 <대우전자> 전무, 당시 경제학과), 박원표(전<LG> 고문, 당시 법학과), 필자(법학과) 등이었다.

서클소개와 신·구 회원 각자 소개로 이루어진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회장 심재권이 옆 강의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는 취미, 종교, 포부 등 나의 신상(身上)에게 관한 이것저것을 묻더니, 교양과정학부 회장 후보로 내가 추천됐는데, 기독교인인 것이 조금 걸린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후사연> 교양과정학부 회장을 맡으려면 종교를 버리라는 뜻으로 들린 심 선배의 말에, 순간 ‘이것은 아니지’라는 생각이 들어, ‘면접실’을 박차고 나왔다. 사실 나는 모태신앙(母胎信仰)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던 참이었지만 그랬다.

나와 보니 강철구와 진홍순이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주일 후의 두 번째 모임에서, 뜻밖에 심 선배는 내가교양과정학부 회장에 선정되었음을 발표하였다. 그 후, 우리는 매주일 한 번씩 모여 “새로운 세상에 관한 배움”의 시간을 가졌다. 다른 2학년 선배들은 번갈아 가며, 회장 심재권과 함께 멀리 태릉까지 와서 우리를 지도하였다.

첫 번째 교재는 “들어라, 양키들아!”(C. 라이트 밀즈)이었다. 나는 우선 반미감정이 담겨 있는 “양키들아”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꼈다.

고1의 겨울방학 때 나는 [은하회]라고 하는 영어회화 서클 친구들과 함께 연탄을 배달하며 모은 돈을 “우리의 혈맹 미국의 요청으로 월남전에 파병된 국군”의 위문금으로 전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은하회]의 지도교사가 ‘평화봉사단(Peace Corps)'으로 우리 학교에 파송된 미스 허쉬라는 미국인 여성이었다.

이런 나의 수준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된 폭력혁명이라고 알려져 왔던 쿠바혁명을 찬양하는 이 책으로 공부하는 것이 불온한 일이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미나를 통해, 카스트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미국이 지원하고 있었던 부패한 독재자 바티스타가 우리의 군사 독재자 박정희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남미의 폭력혁명가로 알려져 있었던 체 게바라의 위대함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반미적인 불온서적”의 저자(著者) C. 라이트 밀즈가 미국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 세미나를 끝내고 나니, 우리나라의 노동자·농민·빈민들도 바티스타 정권의 압제와 착취에 허덕이던 쿠바의 노동자·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군사독재자 박정희 정권 하에서 고난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중간고사가 끝난 이 해 6월, <후사연>의 ‘청계천 빈민 실태 조사’에 참가하였다. 우리는 이 조사를 통해,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농토를 팔고 이농(離農)했다가 ‘도시빈민’으로 전락한 이 농민들이 바로 군사정권의 경제개발정책의 희생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방학 때 전남 나주(羅州)에서의 ‘농촌봉사활동’에도 참가하였다. 거기서 우리는 짧은 기간이지만, 공업 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으로 방기(放棄)된 농민들과 함께 하며 그들의 고난을 피부로 느껴 보았다. 덤으로 우리는 이 현장실습 과정에서 선배들로부터 “바람가”, “삼돌이” 등 운동가요들을 배워 함께 부르며, 울분(鬱憤)을 발산(發散)하기도 했다.

참조로 “바람가”의 가사는,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양키 대사관(쪽바리 대사관, 청와대, 중앙정보부)에 불이 붙었다. 잘 탄다. 잘 탄다. 양키들(쪽바리들, 비서, 짭새)은 시계줄(게다짝, 골프채, 눈깔들)만 돌린다."

그리고 “삼돌이(일명 ”시골처녀“)”의 가사는,
"삼돌이~ 서울 가 돈 벌어서, 날 데려 간다더니, 시골 색시 앞세우고, 보란 듯이 돌아 왔네. 삼돌이~ 삼돌이는 거짓말쟁이, 야~ 남자들은 모두 거짓말쟁이야요."
였다.

신 동수 선배가 그 작은 눈을 사르르 감고 부르던 이 “삼돌이”는 어느 때부터인가부터 나의 18번이 되었다. 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이 노래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1984년 <사선> 송년회 때의 일이었다. 그 대는 DJ와 YS도 참석하였다(보은기 III-2 참조). 송년회가 끝난 후의 몇몇 인사들과의 쫑파티 때의 일이었다. 음료가 몇 배 돌아가 모두 기분이 얼큰해지자 어떤 인사가 “김 총무가 제일 수고 했으니 한잔 쭉 들이키고 노래한 곡 뽑아 보시여!”

물론 나는 사양치 않고 “삼돌이”를 구성지게 불렀다. 그런데 노래가 끝나고 보니 왠지 자리에 갑자기 찬 물을 끼얹은 뜻 쌩 하더니, 한 인사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는 그야말로 쫑 나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당시 “삼돌이”는 YS를 뜻했고,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인사는 YS쪽으로 기운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선배에게 변명을 못하고 있다.

2학기의 세미나 텍스트는 유인호 교수의 [후진국 경제론]이었다. 우리는 이 세미나를 통해서 후진국의 공업품 수출위주의 경제개발 정책이 미국 중심의 세계경제에 종속화 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농업·공업·임업·어업 등 전 산업을 아우르는 균형있는 “민족경제” 수립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후사연>의 사회과학 세미나를 통해 넓혀진 우리의 지식과 시각을 일반 학생들과 공유하기 위해 “민족경제 육성에 의한 경제개발의 필요성”이라는 공개강좌를 열었다. 이 강좌는 <후사연>의 모임을 불온시 하고 있던 학교당국의 방해로 개최되지는 못했다.

겨울 방학을 통해 우리는 노동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하방훈련(下方訓練)’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나는 이 훈련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1학기 중간 쯤 되는 어느 날, 문과 A반(법대와 상대) 담임교수인 K 모교수가 나를 호출하였다. 나는 불온서클 <후사연>문제 때문이라는 예단(豫斷)하고 미리 겁먹은 얼굴로 K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K 교수는 나의 개인 신상표를 들어다 보면서, 생활이 어려운데 왜 장학금 신청을 안 했느냐고 물었다. 내가 입학성적이 별로 좋지 않아서 라고 했더니, 법대를 합격할 정도면 하면서, 납부금 면제대상으로 올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1학년 2학기부터 그 후 나머지 3년 반 동안 기성회비와 생활비만 마련하면 되게 된 것이었다. 물론 매학기 B학점 이상의 성적을 올려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시켜야 했지만 말이다.

"당신들이 계셔서 나는 행복했습니다."

<필자 소개> 김경남 목사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목사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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