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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13>『논어12권』顔淵編1
이은선(세종대교수) | 승인 2015.07.07 15:31

<명구>
『논어12권』
「顔淵編1」: 顔淵問仁 子曰 克己復禮爲仁.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焉.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안연편1:  안연문인 자왈 극기복례위인. 일일극기복례 천하귀인언. 위인유기 이유인호재)

<해석>
안연이 인에 대해서 물어보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 하루라도 자기를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모두 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세상이) 인해지는 것이 나로 말미암은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서 비롯되겠느냐?”

<성찰>
 『논어12권』의 안연편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논어의 주옥같은 말씀들이 많이 나오는 장이다. 이 한 편만 가지고도 공자의 사고 전체와 유교 영성의 진수를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번 선진편의 마지막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공자께서 당시 이루었던 것과 같은 긴한 인간관계를 우리도 삶의 동반자들과 이루면서 살 수 있는가를. 스승과 제자 사이, 위정자와 민의 관계, 부모와 자식 사이, 친구 사이, 동료들과의 관계 등. 그런 질문의 핵심에 있던 제자 안회의 자(字)가 안연이고, 이 장은 그가 공자께 ‘인’(仁)에 대해서 묻는 물음으로 시작되면서 공자의 유명한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답을 듣는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는 달리 인간다운 생명체라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는가? 다른 생명체가 모두 자아(我)를 확장하고 늘리는 일에만 관심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에조차 ‘no’라고 할 수 있는 자기부정을 할 수 있는 내적 힘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한다. 공자는 그것을 仁, 인간다움이라고 하였고, 사실 이 극기복례는 어느 공동체, 어느 인간관계에서나 그것 없이는 그 관계자체가 가능하지 않으므로 이 땅의 모든 종교는 나름의 방식으로 그것을 핵심 메지지로 삼는다. 예수 복음의 핵심 관건인 십자가의 도가 그것이고, 불교의 공(空)의 가르침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가 말씀하신 극기복례의 도는 참으로 인간적이며, 소박하고, 이 세상적(世間的)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천하가 천국으로 화하는 길이 바로 내가 하루 나를 이기는  일 안에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래서 너무 거창하게 먼 이론이나 실행을 구할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나의 하루의 일상에서 내 마음 씀과 언어와 행위와 생각이 인간적인 함께 함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권고하신다. 나는 이를 통해서 공자께서 천하를 도의 나라로 화하게 할 정도로 그렇게 나 하나와 하루와 매 일상의 작은 일의 긴박성과 의미성을 통찰하고 계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자의 그 예민한 감각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그의 표현에 따르면 “집 문을 나서서 사람을 대할 때는 마치 큰 손님을 대하듯이 하고, 사람들과 더불어 일할 때는 큰 제사를 받드는 것같이 하고,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행하지 말라”고 하셨다. 바로 이와 같은 언술들을 통해서 유교 종교성의 깊은 내재적 초월성을 잘 감지할 수 있다. 즉 유교에서의 참된 영성이란 우리의 매일의 인간관계와 이 세상에서의 하루의 삶, 우리 일터와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안에 바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 일상의 삶의 행태에서 공자께서 참으로 중시한 것이 우리 ‘언어생활’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 알 수 있다. 그는 한 제자가 仁에 대해서 묻자 “어진 사람은 그 말하는 바가 적고 하기 어려워한다”(仁者 其言也認.)라고 답하셨다. 우리의 삶이 관계의 삶이라는 것을 깊이 숙고하고 공경하는 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할 경우에는 아주 조심하면서, 또한 말을 한 경우에는 그 말을 꼭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공이 ‘정치(政)’에 대해서 묻자 그는 “식량과 군사와 신의”의 세 가지를 들면서 다른 두 가지를 버리더라도 “백성의 믿음(信)”을 얻지 못하면 결코 나라가 존립할 수 없기 때문에(民無信不立) 신의가 가장 중요하다고 밝히셨다. 말을 쉽게 하고, 한 말을 지키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서 위정자와 국민 사이의 신의가 훼손될 때 그 나라의 존립자체가 위협받는다는 지적이시다. 우리가 말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해야 하고, 특히 공적 인간으로서 우리의 언어는 꼭 그 실행을 염두에 두어야 함을 말한다.

공자는 이렇게 날마다 세상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언어와 실천에 집중하며 어질게 살아가는 사람의 또 다른 특징으로서 “근심(憂)과 두려움(懼)”이 없는 것을 들었다. 그는 말하기를 “우리가 안으로 반성하여 허물이 없는데, 무엇을 근심하고 무엇을 두려워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서 오늘 우리 시대의 가장 특징적인 정조는 ‘근심과 두려움’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 공자가 여기서 이러한 가르침을 주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근심과 두려움의 출처는 우리의 고립주의, 자아집중, 말을 함부로 하는 것, 내적으로 자신이 신뢰의 사람인가를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드러난 이름과 명성만을 쫓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진정한 “통달(達)과 소문(聞)”을 대비하면서 “명성이 난다는 것은 얼굴빛은 仁하지만 그 행동은 그것에 위배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 것”(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이러한 명성과는 달리 참으로 달(達)했다는 것은 “그 마음속이 곧고, 의로움을 좋아하며, 남의 말과 기색을 잘 살피고 헤아려서 자신을 남보다 낮추며 나라 일을 하게 되어도 이루고 집에 있어도 이루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유교 영성이 이야기하는 인간됨의 어짐(仁)은 사람의 감정으로도 나타나고, 행동으로도 표출되며, 명석하고 통달한 판단력으로도 나타난다. 그래서 공자는 자장이 “명석한 것”(明)에 대해서 묻자 대답하시기를, “물이 은연중에 스며드는 것과 같은 거짓 참소와 애틋하지만 진실하지 않은 하소연을 그대로 받아들여 행하지 않는 것”이 명철한 것이고, 멀리 내다보는 통찰력이라고 하였다. 仁하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거짓과 참, 참된 사정과 교묘하게 꾸미는 거짓 탄원을 구별할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것을 말한다.

공자는 바로 이러한 사람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정치를 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렇게 되면 나라 안에는 송사를 잘 처리하는 것을 넘어서 송사 자체가 없어지고(必也使無訟乎), 사람들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것이며, 하루 아침의 노여움으로 자기를 잊고서 그 화(禍)를 부모형제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될 것이라고 했다. 오늘 우리 삶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는데, 지금 한국 사회의 모습은 송사가 넘쳐나고, 운전과 같은 사소한 일을 하다가도 하루 아침의 분노로 살인도 멈추지 않고, 어떤 일을 하던지 간에 크던 작던 기회만 되면 도둑질을 하려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공자는 그래서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政者正也)이라고 했다. 참이 왜곡되어 있고, 거짓이 난무하고, 기준이 무너져 있으며, 한 공동체의 좋은 것이 불의하게 편중되고 몰려있는 것을 바로 잡고, 바르게 펼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을 삼가고 이익을 나눌 때 널리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공평무사(公平無私)한 기준을 마련하고, 그 기초를 세우는 일을 말한다. 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신의 할 일과 역할과 지분을 고루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공자는 그 상황을 다시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부모는 부모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君君 臣臣 父父 子子)는 유명한 말로 대답하였다.

안연편에서의 인간됨(仁)과 정치(政)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와 더불어 공자는 오늘날 우리들의 우정과 사람 사귐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 편 마지막에 잘 밝혀주었다. 즉 우리의 벗 사귐과 교유는 “학문으로써 벗을 사귀고, 벗을 사귀는 일을 통해서 우리 인간됨의 향상을 돕는”(以文會友 以友輔仁) 일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양적 인맥관리를 하지 마라”, 물질적 이득에 따라서 벗을 사귀거나 나쁜 친구의 악영향에 계속 노출시키지 말고, 우정과 더불어 우리의 인격을 고양시킬 수 있는 사귐, 그와 더불어 우리 삶과 사회와 정치의 나아짐을 위해서 같이 논하고 염려하면서 그 일을 위해서 함께 도모할 수 있는 만남, 그런 “인간다움을 확충해주는”(輔仁) 사귐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하는 우정과 만남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우정이 많이 그립다. 만나서 겉도는 말이나 자기자랑이나 빈수레와 같은 요란한 말만 나누는 모임이 아니라 서로 배우고, 같이 논하며, 그래서 자신의 부족함을 바로 보게 되고, 더욱 선하게 되고자 깨달아 고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들게 하는 만남, 이런 인간적인 만남 앞에서 안연을 말하기를, “제가 비록 불민하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回雖不敏 請事斯語矣)라고 토로했다.

이은선(세종대교수)  leeus@sejo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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