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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하나님이 인간에게 묻다책 『남겨진 자들의 신학』 서평
김충연(감리교신학대학교) | 승인 2015.07.09 16:17

   
▲ 『남겨진 자들의 신학』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설명이 존재하지만 지금까지 필자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은 다음의 정의이다. “신학은 믿음에 대하여 학문적으로 설명(Explizierung)하는 것이다.” 이 정의는 필자의 지도교수였던 A. 린데만 교수가 그의 강의시간에 했던 말이다. 린데만 교수의 말처럼 신학은 우리의 믿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기독교인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건들과 그것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그리고 가능한 누구나 다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신학이요, 또한 신학의 과제이다. 그리고 신학자란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는 자들이다.

2015년 4월. 세월호 참사 1주년을 기억하며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려는 이 땅의 신학자들 24명이 이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적 ‘사건’에 대하여 신학적인 ‘설명’과 ‘해석’을 부여하려고 시도하였다. 책 제목은 『남겨진 자들의 신학』이며 부제는 ‘세월호의 기억과 분노 그리고 그 이후’이다.

이 책의 특징이자 장점은 24명의 신학자들이 각자의 전공 및 신학적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고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는 세월호라는 한 ‘사건’에 대하여 더 이상 하나의 ‘시각’으로만 볼 것을 강요받지 않고 다양한 신학적 접근과 해석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신학자들은 1박 2일로 함께 모여 세월호 참사가 한국 신학의 분기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데 공감하며 새로운 신학적 사유를 찾기 위해 몸부림쳤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기존의 어떠한 신학적 해석으로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는 비극의 사건을 경험 하였다. 세월호 침몰. 305명 사망. 이 사건 앞에서 사회뿐만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도 공통된 하나의 ‘의견’으로 마음을 모으지 못하고 사분오열 되었다. 사건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국민들처럼 한 마음으로 이 사건에 마음 쓰며 애태웠다. 하지만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의 편향된 보도 때문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은 4월의 광화문 밤공기처럼 점차 싸늘해져만 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일처럼 마음깊이 아파하며 지금도 고통당하고 있는 유가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 땅에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 대한 무관심과 냉소를 아니 그것도 모자라 유가족에 대하여 ‘이제 그만하라’고 면전에서 비난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이들이 이러한 막말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되는 것은 교회에 ‘삶의 현장에서 부딪힌 사건’에 대한 바른 신학적 ‘설명’이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들은 각자의 ‘해석’의 기준을 갖고 마음대로 이 ‘비극’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다.

'세월호 그날 이후' 이 책은 이 땅 한 가운데에서 벌어진 있어서도, 있을 수도 없는 이 비통한 사건에 대하여 우리 시대의 신학자들이 설명하고 해석하고 유가족의 고통에 동참하며 세월호와 함께 가라앉은 이 땅의 ‘진실’과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몸부림들이다.

하나님의 정의나 섭리가 아닌 인간의 죄로 보자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기독교 안에서 가장 많이 하는 했던 질문은 ‘하나님은 그 순간에 어디 계셨는가?’하는 신정론(Theodizee)적 질문이었다. 즉, 그 순수한 영혼들이 죽어갈 때,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 고통 중에 아비규환 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하는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계셨다’(E. Wiesel)이다. 내가 이렇게 사뭇 ‘가볍게’ 이 질문에 답하는 이유는 이 대답의 무게나 주제 자체가 결코 가벼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전통적인 대답은 슬픔을 당한 자들이나 그것을 옆에서 경험한 자에게 더 이상 큰 ‘위로’가 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함께 하시기만 하시고 실제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러한 하나님은 선하시기는 하지만 전능하지는 않은 분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G.W.F. 라이브니즈).

또 반대로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든 사고에 개입하셔서 막아 주신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에게 부여하신 ‘자유의지’에 개입하여 조종하시는 전능하시기는 하지만 정의롭지는 않은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 ‘하나님이 선한 자들의 고통에서 무엇을 하였는가?’에 대한 답변으로서 지금까지의 신정론적인 대답으로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전통적인 답변을 뛰어 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해야 하는가?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는 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가? 나는 이렇게 ‘함께 하시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힘을 본질적으로 제한하는’ 지금까지의 신정론적인 접근보다는 인간의 ‘죄론’(Hamartiology)을 그 대안적 접근으로 제안하고 싶다. 즉 ‘세월호’사건을 비롯한 (일부 자연재해를 제외하고)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은 하나님의 정의나 섭리의 문제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문제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세월호, 305명의 아벨에게 행한 잔혹한 ‘죄’

나는 여기서 ‘죄’의 기원이나 ‘하나님께서 죄를 만드셨는가’하는 질문에 답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님은 인간을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당신이 만든 모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기를’ 원하셨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역행이며 “우리와는 다른 존재에 대한 우리의 본질적 관계성을 부인하는 행위”(다니엘.L. 밀리오리)이다. 성서에는 이런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들의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하나님은 왜 적극적으로 그들을 만류하지 않았을까?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일 때 그는 어디에 계셨는가? 왜 하나님은 그의 행동에 개입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신실한 분이라면, 왜 그의 백성 이스라엘은 이방 백성의 노예생활에 내맡겨지는가?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인의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셨는가? 오늘날에도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 쉽게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를 마치고 가는 우리 교회 여 집사님은 왜 교통사고를 당하셔야 하는가? 하나님은 이 사고를 막아주셔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 외에도 찾아보려면 우리는 주변에서 신정론적 접근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사건들을 접하게 된다.

이렇듯 불의한 인간이 그러한 고난을 겪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욥으로 대변할 수 있는 ‘의로운 자’의 고난에 대하여 우리는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다. 더욱이 피워보지도 못한 꽃과 같은 우리 아이들이 그렇게 ‘희생’당하는 세월호의 상황 속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물론 전통적으로는 ‘하나님의 고난에는 뜻이 있다’라든가, ‘하나님의 행동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측량할 수 없다’라고 대답할 수 있고, 이러한 대답이 깊은 기독교적 진리를 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정작 그 역사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무엇을 행해야 하는 지에 대하여는 침묵하고 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잠잠히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그것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행할 전부인가? 또한 이것이 교통사고나 질병 같은 개인의 문제이고 한 번에 그칠 사건이라면 참고 인내할 수 도 있겠지만, 그것이 아니라 사회와 나라에 걸쳐서 계속 반복되어지는 사안이라면 우리는 침묵만 하고 그분의 신실하심만을 믿고 기다려야하는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내가 인간의 죄의 시각으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려는 이유는 신정론은 이 사건의 책임과 응답을 ‘신’으로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 사건 속에서 얼마나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까? 개연성은 충분하겠지만 그것에 접근하는 우리의 능력에는 너무나 한계가 있다. 그러나 죄론 즉 이것이 인간의 죄의 문제라면 그것의 책임과 응답은 많은 부분 인간에게 있기에(실제로 그렇다) 이것의 원인과 심판 그리고 재발방지를 모색할 수 있게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로, 우리 인간에게로,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게로, 생명을 구하지 않은 정부에게로, 진실을 은폐하는 모든 시도들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인 가인이 그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야기는 인간이 살인을 저지를 때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으시는 무능력한(?) 하나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 전에 가인에게 나타나셔서 이 사건에 대한 암시와 경고를 하셨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그의 살인 범죄를 행하고 만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행위에 대하여 물으시고 이어서 심판을 내리신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4:10).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4:11b-12).

세월호 사건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인간의 생명쯤은 우습게 여기는 기업과 그러한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떠넘기고 여러 가지 진실들을 은폐하려는 정부라는 가인이 아무것도 모르는 귀중한 305명의 힘없는 아벨에게 행한 잔혹한 ‘죄’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해야 하며, 분노해야 하며, 그러한 행동을 미워해야 하는 것이다.

   
▲ 책『남겨진 자들의 신학』 북 콘서트 및 봉헌 기도회. ⓒ에큐메니안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노의 소리

지난 4월 16일. 나는 광화문에서 세월호 1주년을 위해 모인 시민들의 함성과 눈물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것은 분노의 하나님이었다. 큰소리로 “너희가 무엇을 하였느냐?” 가인에게 그의 행위를 엄중하게 꾸짖으셨던 하나님의 분노의 소리였다. 그는 분명 군중들과 함께하며 군중들과 함께 슬퍼하며, 군중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날 모인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은 하나님 자신이 인간에게 준 더 높은 차원의 존재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준 ‘독립능력’이 하나님 자신에게 ‘배신의 화살’로 날아와 박혀 버린, 그래서 더욱 분노하는 새끼 잃은 ‘호랑이의 포효’와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왜 정작 하나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들과 함께 분노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이 세월호 사건 속에 있는 인간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분노하시는 그리고 이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읽어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박일준 박사가 말하는 바처럼 “이 사건을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 속에 깊이 숨겨져 있는 인간의 죄를 찾아내어야 하며, 울부짖는 희생자들의 핏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책임추궁에 대하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라고 대답하는 후안무치의 인간의 파렴치한 모습도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정의를 읽어내야 한다.

이럴 때에 하나님의 정의가 세워지며 세월호 속에 숨겨진 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먼저 유가족의 마음이 풀려야 한다. 이것은 가해자가 용서를 구하면 된다. 그러면 된다. 희생자들이 자신들의 억울함과 분통함을 모두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하여 정부가 책임 있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유가족들의 요구를 겸허히 받아들이면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참된 용서와 화해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리고 유가족들과 정부가 서로 힘을 합하여서 이러한 비극의 역사가 다시는 이 땅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방법을 찾고 이것을 위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세월호 사건에서 인간의 죄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 사건은 계속해서 발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 죄를 통한 철저한 자기반성과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처절한 반성과 후회. 그리고 이것에 대한 책임과 처벌. 그리고 용서와 화해. 이것이 진정한 정의로의 과정이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정의의 토대위에서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모색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세월호 속에 숨겨져 있는 인간의 죄를 마주하지 못하고 있으며 교회는 유가족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진실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진실을 밝혀내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서 우린 이 아이들 앞에 영원히 죄인이다.

그나마 이들의 영정을 바로 쳐다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것이리라. 이 땅에 다시는 이와 같은 ‘희생양’들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유가족들의 바람처럼 진실을 규명해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야 할 토대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광화문에서 촛불 예배를 드리며 마지막 인사말로 이정배 교수는 “신학은 말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렇다. 신학은 말, 하나님의 말로 하는 것이다. 예수 또한 말씀하지 않으셨던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마 4:4). 이 하나님의 말씀이 유가족에게 참된 위로가 되고 고난을 견디게 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로 행동하게 한다. 호크 하이머는 이렇게 말한다. “신학은 불의가 마지막일 수 없다는 희망이요, 살인자가 무고한 희생자에 대하여 승리할 수 없음에 대한 동경의 표현이다.”

신학자는 말해야 한다. 이것은 인간의 죄라고. 우리의 죄라고. 교회와 목회자들은 말해야 한다. 정부는 죄를 회개하고 유가족에게 용서를 빌라고. 그리고 진실을 밝히라고. 그리고 동시에 이 땅의 정의와 사랑을 세우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다면, 우리가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비극의 사건은 사회와 국가에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발생하게 될 것이다.

김은규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썩었고, 무법천지가 되었다...이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형 사슬에 관련된 자들에 대해 사법부는 솜방망이 처벌로, 정치권은 진실규명보다는 적절한 타협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준엄한 심판이 어느 때보다 기다려지는가보다... 한국사회와 교회는 입으로만 떠벌이는 회개가 아니라, 준엄한 저주와 심판을 받아야 할 때이다. 진실을 세우는 정의롭고 깨끗한 사회를, 그리고 낮은 자들과 함께하는 교회로 새롭게 탄생해야 할 것이다”

가인에 의하여 아벨의 희생을 경험하신 하나님은 그 이후 인간의 역사 속에서 똑같은 무고한 희생을 경험하고 계신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러한 희생은 계속되었다. 이런 하나님의 희생은 언제 누구에 의하여 멈출 것인가? 이제 교회가 앞장서야 할 일이다. 아우슈비츠 사건이후 독일교회가 변했듯이 이제 세월호 사건이후 교회가 변해야 한다. 더 이상 세상에 귀를 닫고 ‘중립’의 안전지대에 머무는 자들이 아니라, 사회와 정의를 위해 우는 자와 가난한 자의 편에서 울음과 탄식의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분노로 그들의 ‘죄’를 외쳐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일어서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더 이상 무고한 희생이 없어지도록, 힘없는 자들이 억울하여 피눈물 흘리는 일이 없어지도록 이제 교회가 그들을 위해 일어나야 한다.

김충연(감리교신학대학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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