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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준하! 그 1945년 8월 10일 오후(1)<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7.10 20:27

8월 7일, 부대의 마지막 격려를 위해 김구 주석과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이 다녀가는가 했더니 중경으로 귀임(歸任)을 멈추고 O.S.S 이범석 대장의 막사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날을 맞았다. 이날이 정확하게 8월 8일이었다. 이날 아침 O.S.S는 예기치 않았던 방문객(?)을 맞았다 연합군 중국전구사령부(사령관 중국의 장개석, 참모장 웨드 마이어, 차장 도나반) O.S.S 실무책임자 「싸젠트」 소령이 참모차장 도나반 장군을 경호하고, O.S.S 대원들을 방문한 것이다. 마지막 길을 떠나는 대원들을 격려하기 위해 연합군 지휘부가 출동한 것이다.

철기 장군의 막사에서 도나반 장군의 일행과 김구, 이청천의 무제한 회담이 계속되었다. 비밀회담이었다. 오전에 시작된 회담은 오후3시에도 끝날 줄을 몰랐다. O.S.S 출동에 대해서였다. 장준하는 “죽을 것을 이미 결심한 때”였다. 우리는 이날 장준하의 감회를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초조한 우리에겐 집합 명령이 없고, 이상하게 다나반 소장은 김구 주석, 이청천 사령관, 이범석 장군과 장시간의 회담을 계속하였다. 우리들의 공작에 대해서 상세한 검토가 진행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신변을 정리하고 이대장의 명령으로 사물을 정리하려 하였으나, 나는 이미 벌려놓은 일로 더욱 두 손이 허탈하였다. 정세가 의외로 급전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고, 우리에게 만반의 준비태세를 취하고, 몇 시간 후에라도 출동할 수 있게 하라는 특별명령이 내려졌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조금도 허락되지 않는 시간의 연장 속에 초조한 긴장이 계속되었다. 필요한 통신장비와 무기와 식량, 휴대품을 갖추어 놓고, 일본 국민복과 일본 문구와 활자로 찍어낸 일본군 신분증이 수여되었고, 비용으로는 금괴(金塊)가 준비되어졌다. 심지어 일본제 군화까지 나뉘어졌다. 최후의 연습과정으로 숨 막힐 듯한 시간의 연옥을 따라갔다.”

그리고 8, 9일 오늘 아니면 내일까지는 특명이 하달될 것이다. 착 가라앉은 마음! 9일 하루, 장준하는 제본이 끝난 「제단」 제2호를 아직 발송하지 못한 채, 그렇게 지냈다. 오직 O.S.S의 특명을 수행하는 일 외에는 지상의 모든 일은 완전히 끝났다. 「제단」 제2호의 독자 발송은 O.S.S 제 2기 훈련 반장에게 부탁했다. 땅 위에서 장준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마지막 일이다.

참 알 수 없는 게 「단잠」이었다. 죽음이 목전에 놓였는데, 조금 후면 그 죽음을 맞아야 하는데, 그런데 온 종일 정말 깊은 단잠을 이루었으니... 아침 일찍 일어나 병영을 한바퀴 뛰어 돌기를 마쳤다. 죽을 길로의 출발 준비를 끝낸 것이다.

1945년 8월 10일 오후

   
▲ 1948년 8월 18일 3년전 여의도에 착륙했다가 중국으로 되돌아간 날을 기념하며 - 김준엽, 노능서, 장준하(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1945년 8월 10일 오후(시간미상, 필자주). O.S.S 본부에 연합군전구사령부(聯合軍戰區司令部)로부터 한 통의 전통이 하달되었다. 대원들은 거침없이, 일사불란, 출발 준비를 마치고, <병사 떠나> 영(令)에 귀를 기우렸다.

그날 2시의 O.S.S 대원들을 내려누르는 흑암의 무게는 어떤 문사, 필사(文士, 筆士)의 손으로도 그 표현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밖으로부터 엄청난 환성이 들리는가 했더니, 기상(起床) 시나 비상이 아니고는 울리지 않는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제단」 2호를 챙기고 있던 장준하는 웬일인가 하며, 밖으로 나갔다. 연병장에 그야말로 야단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일본놈 항복, 독립만세의 함성이 창공을 뒤흔든다.

“뭐야? 어떻게 된거야?” 소리치는 장준하 옆구리를 툭치는 손이 있었다. “뭐하나, 신철 동지?” 김신일 대위였다. 김 대위는 현장의 내용을 설명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는 요청을 중립국을 통해 연합국에 통고해 왔다는 것. 그리고 지금 중국 전구로부터 그 전통이 내려온 것이라 했다.

“…….” 장준하는 할 말을 일었다. 잠시가 아니었다. 참 묘한 표정이 일더니 걱정스러우리만큼 그 표정이 한참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신철 동지, 정신 차리라고. 왜 이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김신일 대위가 장준하의 두 어깨를 잡아 흔드는데도 흔드는 대로 흔들릴 뿐 반응이 없었다. 김신일 대위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겹쳐 장준하를 왈칵 껴안았다.

“신철 동지…….” 그렇게 장준하는 김신일 대위의 품에 안겨 5분여, 김신일 대위의 품에서 자신의 윗몸을 추슬러 조용히 그 섰던 자리에 주저앉았다.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김신일 대위를 올려보며 말했다. 그것은 분명히 더듬거리는 말투였다. “신일 동지, 이제 나 괜찮아. 걱정 말고 돌아가라고. 장군께서 기다리실 것 아냐?” 김신일 대위는 돌아갔고, 장준하는 여전히 함성 속에 뒤엉켜 돌아가는 대원들을 뒤로하고 막사로 되돌아 왔다.

장준하가 언급한 대로 장준하에게도 “일본 제국주의가 손을 든다는 사실은 생각하기조차 벅찬 기다림의 끝이었다.” 그런대도 장준하의 한켠 가슴은 억울함과 분함에서, 허탈과 분노 사이에 어쩔 줄을 몰랐다. 장준하는 그날,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울부짖는다.

“기쁨에 뒤이어 실망이, 절망에 뒤따라 기쁨이 서로 뒤바뀌며 벅찬 가슴을 드나들었다. 조국이 광복을 이루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이다. 그러나 이미 각오된 결심으로 조국 광복의 기수가 되겠다는 기회의 상실은 안타깝도록 가슴 아픈 억울함이기도 했다.”(돌베개 160쪽, 思想社 1971.)

8월 10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접한 중국 중앙군과 주중 연합군전구사령부는 한국 서울로의 진입을 즉결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장을 물었다. 아무리 임정의 요원들이 당쟁과 파벌주의에 매어 있다 해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유일의 꿈으로 품어온 사람들이었는지라 쌍수를 모아 합의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연합군전구사령부의 요청에 의해 한국정진군총사령관(韓國精進軍總司令官)으로 이범석을 임명했다.

국내정진(國內精進)!

그것은 촌음도 지체할 수 없는 역사적 대명이었다. 그것은 작게는 우리 한국의 광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더 나아가 장준하에게는 군국주의(軍國主義)를 이 땅에서 영원히 축출하여 평화세계의 초석을 놓는 세계사의 장거(壯擧)였다.

13일 오전11시, 한국정진군사령관 이범석은 연합전구사령부의 작전계획에 따라 동참, 동행할 제1차 요원으로 장준하, 김준엽(金信一), 노능서, 이해평(李海平), 노태준(盧泰俊) 5명을 차출했다. 이범석 장준 휘하의 이 요원들은 연합국 사절단 대표로 「뻘즈」 대령과 예하 병력 21명, 총 28명의 단원들과 연대, 1945년 8월 14일 새벽4시 정각, 이들 연합국 사절단이면서 정진군인 28명을 태운 연합군기가 서안(西安)을 출발했다.

죽음을 역사의 제물로 드리기로 하늘과 서원하고 모든 준비를 끝냈는데, 그런데 그 죽음을 도둑맞은 장준하! 잃을 뻔한 생명을 천우신조로 다시 찾았다 했는데, 그 생명을 또다시 이제는 영원히 도둑맞아버린 어떤 사내와 다를 리 없다고 자괴하는 장준하, 아직도 장준하는 이 엄청난 역사의 대전환기에서 마둘 곳을 몰라하고 있었다. 사절단기는 호남(湖南), 산서(山西), 산동(山東)을 지나 지금은 황해의 아침 바다 위를 나르고 있다. 열시 사십분, 서안을 떠나 정확히 5시간 40분을 지나고 있다.

한국진입중지, 회항하라!

   
▲ 1945년 8월 19일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 비행장에 불시착하여 중국군과 함께 -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가 장준하, 그 옆에 노능서, 김준엽(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그 때, 장준하에겐 또다시 간장(肝臟)을 들쑤시는 사건이 일고 있었다. “한국진입중지”령이라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유의 설명도 없이 다시 수송기를 회항시키는 것이었다. 회항의 이유는 다시 서안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사실로 믿고 즉시 출항, 동경만(東京灣)에 진입하던 미항공모함이 일본 특공대의 공격을 받아 일제의 항복이 유동적인데다가 서울 진입이 위태롭다는 연합군 사령부의 특명이 내려져서라 했다.

고국을 목전에 두고, 그 고국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회항해야 한다니, 못 견딜 만큼 치욕스런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광복군총사령부는 전작권이 없는 군대였으니……. 한국광복군사령부는 중국 중앙군 소속이었고, 중국군 총사령관은 장개석이었으나 실제로 총작전 실권은 부사령관인 미육군 중장인 웨드마이어(Wedmire)가 장악하고 있어, 연합군전구사령부의 작전 명령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서안으로 회항 3일이 지나 한국 재진입 명령이 다시 내려졌다. 장준하의 걱정은 이번 진입도 허사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데 있었다. 다시 재진입 명령이 내리자 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간다. 내 조국 땅, 이제는 밟는다. 내 조국 땅!”

당시 서울엔 두 개의 비행장이 있었다. 하나는 여의도 비행장으로 ‘군 전용’이었고, 다른 하나는 김포비행장으로 일반인과 군의 공용이었다. 한국의 상공에 이른 것은 4월 18일 오후, 철기 장군을 비롯한 진입 요원들이 탑승한 연합군기는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을 통보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신이 연합군편의 탑승자 전체를 다시 놀라게 했다. 착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항복한 조선 주둔군과의 사후 처리문제를 협의하고자 온 군사절단이다. 귀군이 우리의 입국과 착륙을 거부하는 것은 협정위반이다. 착륙을 강행하겠다.” 일군의 대응도 다르지 않았다. 사절단의 제3, 제4 반복되는 역설(力說)에도 저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들어온 이유는 이해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본영(大本營)으로부터 아무 지시를 받은 바 없다. 지금 우리 병사들이 흥분해 있다. 착륙 후 사태를 보장할 수 없다.” 사절단 역시 돌아갈 수 없었다.

“우리는 돌아갈 수 없다. 어떤 사태가 벌어진다해도 좋다. 우리는 착륙한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일측의 경비사령과 시부자와(澁擇) 대좌의 대안이 제시되었다. “좋다. 그렇다면 착륙은 허락하겠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착륙을 한다 해도 우리의 허락 없이 자유활동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 드디어 사절단의 수송기가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다. 철기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씻었고, 장준하는 당에 엎디어 맨 땅에 입을 맞추었다.

아, 내 조국 땅! 죽었다 살아온 듯, 살았다 죽어온 듯, 장준하는 다시 멍한 상태에 빠졌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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