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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희일비(14:10-14)<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23>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7.13 13:57

1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두 개의 큰물을 건너야만 하였다: 홍해와 요단강. 이 둘을 중심으로 그들의 생활은 셋으로 분류된다. 홍해를 건너기 전 그들은 이집트 노예였다.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 있을 때, 그들은 나그네(유랑민)였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넌 다음에 그들은 정착민이었다.(송병현, 232)

5-8절에는 당당한 이스라엘 자손과 바짝 긴장한 파라오 및 이집트인이 뚜렷하게 대조되었다. 이 분위기는 10-14절에서 완전히 역전되었다. 파라오와 그 군대가 다가오자, 이스라엘 자손은 두렵다 못해 공황(패닉)상태에 빠졌다. 그들이 하는 말은 더 이상 여호와의 표적을 체험한 정상적인 신앙인의 그것이 아니었다. 질겁한 그들은 i)하나님께 부르짖었다.(10절) ii)그리고 모세를 원망하였다.(11절) 그 원망 속에는 출애굽 자체에 대한 회의(거부)가 포함되어 있다.(12절) 모세와 하나님 또는 출애굽에 대한 백성의 이러한 태도는 광야 생활 중에도 몇 차례 되풀이 되었다.

   
▲ 히타이트족을 물리치는 파라오 라므세스 II와 그 군대
이집트 군대가 자신들의 뒤까지 추격해 온 것을 이스라엘 백성이 보았다.(10절) 이 장면에 얼마나 놀랐는지, 10절 뒷부분은 ‘자 보라’(브힌네 w®hinn¢h)란 말로 시작하였다. 그들이 본 것은 그들 뒤에 가까이 접근한 이집트 군대였다. 뒤따라오다는 말(나사 n¹sa±)은 본디 행진하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적대적으로, 공격적으로 다가왔다는 뜻으로 쓰였다

이를 본 그들은 두 가지로 반응하였다. 이를 나타내려고 와우접속법(w-consecutive)이 연이어 나왔다: 두려워하였다.(j¹r°ê) 부르짖었다.(ș¹±aq)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부르짖음에 응답하는 분이다. 출애굽도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촉발되었다.(출 2:23-24) 이런 뜻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행동이 여기까지 만이었더라면 참 좋을 뻔하였다. 

그들은 단순히 부르짖는데서 한 걸음 더 멀리 나갔다. 모세를 매우 신랄하게 공격한 것이다. 그것은 물음의 형식을 빌려 세 가지로 표현되었다(11-12절): i)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우리를 광야에서 죽게 하려느냐? ii)우리를 이집트에서 나오게 한 결과가 이것이냐? iii)우리가 이집트에 있을 때 당신에게 ‘우리를 내버려 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이 부분 ‘하로 제 핫다바르 아쉐르 띱빠르누 엘레카 미츠라임 ...’(=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였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닙니까? ... )와 그 뒤에 이어지는 내용의 말은 출애굽 이전에 백성이 한 말들 가운데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말하였는지, 아니면 이전에 자신들이 생각하였던 것을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에서 실제 말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그들은 ‘광야에서 죽게 한다’는 말을 두 번 되풀이 썼다. 이는 그들이 지금 죽음의 공포를 느낀다는 뜻이다. 물론 그들은 파라오의 손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안심하였다가, 이제 그와 그의 군대를 보고는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절망감에서 이리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파라오와 그 군대만 보고,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 하지 않는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물음을 던지는 동안 그들은 여기에 이를 때까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위해 하신 일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들 눈에 보이는 일과 자신들의 생각만 주워섬길 뿐이었다.

특히 세 번째 물음은 열한 가지 표적까지 일으키며 그들을 위해 활동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었다. 주어지는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일희일비하는 인생은 흔들리는 갈대보다 더한 것이 아닐까? 물론 너무나 놀라고 무서워서 그랬으리라 이해를 하지만, 매우 아쉽고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보다는 파라오의 계획을 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프레다임, 249) 파라오와 그 군대는 코앞에 있는데,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뜻 느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집트인(출 14:5)과 이스라엘 백성(출 14:11-12)이 모두 출애굽 해방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의미에서 후회를 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격렬한 반응에 비해 모세는 아주 담담하였다. 그들의 신랄한 비난에도 빈정이 상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대대로 노예로 살아온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심정에 공감한 탓일까? 그는 백성을 향해 비난이나 폄하의 말을 일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세 가지 내용을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13절) 그리고 (가만히) 서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14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자주 쓰이는 표현 중에 하나이다.(창 15:1; 26:24; 수 1:9; 8:1; 삿 16:23; 대상 28:20; 사 34:4; 시 23:4; 눅 12:32 등 아주 여러 곳) 이는 사람에게 엄습한 강렬한 두려워하는 감정이 그 사람의 느낌(생각)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이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나는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시 42:11; 43:5)

서라는 말(야챠브 j¹șab)은 항상 히트파엘형(재귀용법)으로 쓰인다. 이것은 중기 히브리어에서 확고히 서다, 유대-아람어에서 확신, 아람어에서 꾸준히 지속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말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서 있는 것(출 2:4; 19:17)과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다는 뜻(삼하 17:17)과 (전쟁에) 용감히 나서다 (신 7:14), 누군가를 대적(직면)하여 서다(신 7:24; 9:2; 수 1:5; 욥 41:2;), 앞에 나아가다 = (하나님 또는 특정인) 앞에 스스로를 내보이다 (출 8:16; 9:13; 수 24:1; 삼상 10:19; 욥 1:6; 2:1; 슥 6:5) 등의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이 말은 개역개정의 번역처럼 (가만히 서서) 수동적-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두렵고 떨리는 상황 앞에서 자기 스스로를 굳건히 세우라는 매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를 촉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두렵고 떨리는 상황에서 마음을 추스르며 하나님의 개입을 기다리고 서(멈추어) 있는 것은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매우 적극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근거는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있다.(13절에 세 번 되풀이 나온 보라는 말이 31-32절에도 두 번 되풀이 쓰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불신앙에서 나오는 원망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여호와의 구원을 실행하실 것이다. 이에 모세는 ‘두려워 말라, (가만히, 굳건히) 서라, 그리고 보라’라는 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서야할 곳에 서고, 보아야할 것을 보게 하기 위해 명령어를 연거푸 사용하였다.

모세는 보다가 보지 않고(파라오와 그 군대), 보지 않다가 바라보는(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손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 가르쳐 주었다.(J. Durham, Exodus[WBC], 337) 이것을 풀어 쓰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너희나 나나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위기를 벗어날 방도는 너희에게도 나에게도 없다. 그러기에 너희는 파라오와 이집트 군대를 바라보며 절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주목하여 바라보겠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확신을 이렇게 말하였다: (왜냐하면)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들을 다시는 영원히 결코 또다시 보지 못하리라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4절에서 그는 이런 신앙을 명사문장으로 확실하게 고백하였다. “여호와는 이런 분, 곧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는 분이다. 너희는 이런 자가 되라, 곧 가만히 있는 자로 있어라.”(직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는 이 고백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자주 인용되었다.(신 3:22; 수 23:3) 파라오와 그 군대를 보며 간담이 서늘해진 백성, 오로지 모세를 원망하는 것 밖에 다른 것을 할 줄 모르는 백성에게 모세는 신앙을 고백하였다. 이 신앙에 바탕하여 그는 백성에게 잠잠히 있으라 권하였다. 여기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카라쉬 µ¹raš)은 말을 하지 않다, 조용히 하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라는 뜻이다. 이는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아무거나 되는 대로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침묵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라는 뜻이다.

10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시 46:10-11)

출 14:10-14의 핵심은 이렇다. 곧 모세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가장 확실한 것을 보는 사람이요, 백성에게도 그리하기를 촉구하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 대신 싸우시리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 모세의 확고한 신앙이었다.(출 14:25; 15:3)

오늘의 적용

1) 사람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

사람의 마음을 변하기 쉽다. 이스라엘 민족은 손을 높이 들고 기쁘게(기고만장하여?) 출애굽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파라오를 어떻게 다루시는지 이미 11차례나 경험하였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였던가? 언제까지 일희일비(一喜一悲) 하며 인생을 살 것인가?

이집트 군대가 뒤에 나타나자마자 그들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마치 자신들과 파라오(이집트) 사이에 여호와가 계신 것을 까마득히 잊은 듯.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25-31)

2) 한계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까?

이스라엘 백성은 앞에는 홍해바다, 뒤에는 이집트 군대의 추격에 직면하였다. 이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모세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출 14:10-14) 기세등등하게 출애굽 한(8절) 이스라엘 백성은 마치 파라오가 이렇게까지 나올 줄 상상도 못하였던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 행동하였다. 이미 11가지 표적을 경험하면서 그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알고도 남았을 텐데도. 그가 지휘하는 정예부대를 보는 순간 그들은 간장이 녹는 것 같았다.(10절) 심지어 출애굽의 은총마저 부정하였다.(11-12절) 이는 파라오의 존재만 인정하고, 여호와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대하 20:12)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큰 폭풍을 바라보며 두려워 부르짖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7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막 4:37-40)

3) 보지 말 것, 있는 그대로 볼 것, 그리고 반드시 보아야만 할 것

견물생심이라 하였다. 보는 것이 그 사람의 마음을 좌우한다는 뜻이다. 절박한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보는 자인가? 절박한 상황?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난관? 문제를 다루시는 선한 목자 하나님? 반드시 보아야만 될 것을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보지 않아도 될 것 또는 그 실체 그대로 보아야할 것에 눈길이 쏠렸다.

모세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가장 확실한 것을 보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는 파라오나 그 군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보였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 (시 46:1-3)

작은 것에 가려져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산 정약용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地不同 =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네. 거리의 멀고 가까움이 다르니). 이에 영감을 얻은 시인 이성부는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 살아갈수록 내가 작아져서 / 내 눈도 작은 것으로만 꽉 차기 때문이다 ... 오르고 또 올라서 정수리에 서는데 / 아니다 저어기 저 더 높은 산 하나 버티고 있다 / 이렇게 오르는 길 몇번이나 속았는지 / 작은 산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가두고 / 그때마다 나는 옥죄어 눈 바로 뜨지 못한다”(<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 중에서) 라고 노래하였다.

4) 멀리계신(?) 하나님

사람은 인생살이 중에 하나님의 계획보다 적대자의 계획이 더 잘 보일 때가 종종 있다. 적대자는 바로 눈앞에 있는데 비해, 하나님은 멀리 계신 듯이 보이는 것이다. 사람의 이런 심리 때문에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바로 이럴 때 하나님 말씀이 필요하고, 신앙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럴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의지하지 않으면, 사람은 문제를 해결한답시고 오히려 헛다리를 짚거나 악수(惡手)를 두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멀리 계신 듯하고 이집트 군대가 코앞에 들이닥쳤을 때, 백성은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파라오의 계획에 마음을 빼앗겼다.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의지하지는 않는가?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사 45:15)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26-27)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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