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재는 ‘정체성의 구성’을 주제로 삼았다. 신발은 통상 그 사람의 신분을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다. 즉 그 사람이 가죽신을 신었는지, 짚신을 신었는지는 곧 오늘 날로 번역하면, 그 사람이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지, 타고 다닌다면 어떤 종류의 차를 타고 다니는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심리학적으로 동화 속에 등장하는 ‘신발’은 정체성과 연관이 있다. 신데렐라가 왕비가 되는 것은 그녀가 신발을 바꿔 신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화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들 중에 “빨간” 구두는 여성에게 금지된 신발이다. 따라서 빨간 구두가 등장하는 동화는 여성에게 금지된 욕망의 대상으로서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체성(identity)을 우리 스스로 함양하여 발전시킨 주체성의 구성물로 간주하겠지만,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정체성이 사실은 거의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여 구성된다는 점을 치밀하게 밝혀주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가면과 같은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확립하는 것은 나의 주체적인 판단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타인들의 사회적 시선들을 의식하면서, 그 응시하는 시선들과 끊임없이 협상하며 만들어낸 나만의 가면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자신의 내면에 공허함이 자리 잡고, 그 공허함이 주체를 도착적으로 이끌어갈 여지가 생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정체성이 절대적임을 주장하고, 그를 위협하는 모든 사회적 흐름에 대해 극단적 의사표현을 서슴지 않는 근본주의 운동은 한편으로 정체성의 진실을 가장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의 내면에는 텅 빈 공허만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정체성이란 타인들의 응시를 통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자신의 고유한 주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쳐다보며 끊임없이 요구하는 타자들의 시선이 있고, 그 시선들의 총체성을 주체는 대타자로 의식하는 것이다.

이 공허한 주체성이 외부적으로 까발려지는 것은 곧 주체의 실존을 위협하는 가장 큰 위험이다. 따라서 근본주의란 주체의 공허함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은폐하는 도착인 셈이다.

우리 시대 여러 가지 형태의 근본주의들이 자신들만의 진리를 주장하면서, 타자들을 악마화한다. 특별히 종교적 형태의 근본주의들이 타자의 악마화에 능하다. 그러면서 한 사회를 통합하고 정체성을 부여하던 종교가 이제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의견이 다른 이들을 악마화시키는 선봉이 되어 버렸다. 사회적 통합과 조화 그리고 화해와 평화의 주체가 이제 갈등과 분열을 부추기는 선봉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훨씬 더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소위 근본주의를 이끌어가는 리더들의 부패와 타락이다. 공금 유용이나 성 추행 또는 교회 (변칙) 세습 등이 도마에 오르는 대형교회 목사들의 메시지는 ‘근본주의적 성향’을 동경한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역설적으로 매우 세속적이다.

서구 사회에서 근본주의는 사회적으로 여러 기능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한국 개신교 내에서 ‘근본주의’라는 문화적 코드는 문자 그대로 정체성의 근본이나 종교적 정체성의 근본을 세우는 것과 무관하게 정치에 도착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듯하다. 이런 문제들을 이번 “빨간 구두와 근본주의” 연재에 작가들 각자의 시선을 담아 토론해 보고자 한다.

박일준(본지 신학위원장  iljoon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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