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데르센의 <빨간 구두>와 아이유의 <분홍신>

대학시절 즐겨 부르던 노래 중에 ‘이 세상이 창조되던 그 아침에 나는 아버지와 함께 춤을 추었다’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 가사도 마음에 들었지만 유난히 몸치였기에, 노래로나마 춤에 대한 한을 풀고자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난다.

▲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리고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자연스레 겹쳐지는 인물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카렌. 안데르센의 동화 <빨간 구두>의 주인공이다. 집안이 가난해서 평소 늘 맨발이거나 겨우 나막신 밖에 신을 수 없었던 카렌의 발등은 늘 새빨갛게 부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그녀가 빨간 구두를 신던 날, 그녀의 운명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공주의 신발처럼 빛나고 아름다웠던 빨간 에나멜 구두를 신고 카렌은 교회도 가고, 무도회도 갔다.

“넌 언제까지나 춤을 추어야 해. 네 피의 흐름이 멈춰 창백해지고 차가워질 때까지! 네 몸이 해골처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집집마다 다니면서 춤을 추어야 해. 잘난 체하는 아이들이 모두 알 때까지!”라는 천사의 저주를 들은 카렌은 자기 힘으로는 춤을 멈출 수 없었다. 마법에 걸린 듯 스스로 춤을 추기 시작한 ‘빨간 구두’는 카렌을 낯설고 먼 곳으로 이끌었다.

결국 사행집행인에게 부탁해 자신의 발목을 자르고서야 카렌은 춤을 멈출 수 있었고, 의족을 달고 참회하듯 목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차마 주일에도 교회에 갈 수 없어 집에서 기도하던 카렌에게 천사가 나타나 그녀를 용서해 주었을 때, 카렌은 심장이 터져 하늘로 올라갔다.

<빨간 구두>를 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 1805-1875)은 그의 가운데 이름(middle name)이 암시하듯 독실한 루터파 기독교인으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를 대표하는 덴마크의 동화작가이다. 가난한 구두장이의 아들이었던 그의 동화는 <인어공주>, <미운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등 유난히 우울하고 슬픈, 때로는 잔인한 결말을 가진 이야기들이 많은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안데르센이 평생 결혼하지 않았으며,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은 그리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안데르센이 활동하던 당시 유럽은 가톨릭의 부패, 사치, 향락을 비판하며 시작된 종교개혁의 전통에 따라 엄격한 금욕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술을 금지했던 여러 지역들 중 독일의 북프리지아 제도의 섬에서 유래한 ‘바리새인’(Pharisäer)이라는 커피는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갓 부임한 목사에 의해 술 금지령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뜨겁고 진한 커피에 독한 럼주를 섞고 그 위에 휘핑크림까지 얹어 마셨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목사가 “이 바리새인들아.”라고 외쳤다고 해서 ‘바리새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은 독일의 대표적인 알코올음료 중 하나로, 아이리시 커피와 유사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19세기는 시민계급에 의해 개인의 자유, 기본권에 대한 생각이 팽배해지고,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기독교의 종교적 세계관이 흔들리던 때였다. 그러나 동시에 가부장적인 권위주의와 기독교 보수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근본주의자들은 늘 그렇듯이 이러한 위협에 맞서고자 했다.

임희숙에 의하면, 세계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 맞서 “확신의 근거를 찾으려는 강박”(Sicherheitszwang) 속에서 종교적인 정체성을 추구하려는 시도가 바로 근본주의이며, 이렇게 만들어진 종교적 정체성은 “권위에 대한 맹종, 담론 능력의 결여, 자기가 믿는 진리의 절대화, 자기와 다른 의견에 대한 공격”과 같은 독특한 사고방식과 결합되기 마련이다(기독교 근본주의와 교육, 동연, 2010).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는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욕망, 특히 성적인 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를 가진 여성에 대한 당시의 편협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소녀, 욕망을 품다 – 빨간 구두

카렌의 세례식을 위해 노부인은 카렌에게 새신을 사주려고 했다. 그러나 ‘빨간 구두’에 마음을 빼앗긴 카렌은 눈이 어두운 노부인을 속이고, ‘검은’ 구두 대신 ‘빨간’ 구두를 샀다. 그리고 신어서는 안 되는 그 ‘빨간’ 구두를 신고 교회에 갔다. 루터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이것은 유아세례를 받은 12~15살 정도의 청소년들에게 행해지는 견신례였을 것이다. 기독교 세계에서 이것은 일종의 ‘성인식’이었으며, 한 명의 여성으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중요한’ 의식이었다. 그런 자리에 카렌은 금지된 ‘빨간 구두’를 신고 간 것이었다.

<빨간 구두>에서 ‘빨간색’이 이제 막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갖게 된 카렌과 그녀의 감추어진 성적인 욕망을 암시한다면, ‘구두’ 혹은 ‘신발’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많은 이야기 속에서 신발은 그 사람을 알아보게 만드는 표지이다. 대표적으로는 <신데렐라>와 <콩쥐팥쥐>가 있다. 두 동화에 등장하는 ‘유리 구두’와 ‘꽃신’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 하나의 표시로, 맞는 사람도 오직 하나, 그리고 신발의 주인도 언제나 정해져 있다.

또한 신발은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많이 사용되는 상징이기도 하다. 남녀 간의 심리에 관한 책을 쓴 알렌과 바바라 피즈 부부는 <왜 남자들은 거짓말을 하고 여자들은 끊임없이 신발을 살까(Warum Männer lügen und Frauen dauernd Schuhe kaufen)>라는 제목의 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여자들은 스스로 신발을 사기도 하지만, 남자 역시 여자에게 자주 신발을 선물한다. 이것은 비단 연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가족 간에도 그러하다. 오죽했으면, 어린 시절 자주 불렀던 동요 <오빠 생각>에서 서울 간 오빠는 여동생에게 비단 ‘구두’를 사다주기로 약속했을 것인가. 그리고 그림 형제의 동화 중 <노간주나무>에서는 죽은 남동생까지 나서서 누이에게 빨간 구두를 선물한다. (언제나 구두를 선물하는 이가 오빠, 남동생과 같은 가부장적 인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신발이 여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신발과 연관된 성서 속 인물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구약에서는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그러하다. 광야에서 양을 치다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른 모세는 불붙은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구미정은 이것을 모세가 낡은 정체성을 벗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바뀌는 것으로 보았다. 발에서 신발을 벗음으로써, 그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삶, 내가 누구인지 몰랐던 혼란을 접고, 민족의 지도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한글자로 신학하기, 대한기독교서회, 2007).

신약에서는 일명 ‘탕자의 비유’에서 신발과 정체성의 모티브를 찾을 수 있다. 물려받은 재산을 모두 탕진한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새 신을 신기는 것이었다(눅 15:22). 새 신발을 신음으로써 아들은 다시 아버지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

이처럼 신발은 그 사람의 욕망을 대변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러한 신발의 특성을 시인 용혜원은 이렇게 노래한다. “너의 신발을 / 한번 살펴보라 / 신발의 모양이 / 너의 삶의 모습이다.”

거세된 욕망 – 춤

성서에서 혹은 이스라엘 전통에서 춤은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부정적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성서에서 흥에 겨워 춤을 추었던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죽음의 늪 홍해를 건넌 후, 미리암과 온 이스라엘 여인들이 기쁨의 춤을 추었고(출 15:20-21), 다윗도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이 드러나는 것도 잊을 만큼 격정적인 춤을 추었다.(삼하 6:14-15)

<빨간 구두>의 주인공 카렌 역시 시종일관 춤을 춘다. 그러나 그녀의 춤은 강요된 것이었다. 교회 입구에서 만난 빨간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군인이 빨간 구두의 먼지를 털어주며, 주문을 걸었다. 교회를 나온 카렌에게 군인이 “춤추기에 딱 좋은 신발이군.”이라고 말하자, 카렌의 발은 춤을 추기 시작한다.

군인이란 누구인가? 한 마디로 국가주의, 권위주의, 근본주의의 상징이 아니던가. 카렌의 춤은 사회로부터, 교회로부터, 공동체로부터 강요된 춤이었다. ‘빨간 구두’가 상징하는 여성으로서의 욕망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카렌은 춤을 추기 시작했지만, 교회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카렌이 스스로 선택해서는 안 되는 춤이었고, 혼자 힘으로는 결코 멈출 수도 없었다. 결국 신발을 신은 발을 절단하고서야 강요된 춤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 카렌은 더 이상 자기만의 춤을 출 수도 없게 되었다.

그림 형제의 <재투성이>(우리말로는 <신데렐라>)에서는 재투성이의 두 언니가 왕자가 내민 구두에 자신들의 발을 맞추기 위해 자기 몸을 베어내는 섬뜩한 이야기가 나온다. 발가락이 너무 길었던 큰 언니는 발가락을 잘랐고, 발뒤꿈치가 너무 컸던 작은 언니는 뒤꿈치를 잘라 신발에 우격다짐으로 밀어 넣었다. 그렇지만, 너무 아파 몇 걸음 걷지 못해 그만 들통이 나버렸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발가락을 자르는 것은 클리토리스 할례를 의미한다. 그럼으로써 여성은 성적인 욕망을 거세당한 체 아이 낳는 기계로 전락하거나, 혹은 더 ‘고상한’ 것, 더 ‘종교적’인 것에 몰두하는 무성(無性)적 헌신을 강요당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발가락 혹은 발뒤꿈치 정도가 아니라, 두 발 전체를 잘린 카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으로서의 매력도, 자신의 정체성도 상실한 카렌에게 남은 것은 수도원 같은 목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이제까지의 자신의 욕망을 후회하고 참회하는 길 뿐이었고, 마침내 그녀에게 도래한 구원은 죽음이었다.

<빨간 구두>에서 금지되었던 카렌의 욕망을 2013년에 발표된 아이유의 <분홍신>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뮤직비디오 속 갈색머리 소녀는 열두 개로 조각난 골목길에서도 멈추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사라져버린 썸머 타임(Summer Time)을 찾아 뚜벅뚜벅 길을 나선다. 좋은 구두를 신으면 더 좋은 데로 간다고 믿으며, 멈춰지지 않도록, 너를 찾을 때까지 ‘다시, 다시’를 외치며 춤을 춘다.

이미 정해진 규칙과 규율들을 거스르는 춤을 추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멈추었던 춤을 추어야 할 때다. 혼자가 아닌 여럿이 떼로 춤(群舞)을 추다 보면,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다시 <춤의 왕>의 노랫말과 피를 흘리면서도 춤추기를 멈추지 않았고, 끊임없이 ‘다시, 다시’를 외쳤던 한 사람이 떠오른다.

‘높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면서 춤을 계속 추기란 힘이 들지만
끝내 땅 속에 깊이 묻힌 이후에도 난 아직 계속 춤춘다.
춤춰라 어디서든지 힘차게 멋있게 춤춰라.
나는 춤의 왕, 너 어디 있든지 춤 속에 너 인도하련다.’

<필자 소개>     ▲ 이은경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대학원에서 신학과 기독교교육학을 공부하였고, 독일 튀빙엔대학교에서 교육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감신대, 배화여대, 세종대 등에서 강의하면서 일산 예수마음교회에서 도시영성공동체를 꿈꾸며 살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종교교육을 좀 더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교육학과 신학, 종교학 등을 기웃거리다 체험적 성서학습과 영성에 매료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동화를 통한 종교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다.

이은경(감신대, 교육학)  jjiggu199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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