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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장준하! 그 1945년 8월 10일 오후(2)<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7.17 11:27

장준하, 그 여의도의 밤

조국 땅 여의도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엎디어 맨 땅에 입을 맞춘 장준하가 몸을 털고 일어섰다. 모두가 울고 있었다. 이름 하여 「한국광복군정진대」 (韓國光復軍精進隊) 사령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국의 하늘, 조국의 땅, 길 들, 산 들,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었다. 저 멀리 노량진 철교 쪽으로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떼 지어 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아아, 동포들이구나. 그런대도 시련은 가지 않았다.

자유인으로 자유조국의 흙 땅을 밟기에는 청산해야 할 역사의 짐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인가? 광복군정진대가 타고 온 것은 C-47 수송기였는데 이 C-47이 착륙한 곳은 약 50m 어간에 대형 격납고가 위치한 곳이었다. 이 격납고를 등지고 1개 중대는 훨신 넘는 무장한 일군들이 착검자세로 정렬, 일자진(一字陣)을 치고 있었다.

그 진두의 지휘자는 조선군사령관 「고오쯔끼(香月)」 중장이었다. 한국광복군정진대의 환국을 실제로 목격하고 있는 패전패망의 일본군의 중압감이 얼마나 격심한가를 웅변해주는 분위기였다. 고오쯔끼를 중심으로 참모장 「이하라」(井原) 소장, 「나남」(羅南) 사단장 등 조선 국내의 장군들이 총출동해 있었고, 소좌, 중좌, 대좌들을 비롯한 고급위관들이 대단을 이루고 있었다. 승전국 사절단을 맞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사절단 선두에선 「뻘즈」대령과 이 사령관에게 고오쯔끼는 아주 당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나니 시니 이라시따노?(무슨 일로 왔는가?)” 사절단은 미리 한국의 상공에 뿌리다 남은 삐라 몇 장을 고오쯔끼에게 내밀었다. 일어와 한국어를 병용한 것이었다. 이를 받아 자세히 읽어낸 고오쯔끼의 대답은 일언지하의 거부였다.

“이유는 알겠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대본영으로 부터의 당신들에 대한 지시를 받은 바 없다”며 완강히 사절단의 자유 입국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사절단이 그냥 돌아갈 수 있겠는가? 무조건 항복을 받은 연합군의 사절단이 말이다. 더군다나 죽음과 삶을 수도 없이 넘어온 한국광복군정진대가 거기 함께하고 있지 않는가? 정진군사령관 이범석은 좌우에선 특수대원들에게 “경거망동말라. 내가 쏘면 쏘라” 엄명을 내린다.

현장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촌전(寸前) 같았지만 일본군은 이미 일본의 대본영(총참모부)으로부터, “어떤 경우에도 총격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자유입성불가’라는 전제 하에 “문제를 해결하라”라는 지침을 받아놓고 있는 상태였다.

   
▲ 1945년 9월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 비행장 구내막사에서- 뒷줄 왼쪽에서부터 세 번째가 장준하(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사절단 대표단과의 입국여부를 놓고 격한 논쟁을 벌리던 「고오쯔끼」는 갑자기 여의도경비사령관 「시부자와」 대좌에게 현장을 일임한다며, 모든 문제의 해결을 시부자와에게 일임했다. 그것은 사실 이미 짜진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 해결의 일임은 「사절단의 자유입국절대불허」를 전제로 한 위임이었다!

군 병력이 순식간에 철수했고, 1개 소대병력의 일본헌병이 사절단을 안내했다. 시부자와 대좌와 여의도경비부사령관 「우에다」(上田)가 지휘했다. 이로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우에다 중좌가 사절단 전원을 일군장교집합소로 인도하여 무장을 풀게 한 것이었다. 사절단원들로서는 특히 정진대원들로서는 결코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으나 사절단을 대하는 자세가 결코 쇼맨쉽만은 아니라는 인식이 짙어지면서 마음을 열게 되었다.

이미 실내에는 맥주며 양담배, 캬라멜, 일제 치약칫솔들, 고급과자들이 패전국의 병영답지 않게 준비된 식탁위에 수북 수북히 쌓여있었다. “자, 이제 감정들을 풀고 맥주나 한 잔씩 합시다” 과자나 담배, 치약 칫솔들은 필요한대로 담아가라했다. 참 놀라운 일은 시부자와 대좌가 전혀 딴 사람의 모습으로 단원들에게 일일이 맥주 한 잔씩을 따라주는 것이었다.

“자, 이제 다른 건 다 잊읍시다. 다 잊고 술이나 듭시다.” 김준엽(김신일 대위)은 장준하(김신철 대위)를 넌지시 쳐다보았다. 아직 내 조국 백성들을 만나보지 못하고 있는 터이지만 일본군 대좌가 한국의 독립군들에게 그래도 죄송함을 표하며 술을 따른다? 조국이 목전에 왔다는 건 사실이라 믿어졌다.

“장대위” 이제는 김신철이 아니었다. 장준하였다. “장대위, 이제 장대위도 이 술 한잔 하는 것 어떻겠소. 이게 어디 술이요? 감로지” 장준하가 사양하지 않고, 김준엽이 주는 술을 거침없이 들이켰다. 장준하가 세상에와 처음 마셔보는 술, 1945년 8월 18일 밤이었다.

또 다시 서안(西安)으로

이튿날 8월 19일, 장준하와 연합군 사절단은 다시 조선을 떠나야 했다.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가 사절단에 대한 적의는 품지 않았다해도 사절단의 조선자유입국절대반대의 지침을 갖고 있는 한 방법이 없는데다가 중국 곤명의 연합군전구사령부로 부터도 회항령이 내려져서 였다. 조국에로의 길은 그렇게 힘겹고 험준한 길이었다. 8월 19일 오후 다섯 시, 다시 그 C-74 수송기에 탑승했다. 다시 서안으로 가야한다. 전구사령부의 명에 의해서.

이것이 국권(國權)없는 백성의 ‘꼴’이었다. 회항로 또한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 여의도를 떠나 세 시간 길 산동의 상공에서 가솔린의 부족으로 예기치 않았던 곳에 불시착, 산동성 유현(濰縣) 비행장이었다.

일본군들이 관장해온 지역이었다. 비행장 주변의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일본군 막사가 눈에 들어온다. 사절단원들은 수류탄을 쥐고 엎드려 주변을 예의주시했다. 주변은 여전히 조용하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중앙군 예문례 장군의 군대가 이곳의 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지구를 완전히 장악한 것이었으니... 그런데 그것이 불과 나흘 전이었다.

예문례 장군은 또 다른 호진갑(胡振甲) 장군과 더불어 이곳 위현에서 이범석 장군과 함께 산동성의 유현 일대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이때 위현성의 현장(縣長)이 예문례 장군이었고, 호진갑 장군은 경찰서장으로, 이범석은 그 지역에 주둔하게 된 74사단의 편대(編隊) 지도를 맡아 오랫동안 교분을 쌓았다. 그 후 이전에 이범석이 참모장으로 있던 한복거(韓復渠) 군벌이 중국군 제 55군으로 개편되어 계속 그 제 55군의 참모장으로 제직하면서 철저하게 인민보호(人民保護), 민폐근절의 지휘로 위헌성의 인민들로부터는 큰 은인(大人·恩人)으로 불리고 있었다. 당시 이범석의 중국명이 왕모백(王慕白), 왕장군이었다.

서안, 곤명 그리고 상해, 한국으로 가는 길

   
▲ 1945년 8월 19일 산동성(山東省) 유현(維懸) 비행장에 불시착하여 중국군과 함께- 왼쪽에서부터 네 번째가 장준하, 그 옆에 노능서, 김준엽(출처: 장준하기념사업회).
수류탄을 쥐고 생사를 다투던 상황에서 일군을 제압한 중국군 산동성 사령관의 대접을 넘치도록 받은 사절단은 불시착한 유현 비행장을 중심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3일 보냈다. “어쩌면 다시 환국도상에 오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그런데 역시 아니었다.

8월 24일 저녁, “서안으로 귀대하라” 곤명으로부터 명령이 하달되었다. 유현을 떠난 것이 8월 25일 아침, 정오 열두 시가 조금 지나 다시 그 서안에 내렸다. 귀국의 길은 더 어려워졌다. 그 사이 한국의 관할권이 중국전구로부터 맥아더의 휘하 곧 태평양전구(太平洋戰區)로 이관되었기 때문이었다. 귀국전략전면중지. 앞으로의 계획도 불가능해져버렸다. 이제는 우리가 주체적으로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문제는 그저 하나의 문제로 내처져 버렸으니...

철기 이범석은 이 난관에서 기이하다 하리만큼 뚝심을 발휘했다. 이때 미 제 7함대가 상해에 정박하고 있다. 미국을 움직이려면 곤명으로 가야한다. 곤명이야말로 상해로의 길이요, 상해에 진주해야 서울행 비행기의 사용을 추진할 수 있다.

“그렇다. 곤명으로 가자. 그리고 상해로...”

8월 29일 정오 서안 비행장을 떠난 이범석의 한국광복군정진단은 석양 무렵 운남성(雲南省)의 곤명(昆明)에 도착했다. 「웨드마이어」 장군을 통해 한국서울행 비행기를 교섭하기 위해서였다. 곤명은 중국의 역사적인 도시다. 중국과 베트남의 경계를 이루는 성이 운남성으로 그전에는 하나의 왕국이기도 했다. 그 최후의 왕이 중국인들에게는 역사적 인물로 인식되는 당계요(唐繼墝) 장군이다.

그는 일본육사출신이었다. 손문(孫文)과 제휴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이라는 현대편제로는 최초의 군관학교를 세웠다. 사실 곤명은 무엇보다도 이 강무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중공의 그 유명한 주덕(朱德)이 이곳 출신이요, 중국군의 현대화에 기여한 대부분의 무장들이 이곳 출신이다. 더욱이 철기 장군이 이곳출신이다.

그러나 정진대원들에겐 이곳 곤명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서안에서 곤명으로 이동해온 이후 나흘 간 이범석은 김준엽과 장준하를 대동 매일 두 세 시간씩 웨드마이어를 만났다. 그것은 사정이 아니라 일종의 시위였다.

“광복의 조국에 돌아가야겠다. 비행기를 주선해달라” 웨드마이어는 진심으로 이 결사단을 돕기로 맘먹고 제7함대와 접촉, 한국서울에 갈 수 있는 중형수송기 한 대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945년 9월 3일 밤 10시, 한국정진단원들은 웨드마이어가 내어주는 전용기를 타고 상해로 향했다. 상해에 착륙한 것은 다음 날 아침 10시였다. 이미 웨드마이어의 후원,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상해에 도착하면 곧 한국을 향하는 비행기를 탑승하게 될 것으로 믿고, 다시 조국땅의 기대가 가슴에 물결쳤다.

그런데 아니었다. 한국 땅의 꿈을 천만번 겹쳐준대도 조국의 땅 날아서 갈 수는 없는 것인가? 어제도 오늘도 비행기는 없다. 내일도 모레도 비행기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달이 흘러버렸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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