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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문의 희망'이 됐다<파독광부 교회를 졸업한 이야기 8>
최정규 | 승인 2015.07.21 16:47

광부모집 시험 통과

접수증을 갖고 들어서면 우선 이름이 맞는지 확인한 후, 몸무게를 달고, 손 매듭을 살펴본다. 그리고는 '진짜 광부인지, 아닌지'를 묻는 절차를 통과하면, 그 다음에는 60kg 모래 가마를 들어서 어깨에 올리는(가대기) 시험이었다.

헌데 나보다 덩치가 엄청 큰 사람들도 60kg 모래 가마를 어깨에 올리지 못해서 나가떨어지는 거 아닌가? 난 웃음이 났다. 시골에서는 90kg 쌀 가마도 가대기(인부들이 쌀 가마 등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해야 일꾼 대접 받는다. 이건 '고작' 60kg인데도 광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못 올린다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더구나 한국도 아니고 독일에 가서 하는 일이라는데 말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나는 나가서 우선 모래 가마에 가까이 가서 어깨를 내려 자리를 잡은 다음, 큰 호흡을 하고 나서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면서 그 가마니를 덥석 들어올렸다. 주변 사람들이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의아해 하는 것 같았다.

조그만 체구에 60kg 모래 가마니를 아주 가벼운 물건처럼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는 표정이 느껴졌다. 내가 시골 마을에서 몇 년을 농사지으면서 했던 가대기라 그냥 한 것인데, 내게는 일상적인 일이 그 사람들에게는 놀랄 일이었던 거 같다. 일명 서울 광부들은 그 공개시험 장에서 90% 나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다음은 신체검사였다. 광부로 일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검사했다. 또 광부 경력자를 모집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히 폐 상태를 자세히 봤다. 그래서 폐를 엑스레이로 검사하는 게 중요했다.

모든 검사와 시험이 끝나고 발표 날이 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방에 다 모였는데 분위기가 침울하다. 이미 신문이나 다른 정보통을 통해서 알아본 결과 김제역에서 출발한 우리 중에는 단 한 명도 합격자가 없다는 거였다.

유일한 합격 광부

   
▲ 독일에 도착해 첫 주말 루르 강가에서 뒷줄 왼쪽이 필자.
우선 방에서 브로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왔다. 브로커는 들어오자마자 나를 보고 손짓하며 "자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빨리 가봐. 동교동에 있는 해외개발공사로."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와 "택시, 택시."를 외쳤다.

그 곳에 가보니, 합격자 발표 명단 옆에 '최정규 재검사'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수검표를 보여줬다. 나는 곧바로 엑스레이실로 불려갔다. 의사가 "폐가 좋은데, 정말 광산 지하 근무 했습니까?" 하더니 이내 "합격, 가세요."라고 말한다.

그때까진 난 광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폐가 좋은 것은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왜? 폐를 재검사 받아야 하는 걸까? 궁금했다. 나중에 의사는 "폐는 안 좋았지만, '빽'이 있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 순서가 그리 됐다."고 나에게 이야기 해줬다.

이미 독일로 파견된 한인 광부들이 독일의 복지제도에 맛이 들려서, 너무 자주 병가를 내자 독일광산협회가 한국에서 파견 오는 광부들에 대한 신체검사 강화를 요청해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재검 후, 나는 김제역 출발팀에서 유일하게 합격한 사람이 됐다. 곧바로 언어 교육이 시작되었다.

시골 형님은 이미 올라와 있는 여동생에게 이야기해서 방 한 칸을 얻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시흥에 있는 대한전선이라는 공장 근처였던 것 같다.

가문의 희망이 되다

나는 이제 이미 우리 가문을 짊어진 사람이 됐다. 독일에 광부로 가서 우리 집안이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희망이 된 것이다. 헌데 그 언어 공부라는 것이 한글도 아니고, 독일어이다. 영어 알파벳 에이비씨도도 모르는 나에게 느닷없이 "아베체데"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충 시간 끌기만 해도 된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믿고, 수업을 듣는 척하고 있는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면서 묻는 것이다.

“광산에서 ‘안녕하세요’를 독일어로 해 보세요.” 침묵은 금이다. 나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는 그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앞으로 나가 서 있어야 했다. 벌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가난 때문에 학교에서 당한 치욕적인 일들을 서울에 와서 또 당 한 것이다.

다음 날, 수업이 끝난 후 쉬는 시간에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사실 저는 알파벳도 못 읽습니다. 헌데 저는 광부로 가야 합니다. 제가 공부할 방법을 가르쳐 주세요” 했더니, 독일 광산에서 쓰는 용어와 기구명이 적힌 자료를 주면서 "열심히 외우세요." 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난 그 자료를 외우기 쉽게 만들어 시간만 나면 천자문 외우듯 외웠다.

광부인사 - 그룩아우프
채탄착암기 - 압바우 함마
아침인사 - 굳텐 몰겐
몇 시입니까? - 비필우어

선생님이 준 자료에 한글로 덧붙여 써놓은 다음 시도 때도 없이 외웠다. 그리고 시험 날 다행스럽게도 합격을 했다.

1974년 5월 9일

시골에서 출국 날짜를 기다리며 일을 하고 있는데, 하루는 지서 순경이 왔다. 그 순경은 형과 함께 주막으로 갔는데, 내 출국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외삼촌이 6.25 때 북으로 간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그걸 형이 해결을 해줬다. 그리고 바로 출국 통지를 받았다. 해외개발공사에서는 우리가 민간 사절단이나 마찬가지라며, 거기에 필요한 소양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민간 사절단처럼 준비하라는 대로 열심히 준비를 했다. 이발하고 양복도 사고, 촌놈 때깔 좀 벗겨 광발 내듯 준비했다. 우리는 그렇게 해서 1974년 5월 9일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탔다. 일본 동경에 먼저 도착 해 동경에서 긴 시간 동안 호텔에서 쉬었다가, 알래스카를 거쳐서 독일 뒤셀도르프공항에 도착했다. 같은날 1974년 5월 9일이었다. 독일과 한국의 시차는 8시간이다.

나는 생김새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에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의 나라에 떨어졌다. 우선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도 보고 저기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중에서 금발 머리에 정말 예쁜 처녀들이 정말 많았다. 그때 내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한국에서도 도시 생활을 제대로 경험하지도, 구경하지도 못했던 내가 독일이라는 세상을 보는 것은 꿈꾸는 것과 같았다. 광산에서 보내준 버스를 타고 우리는 독일 뒤스부르크 함보른 광산에 도착했다. 모두 서른두 명이었다.

최정규  choi504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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