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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23일 오후4시<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7.24 13:55

백범, 조선에 돌아오다

9월 4일, 중국전구의 본부가 위치한 그 곳 곤명에서 여기 상해에 기착할 때는 2, 3일이면 당당하게 내 조국 땅에 입국하게 되리라는 기대로 부풀었던 이범석 장군을 비롯한 정진대원들은 그대로 상해 땅에 그 발들이 묶여버리게 되는 불상사(不祥事)를 어쩔 수 없이 당해내야 했다.

모든 결행이 태평양전구사령부의 작전과 사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터에 「웨드마이어」의 지원이 있다해도 그토록 소원하는 환국의 길의 절망스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온통 상해는 축제 분위기였다. 전승국이라는 실감이 거리마다 시장 터마다 공공시설마다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한국엔 결코 광복이 아니었다. 적어도 8월 10일 O.S.S 1기 훈련 수료생들이 한국상륙잠입작전을 하루도 아닌 수 시간 전 곤명연합군 중국전구본부로부터 일본의 무조건 항복 발표가 있은 이후, 오늘 10월 7일, 한국광복군사령관이 중경으로부터 상해에 도착, 상해 전역에 흩어져 있던 한국 출신 일본군으로 무국적이 되어버린 장병들과 한국광복군 제1,2,3 지대원들의 사열을 받는 이날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본 항복 이전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망국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의 사열을 받는 확인된 병력만도 6,000명을 넘는 대규모였지만 사실 그것은 무의미에 가까운 것이었다. 장준하는 울어야 했다. 울 수밖에 없었다. 총사령관의 연설이 결코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군사령관의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다. 다음 날, 들은 소식은 더군다나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1944년 7월 7일 강소성 서주에 주둔한 스까다 일군 부대를 탈출한 이후 이제까지 당해온 어떤 시련들, 위험들, 분함과 억울함으로도 비길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통째로 부정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장준하의 격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나라가 두 동강 날지도 모른다.”하는 위기감이었다. 확인된 소식은 이 같은 것들이었다.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이미 한반도에 대한 명확한 정책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인천상륙 전후로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1940년부터 극동지역에 대한 정책 연구를 시작, 1943년에 이르러 그 정책이 구체화 되는데, 그 정책 속에 「한반도의 처리」가 있었다. 북위 38선 이남의 조선은 태평양 지역 최고사령관에게, 38선 이북은 소련에게 항복하게 할 것이라는 처리 전략이었다. 한반도의 분단은 일본의 항복과 맞물려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오랜 기간 고도의 두뇌들에 의해 치밀하게 준비되어온 것이었다.

이간은 미 국방성의 극비의 사실을 임정이, 게다가 개인 장준하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얄타(Yalta) 회담도, 포츠담(Potsdam) 회담도 철저한 수식이었다. 한국은 분명히 말할진대 해방이 아니었다. 피점령 국가였다. 그것도 이전에는 하나의 주인을 섬기는 식민지국이 이제는 둘로 나누어져 두 주인을 섬겨야 하는 역사의 철퇴(?)를 맞은 것이다.

그런 중에도 장준하가 위로 받을 만한 또 다른 뉴스가 전해졌다. 한국 주둔 미군 사령관 하지(John R. Hodge)가 중국에 아직 체류 중인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위해 특별기를 보내온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각료’들이 아닌 ‘개인자격’으로라는 전제에서였다. 완전한 조국을 찾아 세울 때까지 투쟁은 계속 되어야 하는 것, 장준하는 일단 김구 주석을 비롯한 요인들을 경호해 입국을 서둘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며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11월 5일, 김구 주석이 웨드마이어가 제공하는 특별기편으로 상해의 강남(江南) 비행장에 내렸다. 귀국을 위해서였다.

김구, 재중 한인(在中韓人) 대중들 앞에 서다

   
▲ 환국을 위해 상해에 도착한 김구 주석과 임정 일행들.
홍구(虹口) 공원이었다. 홍구공원! 준비된 단상에 김구가 등단했다. 어떻게 이루어진 자리인데, 36년 한을 풀어야 하는 자리인데, 김구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동포 여러분, 고맙습니다.” 소리만 반복했다. 울면서 하는 말, “고맙습니다.”였다. 그리고 또 다른 한마디, “어서 들어가십시다. 고국에 돌아가 다시 만납시다.” 다른 말은 끝내 하지 못했다. 후에 김구는 “그때, 내 전신이 굳어가고 있었다.”고 술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의 자신을 환영하기 위해 이루어진 ‘한국인민대회’의 이 홍구공원이 어떤 곳이었나!

환영식을 준비하는 위원들로부터 이미 김구는 중경에서 그 보고를 받아 알고 있었다. “주석님께서 도착하시는 시간에 맞춰 홍구공원에서 주석님 상해 도착 환영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하는 장거리 전화를 받으면서부터 김구는 전신을 수없이 떨어야 했다.

“아, 어, 오. 거기, 홍구공원…….” 김구는 온 몸을 가다듬으며 그 때를 연상했다. 그때, 1932년 4월 29일, 도시락 폭탄을 만들어 윤봉길 의사에게 내어주며, “윤군, 천국에서 만나세.”

기념식 단상의 주중 일본군 총사령관 백천(白天) 대장을 비롯 야촌(野村) 중장, 중광(中光) 대사 등을 폭살하여 중국은 물론 온 세계를 경악케 했던 그 의(義)의 자리가 바로 그 홍구였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윤봉길이 뜨겁게 그려져 온다.

“동포 여러분, 감사합니다. 조국에서 만납시다.” 백범의 답사는 그렇게 끝났다.

상해에 모인 임정 요인 귀국(환국?)을 위해 수송기를 보내준 이는 다름 아닌 38선 이남 미국의 한국점령군 사령관(韓國占領軍 司令官) 하지 중장의 이름으로였다.

그랬다. 그는 한국점령군 사령관이었다. 일본의 항복은 조선의 독립이 아니었다. 지상의 절대 대국에 의해 점령당한 것이었다. 절통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임정의 자국 입국에 기막힌 치욕이 또 하나 있었다.

‘개인자격으로 입국한다’는 각서를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야 그 꿈에도 못 잊어 하던 귀국길의 수송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역시 미군용 수송기 C-47호기였다.

   
▲ 김구와 윤봉길(출처: 위키백과).
1945년 11월 23일 오후 1시 정각

드디어 임정요원들과 그리고 장준하를 비롯한 특수 경호원 제1진 15명이 상해의 강만(江灣) 비행장을 이륙, 정확히 세 시간 비행 후 김구 외 임정요원을 수행하는 장준하는 김포비행장에 착륙했다. 상해로부터 한국 서울까지 세 시간을 비행, 11월 23일 오후4시였다. 한국점령군 사령관이 제공한 C-47기를 타고 빼앗겼던 조국을 다시 찾아 돌아가는 이 하늘 길 세 시간, 기쁨보다는 치욕과 수모감이 장준하의 전신을 칭칭돌려 묶어 버렸다.

그 세 시간의 엄혹함이 얼마나 한 것이었는가는 김구 주석을 비롯한 어느 누구도 한마디 말이 없었음이 증거하고 있었다. 잃었던 조국을 찾기 위해 30년의 세월을 남의 땅에서 죽기로 살아온 노(老) 대지도자의 절대무언의 시간들을 무어라 말해야 할 것인가? 그 잃었던 조국을 찾아 환국하는 이 길에서 임에랴! 천국과 지옥에 두 발을 갈라 딛고 서 있는 이 처절함을 말이다. 도대체 역사란 산 것인가, 죽은 것인가?

임정요인들이 탑승한 비행기가 착륙한 곳은 여의도가 아닌 김포비행장이었다. 역경을 이기고 조국을 살아낸 노지도자의 환국을 아는 이는 미군정 관계자들뿐이었다. 비행장은 텅 빈 맨들판이안 다름이 없었다. 장준하는 가슴 속의 들끊는 분노를 눌러야 했다. 누를 수밖에 없었다. 장준하는 그때, 그 김포비행장에 착륙, 그 기체의 문이 열려 내릴 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한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 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건 미군 병사들 몇이었다.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깨어지고 동포의 반가운 모습은 허공에 모두 사라져 버렸다. 조국의 11월 바람은 퍽 쌀쌀하고, 하늘도 청명하지 않았다.……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구나. 우리가 갈망한 국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이었구나. 나는 소처럼 힘주어 땅바닥을 군화발로 비벼댔다. 나부끼는 우리 국기, 환상의 환영인파, 그 목 아프도록 불러줄 만세 소리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검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

임정요원이 김포에서 백범 처소로 사용될 경교장까지 한 시간여의 차로는 여느 때나 마찬가지의 빈 길이었다. 임정의 입국을 아는 이가 없고, 미군의 찦차가 전후에서 인도하는 길이었으니 노변의 환영인파가 있을 리 없었다. 백범을 비롯한 임정요원들이 경교장에 도착한지 꼭 한 시간 후, 「조선주둔미군사령관」 하지는 임정요원들의 귀국 사실을 라디오를 통해 발표한다. 그것은 모두 쉰 세 글자의 발표문이었다.

<오늘 오후, 김구 선생 일행 15명이 서울에 도착하였다. 오랫동안 망명했던 김구 선생은 개인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온 것이다.> 방송은 “개인자격으로”라는 말에 더욱 힘을 주고 있었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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