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정체성인가 욕망인가?

프랑스혁명(1789년)이 지나고 나서 채택된 프랑스의 국기에는 혁명의 이상이 담겨있다. 파랑과 하양과 빨강의 ‘삼색기’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대변한다. 대체로 유럽의 정당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기 위해 그 표현방식을 따랐다. 자유를 중시한 시장자본주의자들은 파란색을 채택했고, 박애를 중시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빨간색을 사용했다. 독일과 스웨덴, 핀란드 등의 사민당과 영국의 노동당은 빨간색으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한다.

1976년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통령선거 투표결과를 NBC가 선거맵으로 제공할 때, 카터(민주당)가 이긴 곳은 빨간색으로 포드(공화당)가 이긴 곳은 파란색으로 표시되었다 한다. 유럽 시스템을 반영한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공화당(Republican)은 빨간색(Red)으로 표시되고 민주당은 파란색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앞세우는 그 나라 사람들은 같은 이니셜(R)로 묶어 표현하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다. 아무튼 색으로 표시되던 정체성의 혼란이 아메리카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에서는 민정당부터 한나라당까지 20여 년 동안 보수의 색은 파랑이었다. 그러나 2012년에 기이한 반전이 일어난다. 2011년 보궐선거에서 참패한 한나라당은 다음해 2월 새누리당으로 개명하고, 당색을 빨강으로 바꿨다. 그토록 오랫동안 ‘빨갱이타령’을 부르며 진보주의자들에게 저주의 낙인을 찍어왔던 자들이 스스로 제 몸에 빨간색을 칠하게 되기까지는 분명 복잡한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 당의 홍보기획팀은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직감했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껏 불러온 빨갱이 타령이 실은 낡은 곡조에 실린 거짓 가사였다는 사실을 깨우쳐버린 유권자의 비율이 높아 졌고, 게다가 10년 전에 이미 붉은악마를 통해서 빨간 물결의 흥을 경험한 한국사회에서 그 색이 상징하는 것은 이전 시대와는 확연히 달라졌다는 사실을. 대통령선거 10개월을 앞두고 빨강을 선택한 그들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 한나라당은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바꾸면서 빨간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빨간색이 한국사회에서 가진 의미는 무엇이었던가? 반북주의라는 정치적 근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시달려온 이 땅에서 빨강은 죽음을 의미했다. ‘빨갱이’ 낙인은 사회적 타살이 용인되는 저주의 징표였다. 그런 의미에서, 빨강은 일종의 정체성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새누리당이 빨강을 채택했다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의 변화를 의미하는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빨강을 당색으로 채택한 새누리당은 진보적인 의제를 선점해서 대선 전략을 세웠다. 경제민주화법안, 4대 중증질환 전액보장, 반값등록금,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의제는 실상, 그 당의 정체성이 아닌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욕망이란 대체로 감춰진 것이요, 새누리당이 내세운 의제 뒤에 감춰진 욕망은 대선승리였다. 선거를 이김으로써 욕정을 배설한 새누리당은 국민과의 약속을 내팽개쳤다. 그 때에야 ‘빨강’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했는지가 분명해졌다. 그것은 그들의 정체성이라기보다는 욕망이요, 그보다는, 욕망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은 그들의 비밀 기호였다는 사실을.

욕망과 정체성, 그 뒤섞임 속에서 주목해야 할 차이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새누리당이 비열했다는 점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비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위선(지록위마)과 가증(후안무치)이 그들의 육체가 되어갔던 이유에 관한 것이다. 말하자면, 남들의 정체성을 훔쳐서 자신의 욕망의 도구로 삼고, 자신에게는 한 때의 로맨스 밖에 되지 않는 정도의 것을 타인에게는 죽음의 낙인으로 활용하는 저의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어느 누가 생명의 본능에 담긴 욕망의 존재성 자체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욕망은 거세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종교와 진보정치가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는 그 점을 오인하는 데서 비롯하지 않겠는가? 욕망이 거세될 수 있다고 진짜로 믿을 때, 실제로 번성하는 것은 온갖 종류의 근본주의이다.

이 글은 욕망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방향에 관한 것, 욕망과 정체성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욕망과 정체성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정체성은 욕망 위에서 다져진 무엇이요, 욕망은 정체성이 자아내는 무엇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둘의 관계가 비정상적인 궤적을 그리며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낼 때이다.

앞의 칼럼, “춤춰라 어디서든지”에서 이은경 박사는 재미있는 동화를 들려주었다.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가 그렇게 무시무시한 이야기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왜 그 원작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각색되어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전달되었는지 궁금해졌을 때, 그 이야기를 누구의 관점으로 읽느냐에 따라 ‘빨간 구두’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 속의 주인공 카렌은 교회의 세례식에서 신어서는 안 될 빨간 구두를 신고 강요된 춤을 추다가 결국 발목을 잘리고 나서야 멈춘다. ‘검정’ 구두 대신 ‘빨간’ 구두를 선택한 카렌은 무엇을 욕망하였고, 어떤 정체성을 갖기를 원했는가? 그녀에게 빨간 구두는 맨발의 부엌때기 신세를 면하려는 해방의 욕망을 상징했고,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스스로 선택한 새로운 정체성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 근본주의자들에게 그녀의 빨간 구두(정체성)는 발목을 잘라도 좋은 구실로 작용한다. 그들에게 빨간 구두는 자신들의 체제를 수호하는 데 필요한 구실이요, 때문에 그들 역시 빨간 구두를 욕망한다.

아, 가련한 카렌! 결국 발목이 잘린 채 목사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심장이 터지고 나서야 하늘로 올라가게 됐으니……. 빨간 구두를 선택한 그녀의 천진난만한 자유에 가해진 시련치고는 너무도 가혹하지 않은가? 반면, 세례식에서는 검정 구두가 요구되는지를 알면서도 카렌의 빨간 구두를 닦아주며 춤을 추도록 주문을 건 군인(체제 수호자의 상징)은 타인의 정체성을 자신의 욕망을 이룰 비밀병기로 활용하는 추악한 자들을 상징하지 않는가?

욕망과 정체성은 서로 뒤섞여 있다. 그러나 뒤섞임 속에서도 반드시 가려내야 할 차이가 있다. 그것은 욕망과 정체성의 연관방식에서 생겨나는 차이이다. 자기 정체성을 꾸밈없이 분출하는 욕망인가, 아니면 타자의 정체성을 전유(專有)하여 자기 욕망을 실현하려는 도착(倒錯)된 암호인가. 이 차이는 중요하다.

카렌에게 빨간 구두는 체제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정체성의 표시인 반면, 그녀의 발목을 자르려는 체제 수호자들에게 빨간 구두는 카렌의 춤을 거세시키려는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할 명분이 된다. 한국에서도 같은 ‘빨강’이지만 진보에게는 정체성의 낙인이 되고, 보수에게는 일그러진 욕망의 실현수단이 된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 그리고 또 왜 이런 차이에 주목해야 하는가? 바로 그곳에 근본주의가 서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과 반대되는 다양한 모든 의견을 자신의 적(enemy)으로 해석하는 근본주의는, 빨간 구두라는 욕망의 가면을 쓰고서, 빨간 구두를 신고 춤추는 자들의 발목을 잘라내면서, 자신의 세계를 더욱 데카당스로 물들여간다.

묵시의 시대를 배회하는 근본주의

오늘 우리의 시대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묵시(Apocalypse)의 기록에 가깝다. 사회적 유대감이 깨져가면서 개인적 삶의 자긍심 또한 유지되기 어렵게 되었고, 사법적 정의는 실종되어서, 약자들은 한없이 짓밟히고, 기득권자들의 탐욕은 특권적으로 보장받고 있다. 절망과 죽음이 도처에서 웅크리고 있는데, 이 세계를 인도하는 정신이라곤 근본주의 밖에 없는 듯하다. 근본주의적 정신이 종교만이 아니라, 경제와 정치 등의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가면을 쓰고 등장하여, 시대의 이상을 파괴하고, 그들끼리의 굳건한 동맹을 통해서 이 세계의 묵시록을 기록해가고 있다.

물론 묵시의 시대에 생존하는 것이 근본주의만은 아니다. 사회학자 리차드 에크슬리는 “묵시의 공포에 대처하는 세 방식(Three Responses to Fears of the Apocalypse)”이라는 글에서, 허무주의와 행동주의, 그리고 근본주의를 제시한다. 그것을 나름대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허무주의(nihilism)는 더 나은 도덕적 질서가 도래하리라는 믿음을 포기한 것으로서, 의미를 잃은 데카당스의 세계에 동화되어버린 정신이다. 행동주의(activism)는 믿음을 창조하는 희망의 방식으로서, 새 삶의 희망을 담을 사유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 이야기와 가치와 신념을 새롭게 창조해간다.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데카당스의 허무를 “도그마의 규칙(Dogma Rules)”으로 번역하고, “세상 끝날”에 관한 강박관념을 무기로 삼아서 생태적 상상력을 고갈시킨다.

허무주의가 묵시의 공포가 만들어낸 즉자태라면, 행동주의와 근본주의는 그것에 대처하는 두 가지 방식의 대자태라고 하겠다. 분명히 밝은 미래는 새로운 신념을 창안하는 행동주의에 의해서 열리는 것이겠지만, 이 글이 관심하는 것은, 데카당스로 물들어가는 묵시의 시대에 번성하고 있는 근본주의에 관한 것이다.

철학자 피터 싱어는 정치적 근본주의의 대명사가 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윤리를 분석한 적이 있다.(The President of Good and Evil: The Ethics of George W. Bush, 2004년) 그 책에서 싱어는 부시의 정책이 “마니교적 종교성”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묵시의 시대에 생겨난 사탄의 세력들을 파멸할 책임을 미국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선-악 이분법의 확신이다. 한국의 숭미사대주의자들 역시 비슷한 ‘부시질’을 종교와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하고 있는데, 세 곳 모두에서 참으로 해악적이다.

근본주의는 의도적으로 세계를 데카당스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같은 묵시의 시대에 탄생한 허무주의보다도 훨씬 더 파괴적이다. 허무주의는 그 욕망과 정체성 사이에 간격이 거의 없다. 욕망마저 시들어 최소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주의는 그 욕망과 정체성의 간격을 한껏 벌림으로써(다시 말해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타자의 빨간 구두를 자신의 정체성인 것처럼 가공함으로써), 가장 타락한 욕망을 가장 고상한 모습의 가면적 정체성에 담아서 실현시키는 마법을 벌인다.

▲ 개신교와 천주교의 신앙과직제협의회 창립을 반대하는 보수 개신교인들의 시위. ⓒ에큐메니안

종교가 되었든, 정치가 되었든, 경제가 되었든, 근본주의는 세 층위의 모습을 지닌다. 근본주의의 ‘현상적’ 층위에서 발견되는 특징은 배타성과 획일성이요, 그것을 뒷받침하는 ‘교리적’ 층위는 무오성(無誤性, inerrancy)의 신념이며, 그 신념을 탄생시키는 ‘심리적’ 층위는 두려움과 힘 숭배의 욕망이 서로 결합된 복합정서이다.

근본주의가 데카당스의 시대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정신문화 속에서 가장 큰 마력을 발휘한다. 왜냐하면, 배타성으로 들끓는 그것의 열기는 열정으로 해석되고, 그 분리주의적 태도는 거룩성으로 오인되며(히브리어 ‘카도쉬’는 ‘거룩/신성’과 ‘분리/구별’을 동시에 뜻한다), 무오성의 신념은 생에 지친 사람들에게 복잡한 노동을 요구하지 않는 ‘단순성’의 조건이 되어, 두려움을 떨쳐내고 욕망을 이루는 가장 빠른 길이 바로 근본주의의 가르침 안에 있다는 환상을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근본주의는 참된 미래를 결코 약속하지 못한다. 근본주의의 뜨거운 배타성이란 실상은 ‘죽어가는 정신이 병상 위에서 질러대는 열띤 신음소리’일 뿐이다(존 쉘비 스퐁).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오성의 신념은 ‘종교적 자폐’가 지어낸 환상이다. 어떻게 인간의 정신이 무오할 수 있겠는가? 무오성의 신념이란 ‘달’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혼동한 무지한 정신이 가공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신에게 부여되어야 할 특징을 신을 믿는 인간의 것으로 절취(竊取)한 강도의 장물이다. 달리 말하자면, 무오성이라는 관념은 유한(손가락)을 무한(달)으로 드높이려는 신학적 “마성화”(폴 틸리히)를 통해서 가공된 것이다. 이 마성적 작업이 허용되는 까닭은 관계의 실패를 관념의 확실성으로 보상받으려하기 때문이다.

근본주의는 빨간 구두를 욕망한다. 무오성이라는 빨간 구두를! 이 빨간 구두를 신고 데카당스의 시대를 배회하며, 두려움에 빠진 욕망이 자기 확신의 춤을 추도록 부추긴다. 그렇다면, 근본주의란 무오성이라는 빨간 구두를 신고 데카당스의 시대를 배회하는 불길한 욕망의 도그마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어떻게 그 불길한 욕망을 끄고, 새로운 희망을 가꿀 수 있을까? 이 물음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선다. 십년 전에 작고하신 D. Z. 필립스 교수는 충실한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로서 쿨한 제목의 책을 냈다. 이름 하여, [철학의 쿨한 자리, Philosophy's Cool Place]이다. 수업에서도 그분은, 근본주의적 배타성과 그 왜곡된 편리함에 의존하려는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철학은 쿨한 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또한 그것은 추상적 관념으로써 자신의 실제 상황을 뛰어넘어 “어떤 의미 있는 자리로 나아가려는 유혹”(temptation to go somewhere)과 싸우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Trying to Go Nowhere”이다. 관념을 매개로 하여 천국으로 도약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부터 출발하려는 각오가 철학과 종교의 참된 출발점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가 아무리 어둡더라도, 거기서부터 다시 창조적인 춤을 추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 일로 인해, 어쩌면 우리 역시 카렌처럼 발목이 잘리고, 권력자의 노비로 살다가, 가슴이 터지고 나서야 천국에 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떡하랴, 그것이 삶의 고통(pain)인 것을. 그 고통을 공포(fear)로 여기며 쫄지 않고, 춤추며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풀어주시기를!

▲ 필자 김희헌.     한신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목사가 되었다. 미국 클레어몬트 대학원에서 조직신학과 종교철학을 수학한 후, 유기체철학에 기초한 기독교 세계관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를 어어가고 있다. 한국민중신학회를 중심으로 학술활동을 하면서,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로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저서는 다음과 같다. [서남동의 철학, 2013], [민중신학과 범재신론, 2014] [한국신학의 선구자들, 공저]"

김희헌 목사  kimhiheon@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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