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수배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차츰 지쳐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삼청교육대 정화작전 인세로 받았던 돈도 삼청투쟁위원회 운영비와 집 생활비다 하고 쓰다 보니 그 돈도 전부 축이 나고, 그리고 일주일에 서울에 서너번씩 오르내리락 나들이를 하다 보니 돈 들어가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생산 활동이 없어서는 안되겠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나는 마음을 먹으면 그 생각을 즉시 옮기는 성격이다. 다행히 당국에서는 나를 잡으려고 적극적으로 설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직장생활도 가능 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의 결정을 하고 서울을 오르락거리면서 직장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그런데 한편으론 내같은 지명 수배자한테 누가 직장을 줄까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 맥이 쭉 빠진다. 그것도 시국사범이니 내 정보를 아는 날이면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문제이거니와 신고까지 당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황을 대비해서 신원조회를 하는 직장이라면 아무리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 갈 수가 없다는 생각까지 했다. 가능하면 신원조회를 하지 않는 직장에 들어가야 했다. 사회에서는 <유명작가>니 양심적 시국 사범이니 하며 나를 크게들 보고 있었지만 실제 회사 직원을 찾는다면 내 같은 사람을 원하지는 않을 터였다. 위험한 시국인물이며 깐깐한 딸깍발이를 누가 안심하고 써주겠는가 하여튼, 나는 최대한 나의 신분을 속이기로 했다. 

그런데 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오는데 한겨레신문을 보니까 5단통 광고로 신생 언론사에서 기자모집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정치부 기자였으며 데스크(차장급 이상)도 모집 중이었다. 신문은 주간 종합신문이었는데 당시 일요신문과 토요신문이 인기리에 팔리고 있을 때였다. 이 신문도 제호가 주간 요일을 붙인 ㅇ신문이었는데 종합시사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또 경력사원모집도 있었으므로 나는 경력직에 응시를 하기로 하였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신문사에 응시원서를 띄웠다. 경력직이라면 집필경력이 워낙 많아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넉넉한 마음으로 신문사에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서 내가 직장생활을 할 것 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떨어졌겠거니 하고 포기할 마음을 갖고 있을 때 1차 서류 심사 합격이라는 전보가 있었다. 그리고 면접 일자가 찍혀 있었다. 나는 천하를 얻은 듯 서울로 올라갔다. 마포경찰서 앞에 신문사가 있었다. 나는 그 직장에서 평생을 같이 할 아내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신문사는 아담한 3층 건물이었다. 총무과를 들어가니 면접대기실을 안내해준다. 거기엔 벌써 1차 서류심사에서 합격한 대기자들이 앉아 있다. 속으로 숫자를 세어보니 7명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 아가씨도 한 명 있다. 키가 훤칠하게 큰 시원하게 생긴 외모의 아가씨였다. 여자가 혼자였으므로 자연히 시선이 여자 쪽으로 많이 머물렀다. 다들 긴장한 탓인지 침묵을 지키고들 있었다. 나는 그 중에 나이 면으로 보나 사회 경력면으로 보나 내가 제일 선임자일 것이라는 짐작을 했으므로 이 침묵을 깨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일어서서 “자, 이거 초면인데 다들 인사나 합시다. 면접 대기 때부터 긴장하면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저가 먼저 인사드리겠습니다. 부산에서 올라온 이기석입니다.” 나는 사회에 알려진 필명이 아닌 서류상의 본명을 소개했다. 그러자 원광대를 졸업했다는 김영완 씨가 일어나 자기도 인사를 했다. 그리고 쭈욱 돌아가면서 남자들이 인사를 다 마치고나자 홍일점의 키 큰 아가씨가 일어서서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화여대 졸업반이며, 이대방송국 보도국장을 맡고 있다고 했다. 다음달 2월에 졸업이라며 간단한 자기소개를 하고 앉았다.

나는 학교 방송경력자는 좀 약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녀는 떨어질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외모상으로는 키가 훤칠하고 시원하게 생겼으므로 외형상으로는 여기자의 준수함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얼굴은 추녀도 미녀도 아닌 수수한 얼굴이었다. 우리는 잡담을 많이 나누다가 면접이 시작 될 무렵 한사람씩 면접실로 들어갔다. 모두들 면접을 마친 후 합격되면 만나자며 마치고 나오는 순서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좀 늦게 면접을 보았으며 간부직(차장)을 응시하였다. 모두들 학력과 경력 등이 쟁쟁했는데 3류 신학교 출신인 내가 합격될 보장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경력만으로는 저서도 몇 권 있었고 커다란 시국사건을 몇 건 터트린 특종 작가이므로 남에게 뒤지지 않는 장점도 있었다. 그러나 신분을 속이기 위하여 특종한 저서중 <삼청교육대정화작전>은 이력서에 기재를 하지 않았었다. 그래도 <말>지에 기고한 글과 여러 여성지와 기자협회보에 쓴 글들, 대학 학보에 연재한 글과 여러 일간지에 쓴 글들을 자료로 내세웠으므로 기명기사 경력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것이었다.

면접관들은 나의 <시국관>을 물었다. 나는 이들의 역사관이 수구적일 터 일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원하는 답변을 뱉어냈다. 기분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합격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한 면접관은 젊은 사람이 저서가 많다며 칭찬까지 해주었다. 속으로 ‘당신이 내 책을 읽어보면 기절초풍할거다. 당신들이 원하는 책이 아니므로 ….’했으나 시침을 <뚝> 떼고 “감사합니다”하고 면접실을 나왔다.

그런데 나오다보니 그 여대생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대생에게 면접을 잘 보았느냐고 상투적인 인사를 한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는 못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잘가시라”고 인사를 건넨 뒤 헤어졌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가？ 나와 그녀는 그곳에서 한사람이라도 불합격 되었다면 다시는 못 만날 인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면접을 본 오후에 나는 한통의 전보를 받았고 소집일 날 총무과에 들어갔으며 그녀도 합격되었음을 알았다. 7명 중 김영완 씨와 나, 이미애 씨 3명이 최종경력 합격자였다.

그리고 우리 세 사람은 나란히 정치부에 배속을 받았다. 이미애 씨는 말이 경력자였지 취재부문에서는 아직 풋내기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한 취재 활동만 했지 사회인을 상대로 한 취재는 별로 없었을 터였으므로 당연한 모습이었다. 덕분에 나는 견습 활동이라는 명분으로 이미애 씨와 함께 취재원을 찾아 몇 번 돌아다닐 기회가 있었다. 이미애 씨는 일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부지런했으며 시골 출신답게 근면 성실한 아가씨였다. 기사작성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기도 했으며 취재원 접근 방법도 가르쳐 달라며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이렇게 해서 아내와 만났다. 그러나 신문사에 근무 할 동안 아내와 결혼의 꿈은 상상도 않고 있었다. 나이 차이도 있었고 또 동성동본이며 결혼 조건이 맞지 않는 부분이 상당히 많았으므로 설사 결혼생각을 갖고 있었어도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 운명은 엉뚱한데서부터 아내와 가까워지기 시작하는 연결고리가 만들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8,90년대의 회사는 노동현장의 격변기였으므로 노사가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우리 회사도 입사 1년쯤에 임금문제와 인사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특히 신문사는 지식인들이 많이 모여 있는 특수집단이므로 인사파행이 사내의 적잖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때는 민주화의 역정에 서 있는 시기였으므로 지식인 기자들은 어용인사가 편집국에 수장으로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고 경영권과 편집권을 독립적 시각으로 분리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사측은 결코 편집권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회사에는 MBC의 유명여자 아나운서의 아버지가 기자들의 의지와는 생각 없이 편집국장으로 사령을 받아 왔고, 그는 기사 하나 하나에도 수구적 기사를 요구하며 기자들의 자존심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특히 시국적인 상황에 민감했던 나 같은 사람은 백모 국장과 편집회의 시간엔 기사문제로 판판히 부딪히기 시작했다. 젊은 기자들은 내 의견을 따랐고 사측은 백 국장 측을 지원했다.

나는 지명수배자의 신분임도 잊고 또 회사와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우리는 비상위원회를 임시로 만들고 내가 위원장을 맡았다. 회사 측은 이미 나의 신분을 파악 했을지도 몰랐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약점이 있기에 덮어놓을 수도 있었다. 지명수배자 신분을 잊기로 했다. 회사 측의 부당행위에 대한 저항은 피해나갈 수가 없는 이 시대의 한 길목이었다. 이 또한 나 같은 시대적 저항아를 이곳에 오게 한 이유는 또 다른 운명의 지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는 겁먹지 않기로 했다. 나는 수시로 경영진과 맞짱을 떴다. 먼저 입사한 선배기자들 중에는 회사 측 편을 드는 배신자도 있었지만 나는 회사를 그만 둘 각오를 하고 사원전체를 위하여 총대를 메고 있었다.

이때 이미애는 철저히 내편이 되어 주고 있었다. 아니 이미애는 자신의 판단에도 사측의 행위와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는가 싶었다. 그랬으므로 그도 사직을 각오하고 비상위원회의 일원이 되어 주고 있었을 것이었다.

1년여 동안 함께 근무하면서 우리는 동료직원이자 동지적 관계로 발전을 했고 함께 고민을 나누는 사이로 까지 발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삼청교육대 작가이며 지명수배자라는 것도 털어놓았다. 처음엔 그녀도 놀라는 눈치였지만 차츰 이해를 하는 눈치였고 이어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와의 결혼은 꿈도 꾸지 않고 있었다.

내가 부족함보다도 두 사람의 조건이 너무도 악조건이라는 것을 내 스스로가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면 알맞은 배필을 찾는 것이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손 한번 잡은 적 없는 깨끗한 관계였으므로 결혼부담까지 가질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 해 가을 나는 회사와의 협상 테이블에 대표로 나가 밀려 있던 직원의 임금을 다 받도록 해 주었다. 그리고 나는 회사 측에 부담을 안주는 조건으로 사직을 하기로 하였다.

나는 추석이 왔을 무렵 이미애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던가 싶다.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그리고 이미애도 잊고 신문사도 잊고 모든 걸 잊어버리고 새롭게 내 일에 매달리기로 했다. 신문사를 그만 두어도 할 일은 태산같이 많았다. 만약 수배만 풀린다면 일간신문에 들어가 꼭 논설위원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나는 내가 생각을 한번 먹은 것은 꼭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주간 신문사를 그만 둔지 실제 약 1년 후 지방 일간 신문사에 논설위원으로 취직이 되었고 또 CBS라디오 시사만평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해 가을 나는 이미애와 헤어져 부산으로 내려왔다. 내가 내려간다는 나의 말에도 워낙 자기표현이 별로 없는 이미애는 달다 쓰다는 대꾸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부산으로 내려 왔을 때 이미애도 뒷날 우리집으로 따라 내려왔다. 그것이 그녀와의 운명의 배를 같이 타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곧 이어 동거에 들어갔다.

<필자 소개> 이적 목사 약력 -1957년생 경남 통영 출생. -1986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민족문학에 <안개속으로><연작시 삼청교육대10> 등으로 신인추천. - <80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3년 구금, 88년 <미주중앙일보> 정화작전 연재 91년 <대한매일 창사기념/ 장편소설 적도> 당선, 80년대 군사독재 저항문인 단체였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후신인 <민족문학작가회의 창립회원> <민예총 창립회원> 1987년 삼청교육대사건을 최초로 폭로한<삼청교육대정화작전/전예원 87>발간. 이후 <장편소설 북방산계곡의비밀/90광야> 장편실록 <청송감호소 죽음의 그림자> 정치평론<대통령의 늦바람/남풍89>등이 있으며 시집 으로 <바스티유의땅/한겨레 88><이별과절망의둔주곡/ 푸른숲91>< 바다가 된 그대에게/ 새암바다/2000>등 기타 <김대중 살리기 공저><분단과통일시 1,2집/공저><사람과문학/ 공저>등 20여권의 작품집이 있다 현재 저항문인 단체인 <분단과통일시 동인>, <우리시대의시인들 동인>으로 활동 하고 있으며 경기도 김포시 <민통선평화교회담임 목사>로 시무 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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