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1970년~1979년)~(6)

3) <서울제일교회> 대학생회
- 사회과학 공부하는 교회대학생부(3)

나의 영원한 상부(上部) 만파 나병식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사건’의 상부

1974년 5월경, 서울구치소 1사(舍) 상(上) 3방(房)의 펭끼통(화장실)에서 1사 상 10방의 지하(芝河) 형(우리는 한때 그를 형이라고 하며 존경한 적도 있었다)과 통방(通房)하는 소리를 듣고, 1사(舍) 하(下) 10방(房)의 한 사람이 말을 걸었다.

“경남이 형! 나 원희야, 나 어제 들어 왔어요.” 외국어 대학교 학생으로 KSCF 회원인 이 원희(목사; 현 <민청학년>역사편집위원) 군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정보부가 발표한 도표를 보니까 형이 나병식(羅炳植) 형의 하부(下部)인 <한신대> 책(責)으로 나와 있대요.” 캠퍼스가 닫히면 반정부 시위를 책임져야 할 KSCF의 선배가 왜 <민청학련> 도표에 서울대생 나병식의 하부로 발표되어 있느냐는 말이었으리라.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 계엄령이 발포되고 휴교령이 내려 학원의 투쟁이 중단되는 이제까지의 악순환을 벗어나기 위해, 이번에는 휴교령이 내리면, KSCF를 중심으로 운동을 이어간다는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KSCF 선배인 고(故) 김동완(목사, 전 <KNCC> 총무) 형의 지시로 학원 측의 연락임무를 맡고 있다는 나병식을 만나 양측의 정보를 교환하기로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해 1월부터 나는 나병식과 매주 한 번 씩 정기적인 접촉을 하여 왔다. 그런 가운데 2월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이미 결심한 대로 <한국신학대학>에 학사 편입을 하여, 3월부터 수유리로 등교하게 되었다.

<한신대>생이 되어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지 20여일이 지난 어느 날, 예기치 않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학년생 김진열 목사 등 5~6명이 나를 찾아와 시위 준비를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1월 도시산업선교회 목회자들이 유신철폐를 주장하여 구속되었는데, 그중에 한신대 선배들도 구속되어 있어 그들의 석방을 위한 시위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 중 김 군 등은 <서울제일교회>의 중고등부 반사(班師)로서, ‘남산부활절예배’사건으로 구속된 박 목사 등 성직자들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 등을 개최하는 일들을 보고, 마치 내가 프로 운동권이라도 되는 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자기들이 시위를 한다면 쌍수(雙手)를 들어 환영하고 도와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하려는 것이 바로 우리가 준비하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용감한 결단에 같이 해야 할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학원 측과의 약속이 더 컸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 일을 그들에게 털어 놓을 수도 없었던 나는, “나는 신학자가 되려고 한신대에 왔다. 미안하다. 나는 공부만 하려고 한다.”하라고 완곡히 거절하였다. 수차례 꾸준히 매달려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마침내, 경멸의 눈빛으로 비겁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그 지경까지 이른 나는 순간적으로 자존심이 상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수유리 버스 종점 옆 산 위로 올라가, 성명서, 플래카드의 문구, 구호 등을 작성해 주고, 시위 순서와 방식 까지 가르쳐 준 나는, 내 이름은 절대 불지 않겠다는 다짐 받고 산에서 내려 왔다.

4월 3일 발표된, 자수하지 않으면 “사형 무기징역 또는 15년의 이상 유기징역에 처 한다”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위협적인 긴급조치 4호에, 시위라고는 처음 시도해보려 했던 ‘나의 공범자들’이 분명히 자수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나는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며칠을 보냈다. 드디어 4월 7일쯤 평소처럼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돌아오던, 나는 천호동 소재 나의 집 가까운 골목길 어귀에서, 우리 동네 통장을 앞세운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동부경찰서로 끌리어 갔다.

그러나 동부 경찰서도 영문도 모른 채, 단지 상부의 지시로 연행 했을 뿐이었는지, 나는 매일 형식적인 진술서를 작성하는 일로 나날을 보냈다. 그들은 오히려 나에게, “자네 무슨 일 하고 여기 들어 온 거야?” 하고 물을 정도였다.

그러기를 1주일 쯤 지난 어느 날, 평소와 똑같이 진술서를 작성을 한다고 책상에 앉아 노닥거리던 나는 오후가 다 되어 나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는 사람을 의식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나와 친해져서 농담까지 할 정도로 친해진 동부서 형사들과는 달리 그는 날카로운 인상(印象)을 지닌 40대 정도의 남자였다.

오후 퇴근 무렵이 다 될 때 쯤 느릿느릿 일어나 나를 정보과 옆의 외사과로 데려 간 그는, “하루 종일 당신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당신은 거짓말만 하고 있데요! 다 알고 왔으니 솔직히 진술하시요!” 예의까지 갖춘 저음(低音)의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드디어 올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에, ‘나의 공범자들’에게 해 준 일을 생각나는 대로, 아니 그럴 듯하게 덧붙여서 진술하였다. 나의 진술서 작성이 끝날 때까지 한 마디 말도 없이 지켜보고만 있던 그는, “나병식이가 체포됐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나는 갑자기 땅이 꺼져 내리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서쪽 창문으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저녁 해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 문득, “해 흐름 한참 동안은 하염없기가 그지없어라”라는 어떤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정말 하염없기가 그지없었다.
 
“어이 김경남이! 우리 10년 후에나 또 볼 수 있을까?!” 하고 비아냥거리는 듯 한 형사의 말을 뒤로하고 그날로 나는 남산 정보부로 끌려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부터 정보부식 통과의례(갖가지 고문)를 통해 사상(思想) 세탁을 받은 후 정식 조사에 들어갔다.

그들은 나에게 나병식과 관련된 일은 한 마디도 묻지 않은 채 오로지 수유리 버스 종점 오른쪽 산 중턱에서의 ‘우리의 거사(擧事)’ 대해서만 심문(審問)하였다. 그리고 나서 나는 서울 구치소 1사 상 5방 1.75평의 독방으로 옮겨져, 오래간만의 편안한 나날을 보내던 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4월 3일에 '긴급조치 4호'의 발령 후, 바로 자수한 ‘나의 공범(共犯)들’은 끝까지 내 이름을 불지 않았었다. 나의 자백(自白)으로 전혀 누구의 사주도 받지 않고 오로지 ‘구국 정신’으로 시위를 준비한 것으로 했던 그들은 <민청학련> 주모자(主謀者) 나병식의 하부조직인 <한신대> 책 김경남의 조종(操縱)에 따른, 공모자(共謀者)들이라고 도표가 완성되어, "자수하면 선처(善處)한다"는 약속에 따라 전원 석방되었다고 한다.

<후진국사회연구회>에서의 만남

▲ 2002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 박형규 목사와 시무식에 함께하고 있는 나병식 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사진: 블로그 <나병식과 광주와 대한민국>)

나와 만파가 중학교 동기동창이었지만, 서로 대면(對面)하게 된 것은 1970년 대학 1학년 때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대학에 들어와 <후진국사회연구회>(이하 <후사연>)라는 사회과학 서클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서로를 알게 되었다.

그 일 년 동안 나는 <후사연> 선배들뿐만 아니라 나병식으로부터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로부터 나는 나의 무지와 편협한 안목을 넓혔고,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다른 세상에 대한 개안(開眼)을 할 수 있었다. 난해(難解)하게만 들리던 나병식의 언설(言說)은 <후사연> 세미나에서 배운 지식들과 합하여져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눈을 뜨게 해 준 것이었다.

내가 넘어야 할 파도(波濤)는 사법시험 밖에 없다고 생각해 온 나에게 그는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후진국 사회에 넘어야 할 천파만파(千波萬波)를 알게 해 주었다. 나에게는 나병식이 이 나라의 천파만파(千波萬波) 뛰어 넘으려 몸부림치는 구도자(求道者)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파(萬派)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진담(眞談) 반, 농담(弄談) 반으로……. 그러나 언제부터인가는 진심으로…….

‘투표참관인단’에의 권유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가 동숭동 본과로 옮긴 뒤, 나는 교양과정부에서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 것처럼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도서관과 장남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시간제 과외교사일로 오가는 나의 원래의 일상(日常)으로 돌아 왔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현실과 만파가 나를 그만 놔두지 않았다.

당시 40대 김대중 씨를 위협적인 상대로 보고 있는 독재자 박정희 씨가 다가오는 대통령선거에서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감행(敢行)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고 부정 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투표참관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서울대에서도 법대, 문리대, 상대 등의 '투표참관인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에 파견하기로 하고 있었다. 그때 만파가 나를 찾아와 이 참관인단에 참여하자고 권유하여 나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투표참관인단의 일원으로서 강원도 어느 산골의 투표장을 참관하러 갔다.

그 후, ‘대통령선거 투표참관’과 ‘서울대생신민당난입사건’, 그리고 ‘사법파동’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을 겪은 나는, ‘정의의 천칭(天秤)’인 법이 ‘불의의 칼날’로 변질(變質)되게 된 것을 목도(目睹)하고 ‘불의의 칼’도 칼이니 휘둘러야 하는 법관이 되는 길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회의(懷疑)를 가지게 되었다.

<서울제일교회>에로의 권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옥에서 석방되어 일상(日常)으로 돌아간 나에게 또다시 만파가 찾아 왔다. 이번에는 학교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서울제일교회>에서 모이고 있는 <후사연> 세미나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였다.

1972년 5월경 나는 만파의 사주(使嗾)에 따라 사회과학공부를 하고 있는 <서울제일교회>의 <후사연> 세미나에 나가게 되었고, 그 후 우리의 소식은 이리저리 알려져, <서울제일교회>의 <후사연>은 갈 곳을 잃은 학원 ‘운동권들’의 소굴(巢窟)이 된다.

<서울제일교회>의 세미나에서 우리가 함께 공부한 서적들은 만파가 <후사연> 선배들로부터 전해 받은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 신론”, C. 라이트 밀즈의 “양키들아 들어라!”, 조용범 교수의 “후진국 경제론”, 유인호 “민중 경제론” 등이었다.

1973년 10월의 서울문리대 시위 사건

1973년 9월 어느 날, 나는 “나병식의 소재를 알 사람은 너 밖에 없다.”는 말에 자부심(?) 느끼며, 영문도 모른 채 <종로경찰서>로, 서소문동의 <보안사> 분실로 개 끌리듯 끌려 다녔다. 일단 그들은 나에게 피 묻은 헌 군복으로 갈아입히고, 비명소리가 음향효과로 들리는 밀폐(密閉)된 방에 처넣고 공포감을 주었지만, 그의 행방(行方)을 모르는 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반복되는 갖가지 고문에 오히려 오기(傲氣)가 났다. 그리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파~ 잡히지 말고 꼭 해내라!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며칠 후, 나는 문리대 시위 사건을 듣게 된다. 그것은 지난 일 년여 동안 온 국민의 입을 막아 온 유신정국의 두꺼운 얼음장을 깨는 쾌거(快擧)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다음해로, 그리고 독재자의 암살로 끝나게 한, 6여년의 반유신·반독재 투쟁의 시발(始發)이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만파를 위시한 강영원, 황인성 등 <서울제일교회>의 <후사연> 회원(會員)들이었다.

나는 한편으로는 그들이 자랑스러웠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때까지도 ‘출세’의 꿈 자락을 놓지 않고 있었던 나 자신이 몹시도 부끄러웠다. 한참 동안을 밑 모를 자괴감에 빠져있었던 나는 마침내 작정하였다. 그래 신학교를 가자! 그래서 박형규 목사와 같은 목사가 되자!

<민청학련사건> 후, 1년이 채 못 된 1975년 2월에 석방된 우리는 본격적인 반정부 투쟁전선을 건설하기 위해 <한국민주화청년협의회>(<민청협>)을 결성한다. 그때도 만파가 주동이었고, 우리는 그의 하부(下部)였다. 그런데 이번에도 만파는 정문화를 회장으로 세우고 홀연히 <민청협>을 떠나 ‘출판운동’을 시작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의 권유

2000년 만파는 대안학교 <무주 푸른 꿈 학교> 교장직을 그만 둔 나를 자신의 하부(下部)로 부른다. 문국주 등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결성하고 상임이사직을 맡은 그는 나에게 사료관장직을 맡긴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그의 하부(下部)가 된 나는 1980년대 후반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타의 관장직의 경험을 살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등 기독교 단체들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민주화 운동 자료들의 수집에 나름대로 헌신하였다.

만파가 우리 곁을 떠난 지 벌써 이 년이 되어간다. 말술도 마다않고 날을 새우며 이 세상의 만파를 붙들어 안고 씨름하던, 우리의 장사(壯士) 만파가 그렇게 쉽게 떠날 줄을 나는 몰랐다. 내 코가 석자라고, 칭병(稱病)하고 마지막까지 그의 병상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 거한(巨漢)이 그리 쉽게 부서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허무하게 우리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나의 영원한 상부(上部)였던 만파(萬波)여! 그대와 함께하여 나는 행복하였어라.

<필자 소개> 김경남 목사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목사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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