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8일 토요일, 맑음

60년 사제생활에 사제관에 혼자서 살던 신부님이 2박 3일 두 어린이들이 윗층에서 쿵쾅쿵쾅 뛰고 온통 시끌시끌했으니 루이지 신부님과 도움이 할머니가 혼이 쏙빠지셨을 게다. 떠나기 전 신부님께 하직인사차 들렀더니 촛불의 마지막 펄럭임처럼 일순간 반짝이는 눈으로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축복해 주신다. 이 무더위에도 저녁나절에 점퍼까지 입으시고 현관에서 휠체어에 앉아 해넘이를 지켜보고 계시곤 했는데 바랠 대로 바랜 스님의 옷자락처럼 희미한 회색눈동자이지만 선량함은 고스란히 살아 있다.

나이가 구순이 되어서도 그분 직업이 사제였다는 향기를 느끼면서 사제들이 저분처럼 자기의 마지막을 흐르는 물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맞기를 기원했다. 내가 아는 모든 사제들, 특히 우리 작은아들이... 엊저녁 산로렌조 성지 성당에서 그 무더위에 장백의에, 금실은실로 수놓은 묵직한 구식제의를 입고 비오듯 땀을 흘리며 미사를 드리던 빵고신부를 보면서 묵묵히 소임을 해내는 모습에 마냥 철없는 작은아들로만 가슴 조이던 어미로서의 내 기우를 접을 수 있었다.

▲ 아침 8시 45분 미사에 참석하고...

▲ 고백실의 빵고신부

본당신부님께도 작별인사를 드렸는데 알프스로 떠나는 우리에게 우리 작은아들 빵고 신부를 함께 보내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인사를 에둘러 하신다. 낼모레가 성지의 성로렌조 축일이고, 8월 15일은 이 본당 주보 ‘성모승천’ 대축일이어서 도움이로 온 젊은 신부의 할 일이 태산 같다는 암시다. 그래도 온 가족이 사제관에 와서 북적거리고 가게 허용해 주신 넉넉한 마음이 참 고마웠다. 빵고 신부도 조카 둘에 형과 형수, 그리고 부모의 이부자리를 치우고 청소하고 방을 정리하고 나면 수도원 입회 후 처음 맞은 ‘가족소동’이 가라앉을 게다.

원래 토리노~밀라노, 밀라노~베네치아[베로나], 베로나~트렌토 고속도로로 해서 오라~프레다쪼~파소 산펠레그리노~발라다아고르디노 산길을 가기로 했지만 베로나에서 트렌토까지 심한 교통체증에 교통사고까지 발생했다는 전광판 뉴스에 비첸자~벨루노를 거쳐 아고르디노로 돌아가기로 노선을 바꿨다. 몬테발도 휴게소에서 셀프서비스 식당에서 점심도 걸게 먹었다.

펠트레를 지나고 벨루노쪽으로 차를 몰자 알프스 웅장한 산맥(일명 ’벨루노 돌로미티 Dolomiti Bellunesi')이 나타나더니 ‘아고르도 대협곡 Canale di Agordo'에 접어들자 보스코가 쉴새없이 셔터를 눌러야 할 만큼 아름답고 가슴벅찬 영봉들이 차례로 모습을 보인다. 80년대와 90년대에 한두 번 지나간 계곡이기도 하다.

▲ 벨루노 골짜기와 피아베강

중간에 산골짝 바에 들러 커피를 한 잔 하는 동안 쟌카를로 신부님에게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수단에서 도나티신부님이 잠시 그곳에 와 계신다면 저녁식사시간에 전화를 걸면 그분을 바꿔주겠단다. 빈첸조 도나티(Vincenzo Donati) 우리 이름 원선오 신부님께 보스코가 시간 맞춰 전화를 드렸더니만 보스코 음성을 알아보자마자 “서산에 노을이 고우나...”를 흥얼거리시면서 반가워하시더란다.

남수단에 “100개의 학교 짓기”를 추진하시면서 50여개를 개교시키셨는데 이번에는 1000개의 학교를 짓겠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우시고서는 퇴임한 전임총장 챠베스 신부님이 개인친분을 갖고 계시다는 멕시코 어느 재벌을 만나게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드리러 오신 길이란다. 챠베스 신부님은 토임 후 칼리스토 카타콤바 산타르치시오 공동체에 살고 계신다. 영원히 꿈을 꾸는 원선오 신부님의 소망은 그분의 생전 이후에도 꼭 이루어질 것이다.

빵기가 팔카데 계곡에 빌린 집은 비수기였던 봄에 빌려둔 곳인데 시설도 완벽하고 가격도 아주 쌌다. 아고르도 계곡은 동쪽으로는 치베타(Civetta), 북쪽으로는 마르몰라다(Marmolada), 서쪽으로는 산마르티노(Pale di San Martino)가 자리잡고 있는 한복판이다.

▲ 아고르도의 주변산들만도 참 아름답다

코모호수 가까운 관자테를 떠날 즈음에는 섭씨 39°의 기온이 아고르도에 들어서니까 23°! 긴팔 옷으로 갈아입고서 저녁산보를 나설 즈음에는 작은아들 생각이 간절하다. 쉴새없이 까르르 웃고 뜀박질을 하는 시아와 시우를 데리고 어둑한 산골길을 걷는 이 행복이라니!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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