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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백범을 넘고 철기를 넘어<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8.28 14:35
김구주석이 희숙에게 손수 끼워준 금반지는 장준하의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그것은 장준하로서도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평생을 조국에 헌신해 온 거의 유일한 영도자라 일컫는데도 과언이라 할 수 없는 거인의 그늘을 지금 장준하는 벗어나려 하고 있는 터에, 그 큰손으로 희숙의 손을 이끌어 「임정환국봉송회」(臨政還國奉送會) 부녀회에서 주석께 선물로 드린 금반지를 뽑아 희숙의 손가락에 끼워주었으니...
 
희숙도 그 선물하나로 장준하를 남편으로 맞아오면서 장준하의 신부가 된지 보름도 되지 못해 점령 국가의 징병에 빼앗긴 이후 맘 잔뜩 조리며 한숨과 눈물로 살아온 이날까지 회한(悔恨)을 순식간에 보상 받는 듯했다. 얼마나 좋았을까? 그 날이, 그 장준하가....
 
김구의 장준하를 향한 가슴이 그렇듯 간절하면서도 백범은 장준하를 개인적으로 칭찬하거나 친근감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랬던 백범이었기 때문에 희숙에게 베푼 백범의 호의에 더욱 감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장준하는 백범의 슬하를 떠나야 한다. 사람은 제자리, 제 살림이 있어야 산다. 
 
장준하는 요즘 부쩍 “내 할 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하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그것은 유무의식간에 ‘홀로서기’의 준비였다. 그는 단 한발자국도 남을 따라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 나 스스로 선 자리, 지금 나 스스로 하는 일이 주위의 시선에 비상으로 보여진다 해도 나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는 이였다. 이 같은 삶의 자세는 그의 청년시절을 거쳐 그의 장년 시절은 더욱 그랬고, 죽을 때까지 견지되었다. 
 
그가 그러듯 고뇌에 찬 싸움을 계속하고 있을 때 임정요인들과는 달리 한참 늦게 철기, 이범석이 귀국했다. 귀국하자마자 이범석은 장준하를 찾았다. 장준하를 맞은 이범석은 거두절미(去頭截尾), “장동지, 나 장동지가 필요해. 장 동지는 날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난 술수 같은 건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말일세. 지금 정치판은 정부수립 앞두고 각 정파 간에 온갖 술수들이 횡행하고 있네. 난 사실 중국 정부로부터 중국 중앙군 편입의 종용을 받고 잠시 숙고해 보았지만 들려오는 고국의 소식에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어. 완전 자주 독립국가를 이룩해야 되겠다는 결심 때문이었지. 우리는 이미 O.S.S. 결의로 조국 독립을 위해 죽었던 몸들 아닌가....”
 
장준하는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김구의 사람 장준하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다시 희숙에게 금반지를 끼워준 김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슴이 아렸다. 철기는 장준하의 지금의 심정을 예감하고 있다. “알겠네. 백범선생과의 관계 때문에 머뭇거리는 것 같은데, 백범선생께는 내가 말씀을 드릴 터이니 짐 싸가지고 곧 내게로 오게나...” 철기의 면전을 물러 나온 장준하의 맘문은 서서히 철기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이범석은 귀국하자마자 「조선민족청년단」을 창설한다. 소위 후에 「족청」(族靑)으로 알려지는 대규모의 청년조직이었다.
 
   
▲ 조선민족청년단의 결성
 
장준하는 용기를 내어 백범에게 「족청」에의 참여의사를 조용히 여쭈었다. 백범의 답이 놀라웠다. “내 벌써 예감하고 있었지. 장목사가 어떻게 이 판(Place)을 견딜 수 있겠는가? 장 목사는 중경도 싫다면서 토교로 가지 않았는가? 그리고 서안의 이 장군에게로 가지 않았던가? 어서 가게. 가서 하고 싶은 일 제대로 한번 해봐...”
그렇게 해서 장준하는 다시 철기에게로 갔고, 곧 바로 조선민족청년단의 단모를 쓰고 단복을 입었다. 그리고 조선민족청년단의 교무처장(敎務處長)이 된다.
장준하의 나이 30세가 되는 해, 1947년 6월이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장준하의 뇌리속의 철기는 백범과는 다르다 하면서도 한동안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서안에서 서원했단 ‘결사(決死)의 꿈’이었다. 위아래 같은 것이 없었다. 선후도 대소도 없었다. 빼앗긴 조국 땅 다시 찾기를 죽음으로서 하자는 거룩한 꿈의 서원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철기는 갈수록 아니었다. 백범은 큰 위기, 그 역경 속에서도 간데없는 민주주의의 신봉자의 모습을 견지하는데 반해 철기의 「족청」은 거의 ‘철기의 것’이었다.
 
장준하가 ‘아, 내가 잘못했구나!’ 한 것은 한 달이 채 못되서였다. 장준하의 몸가짐이 ‘신중(愼重)’이었다. 몸 맘을 아주 곧추세우고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 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도저히 철기를 따를 수 없는 이제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 백범? 백범을 다시 찾아간다? 갑자기 장준하가 어디서 들었던 건지, 어떻게 기억해왔던 건지 “나온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게 어디 사람이냐?”하는 말이 생각나면서 조용히 웃고 말았다. 
 
또 하나, 장준하를 족청의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은 바로 족청에서 담당해야 하는 그의 직무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았을 때 이미 「족청」의 흐름은 「민족청년」의 육성에 있지 않았다. 철기가 「임정」의 인맥이 아닌 철저한 이승만의 사람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을 때 썩 내키지 않았지만 매일 매일 자신이 만들어내는 교육 기획안이 철저히 번번히 무시 되어버리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로 견딜 수가 없었다. 김구에게서와 같은 “장 목사. 수고했소. 잘됐소. 고맙구먼”하는 말을 기대 하는 건 고사하고, 장준하가 교무처장으로서 밤을 세워 만들어 놓은 정신교안(精神敎案)이 바로 면전에서 휴지가 되어나가는 것은 곧 살점을 떼이는 듯 했다. 장준하가 할 일은 조직관리가 아니라 「민족청년」의 정신 훈련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철기가 교육처에 직접 요구하는 것은 시종, 오직 조직의 강화였다. 조직 강화가 최고의 목적이 되면서 「족청」은 그야말로 오합지중(烏合之衆)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일본군의 총검을 몸으로 맞서며 해방조국(?)에 당당히 들어온 영원한 한국 광복군 사관 장준하로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경교장’. 그 나온 구멍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일
 
「족청」사람으로 남을려면 이범석의 요구를 명령으로 받아야하는 길뿐, 헌데 이범석은 이미 죽음을 함께 서원했던 그가 아니니, 이제 어디로 가야하는 것인가? 게다가 지금 준하에겐 할아버지까지 무사히 월남하셔서 아버지, 어머니, 아내 희숙이, 명하(明河)와 익하(益河)는 무슨 일을 해서라도 입에 풀질을 해간다 해도 셋째 창하(昌河) 까지는 거느려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에 서럽고 거칠기 말할 수 없는 서울바닥에서 우선 먹고 사는 일이 막막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장준하인지라 결코 상황에 기 꺾일 수는 없는 일. 장준하는 전도를 가로막는 철벽을 뚫는 기이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이 장준하를 이끌었다. 「족청」의 교무처장으로서 헛 세월 넉달, 11월로, 단복을 벗어 반듯하게 개어 책상에 놓고 그 개어 놓인 단복위에 단모를 벗어 놓은 후 갈 바를 알지 못한 체 「족청」을 떠났다. 그렇게 「족청」을 떠나는 장준하의 정수리에서 발 뒷꿈치까지 흐르는 전율이 온몸을 휩쓸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맘 편히, 몸 편히 현실적으로 미래가 보장되는 길이라면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군에 몸을 담는 것이 었지만 장준하에게 그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였다. 하나는 이미 국군이라는 게 일군출신들로 구성되어 가고 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임정과 광복군의 꿈이었던 ‘해방조국’에 미군정과 그 아류(亞流)들에 의해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분단의 수순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동서남북어디에도 이제 장준하가 갈 곳은 없다. 
 
한국 광복군대위출신 장준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 더구나 임정주석 김구의 비서, 그것도 공보(公報)를 담당해온 장준하가 어떻게 일,만군(日,滿軍) 사관 출신 장군이요 영관이요 하는 것들이 통제하는 무리들과 합류 할 수 있겠는가? 
 
「에큐메니안」의 독자들은 기억해야한다. 그때 그렇게 이루어진 군부 안에 후에 장준하가 전신을 내던져 민주주의 토대를 이루어내고 흩어진 지성들을 불러내 문민의 역사를 구현하기 위해 사선을 뒹굴 때, 박정희(朴正熙)라 이름 하는 국도(國盜)가 있었음을 말이다. 세계사의 어떤 비극으로도 비유할 수 없는 박정희를 맞선 장준하의 혈투, 그 민주성사(民主聖史)를 기억해야 한다. 
 
역사는 장준하를 조선? 아니 반조선(半朝鮮)의 정치현장에서 빼내기로 했다. 그를 정치의 현장에 두는 것은 역사자체의 너무 큰 손실이었기 때문에...
역사는 장준하를 한국의 정치판에서 빼어내 황량한 들판에 들사람을 세웠다. 이제 우리에게 한 위대한 과제가 주어진다. 후에 「재야의 대통령」(在野大統領), 「박정희의 천적」으로 일컬어지는 장준하와 박정희의 한국 해방 전후사의 족적을 철저히 추적, 역사의 법정에 세우는 일이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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