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이웃종교 칼럼 연재
생명의 길<김명수 칼럼 - '나'에서 벗어난 '나'>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5.09.03 15:46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멀리하십시오.(벧전 2:11; 새번역)

Beloved, I urge you as aliens and strangers to abstain from fleshly lusts which wage were against the soul.(1 Peter 2:11; NASB)

어느 한 여름날이었어요. 날씨가 더웠습니다. 원숭이 한 마리가 더위를 피하여 커다란 상수리나무를 찾아가 그늘 밑에 벌떡 누웠습니다. 시원했습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그만 스르르 잠이 들고 말았어요. 헌데, 갑자기 ‘쾅!’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원숭이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처럼 퍼뜩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이고. 땅이 진동하는 걸 보니,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있구나!”

그러자 원숭이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뛰고 또 뛰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도 계속 뛰었습니다. 이를 본 옆에 있던 동료 원숭이들이 물었습니다. “너는 왜 그렇게 죽기 살기로 뛰고 있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게야?”헌데 그 원숭이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뛰기만 했어요. 원숭이 대장이 뒤 따라오며 물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냐?” 그러자 원숭이는 뛰면서 말했어요. “지금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

“너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아닙니다. 진짜인데요.”그러자 원숭이 대장은 혹시 진짜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를 따라 같이 뛰기 시작했어요. 그러자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원숭이 떼들이 같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보고 있던 숲속의 토끼, 노루, 사슴, 고라니들이 덩달아 뛰기 시작했어요. 엄청난 숫자의 숲속 동물들이 같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습니다.

숲속 밖을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동물들은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가려고 뛰고 또 뛰었습니다. 사생결단을 다해 뛰었어요. 헌데, 숲이 끝나는 지점에는 천 길 낭떠러지가 있었어요. 그 밑에는 끝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는데요. 이를 모르고 있는 동물들은 낭떠러지를 향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가고 있는 것이었어요. “저 끝에 도달하면 분명 살 길이 있을 것이야.” 이렇게들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 때, 낭떠러지에 있는 큰 바위 밑에서 사자 한 마리가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소란스런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깨었어요. 눈을 떠 보니, 숲 속의 동물들이 일제히 낭떠러지 절벽을 향하여 뛰어가고 있었습니다. 다급한 나머지 사자가 그들을 가로막으며 ‘어흥!’하고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정신없이 달리고 있던 동물들이 그 소리에 놀라 무서워 떨며 모두 그 자리에 멈추어 섰어요. “너희들, 지금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 게야? 저 끄트머리에 무엇이 있는 줄 아는가? 천 길 낭떠러지야. 너희는 죽을 줄 모르면서 그렇게 죽을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게야? 이 멍청이 놈들아!”사자가 호통을 쳤어요. 그러자 동물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어요. 그러자 앞에서 달리던 원숭이가 사자 앞에 걸어 나왔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제가 들었는데요. 그래서 도망치는 중입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들었느냐?” “제가 낮잠  자던 상수리나무 밑에서 들었는데요.”

“그래? 그곳이 어딘지 한 번 가보자.”그래서 모두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어요. 헌데 당도해보니, 하늘이 꺼지기는커녕 그곳은 너무 고요했어요. 원숭이가 말했습니다. “어? 이상하다. 아까는 분명 하늘이 꺼지는 소리가 들렸는데.” 사자가 나무 밑을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원숭이가 낮잠을 잤던 머리 밑에 커다란 상수리 알이 하나 떨어져 있는 것이었어요. 바람이 불자 상수리 알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원숭이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로 착각하여 일어난 소동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지금 동물의 왕국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우리 속담에 “남이 장에 가면 거름통지고 장에 간다.”는 말이 있어요. 남이 장에 가는 것을 보면, 딱히 살 물건이 없는 데도요.  덩달아 따라 장에 가는 사람을 빗대어 만든 은유인데요.

   
 
우리는 흔히 남과 비교하는데서 자기 존재감을 찾으려고 합니다. 경쟁해서 앞서거나 이기면 우월감을 갖게 되고요. 뒤처지거나 지면 패배감을 갖게 됩니다. 비싼 물품이나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면 우월감을 갖게 되고요. 남과 비교하여 가진 것이 적으면 주눅이 들어 살지요. 

TV나 언론매체들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온 종일 새로운 제품들을 홍보하고 소개합니다. 끊임없이 인간의 소유 욕구를 자극하여 물건을 사게 만들지요. 신제품을 구입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보다 더 앞서고, 남보다 더 행복하라고 합니다.

값비싼 제품을 구매하려면 무엇이 있어야 하나요? 돈이지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합니까? 경쟁에서 이겨야 합니다. 경쟁해서 좋은 대학을 가야하고, 경쟁해서 일류기업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강남에 아파트를 사고, 명품가방을 들고, 외제차를 타고 인생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행복은 곧 소유와 비례한다고 가르칩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고 언론매체들은 선전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사회는 더 많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더 많이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해요.

일면 타당성이 있는 주장이기는 해요. 왜 그런가요? 돈이 많을수록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고요. 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기 때문이지요. 헌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한 가지 욕구가 채워지면, 얼마 못가서 또 다른 욕구가 슬며시 머리를 들고 일어난다는 사실이지요. 욕망이라는 전차는 멈출 줄을 모르고 질주하지요.

행복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채우는 방법과 줄이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두 얻어지는 것도 아니고, 혹여 다 얻었다고 해도 행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지요.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한 쪽에 치우치 않고요. 이 둘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행복할 수 있는 지혜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욕망을 채우는 수단들은 주로 나 밖에서 찾게 되는데요. 나 밖에서 얻는 것들 중에 세 가지가 있어요. 재물, 건강, 사람이지요. 헌데 나 밖에서 얻은 것들은 반드시 떠납니다. 돈도 건강도 사람도 인연이 다하면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시간의 길고 짧음이 있을 따름이지요.

욕망이란 무엇에 근거를 두고 있나요? 일차적으로‘나(我)’입니다. ‘고정된 나’가 존재한다는 의식에서 욕망이 일어납니다. 서가모니 붓다께서는 무아無我사상을 설파했어요. 무아는 ‘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나’라고 할 만한 실체substance가 없다는 말이지요. 나는 나 아닌 것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그리고 그것들에 의존해서만 존재한다는 뜻인데요. 일정한 조건이 생겨 ‘나’가 형성되었다가, 그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고 마는 잠정적인 존재가 바로‘나’라는 뜻입니다. 나를 고정된 실체로써가 아니라 관계요 과정으로 보는 것이 무아사상의 핵심입니다. 나의 무상성無常性을 깨닫고 사는 것이지요.

고정된‘나(私)’가 없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면, 본래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내 생각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음을 알게 되지요. 이와 같이 소유나 관념에 매이지 않고 그것들로부터 해방된 삶을 살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기실 ‘나’라는 존재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죽음을 향해 긴 행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년도 못사는 한정된 인생을 살고 있어요. 내가 사라지면, 내 소유나 의식(생각)은 어찌 되나요?  사라지고 말지요. 나, 내 것, 내 생각에 지나치게 매이거나 집착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붓다는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 집착에서 벗어날 때,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붓다의 무아사상을 역사 속에서 오롯이 실천한 분이 예수입니다. 예수에게는 ‘나’라고 할 만한 에고의식이 없었어요. 기독교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합니다. 허나, 막상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 없이 살았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 없이 하나님의 아들로 사신 분이 예수이지요. 로고스가 육이 되어 인간 안에 살았듯이, 예수는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아예 그들의 동반자partner로 살았어요. 아예 소수자의 하나가 되어(becoming a social minority) 살았던 것이지요. 사회적 약자들과 화작化作의 삶을 살았던 예수야말로 인류를 구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어요(요1:14). 기독교 진리는 역설적paradoxical입니다. 

   
 
인생은 무엇인가요? 길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요? 길가는 나그네에요. 우리는 모두 타향살이하는 나그네입니다(벧전2:11). ‘나그네’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로이코스(paroikos)는 ‘집을 떠난 떠돌이’를 뜻합니다. 본향을 떠나 지상에서 잠시 떠도는 떠돌이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예외 없이 떠돌이 인생을 살고 있어요.
본문에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육체의 정욕’으로 번역된 사르키콘 에피튜미온(sarkikon epithymion)은 인간이 밖에서 얻으려고 하는 세속적인 욕망 일체를 뜻하지요. 돈, 건강, 명예가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얻으려는 욕구에 매이거나 집착할 때, 그것들을 주인으로 착각하고 인생을 살 때, 그것은 다름 아닌 ‘혼을 거슬러 싸우는 삶’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푸쉬케스(psykes)는 영혼(spirit)보다 혼(soul)으로 번역돼야 합니다. 그리스어 푸쉬케는 생명의 흐름을 뜻하는 개념인데요,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은 생명의 흐름에 거역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 곧 푸쉬케의 삶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욕망을 적절히 조절하는 삶이지요.  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입고, 먹고, 잠자는 것이지요. 의식주衣食住입니다. 일차적인 생존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엇이 있어야 하나요? 돈입니다. 물질이 있어야 해요.

객관적인 기준을 알 수는 없지만, 하여튼 돈이란 지나치게 많으면 교만하게 되고요. 지나치게 부족하면 비굴하게 되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 적정선適定線을 의식주와 연계해서 찾고 싶습니다. 입고 먹고 잠 잘 수 있는데 필요한 만큼 있으면 되고요. 자녀를 교육시키고 아프면 병원에 가는데 필요한 만큼 돈이 있으면 됩니다. 그 이상은 탐욕이고 사치입니다.

저는 욕망을 채우기보다는 줄이는데서 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어요. 저는 음식을 적게 먹는 편입니다. 천천히 먹지요. 주로 채식을 합니다. 소식小食, 서식徐食, 채식菜食이 제 식생활 습성인데요. 과식過食, 속식速食, 육식肉食은 될 수록 피하는 편입니다. 영양은 제가 활동하는데 큰 불편 없을 만큼 섭취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활동량이 줄어들었어요. 과다하게 영양을 섭취할 까닭이 없지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무엇을 보면, 그 자리에서 즐기는 것으로 끝내지요. 굳이 내 것으로 삼으려고 하지 않지요.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에서 해방될 때, 우리는 소유에 매이지 않고 존재 자체로 살게 되지요. 제 몸뚱이 하나를 지탱하는데 필요로 하는 경비는 최소화하고, 여력餘力은 제가 의미를 두는 일에 할애합니다.

저는 있고 없음에 그리 목매지 않는 편인데요. 있을 때는 이웃을 돌보기도 하고, 좀 여행도 다니는 편이지요. 쪼들릴 때는 절약하며 불편하게 살지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주어진 형편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족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해요.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독일에서 8년 정도 유학생활을 했던 적이 있는데요. 독일의 보편복지야말로 바람직한 사회제도라고 생각했어요. 독일에서는 사람이 태어나면, 나서 죽기까지 국가가 그 사람의 기본생활을 책임집니다. 의·식·주·교육·의료, 이 다섯 가지는 다만 독일국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가 책임집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보장된 사회가 독일의 복지제도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소유욕이 우리보다 상대적으로 적어요. 노후를 위해 저축한다는 개념이 덜하지요. 6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하여 돈을 벌면, 세금을 성실히 내고 나머지는 여행가서 다 쓰고 돌아옵니다. 사교육비, 의료비, 노후대책을 위해 돈을 열심히 저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국민들은 돈을 벌면 미래를 위해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행복을 위해 씁니다. 열심히 벌어서 돈을 쓰니, 국민경제가 활성화되지 않을 수 없어요. 국가가 국민의 미래복지를 보장해줌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마음 놓고 돈을 쓰도록 유도하는 것이 독일의 경제정책입니다. 경제민주화를 통한 경제 활성화 정책인 셈이지요. 한국은 대기업 천국이지만, 독일은 기업과 국민이 함께 사는 나라입니다. 경제민주화와 보편복지제도를 통한 경제 활성화야말로 진정 부강한 나라로 가는 지름길임을 보여주고 있어요. 

우리나라 헌법 제1조1·2항은 무엇인가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국민이 주인이 되어 통치하는 나라입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것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어요. 국가권력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국민을 탄압하기 위해서가 아니지요.

헌데, 우리나라 현실은 어떤가요? 권력을 부여해 준 주인이 국민인데도, 국가권력은 주인을 배신하고 재벌의 하수인이 되어 그들의 곳간을 늘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현재 5대 재벌이 쌓아둔 돈이 500조원이라고 해요. 국가권력이 재벌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습니다. 골목에 있는 구멍가게 상권까지 대기업이 싹쓸이 하고 있어요. 어린양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국민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99마리를 가진 대기업에게 바치는 것이 한국 정치권력의 현주소가 아닌가요? 이것은 헌법 제1조에 대한 배반입니다.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 500일이 지났어요.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304명의 무고한 생명이 바다에 수장된 사건이었는데요. 정부는 진실을 밝히기는커녕, 오히려 진실이 밝혀질까 두려워 고의로 이를 은폐하고 있어요. 정부는 세월호 가족들을 향하여 보상금을 줄 테니, 대신 정부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한다고 해요. 천인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는 중립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편에 섰어요. 강자가 아닌 약자 편에 섰어요. 권력자가 아닌 민중 편에서 섰어요. 다만 그들도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예수는 사회의 소수자 편에 섰어요. 그들도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쳤어요. 역사에 중립은 없습니다. 순수 객관적인 역사도 없습니다. 나 한 사람의 행복을 넘어 사회 소수자들의 행복이 보장될 때 생명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예수는 몸소 보여주었어요. 예수의 간 길을 따라 생명의 길을 여는 여러분의 삶이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