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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와 박정희(朴正熙)<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9.04 16:09

해방 전후 양인(兩人)의 족적(足跡)을 중심으로(1)

장준하와 박정희의 한국현대사의 도상에서 전개된 혈투에 대해선 머지않아 발표될 필자의 글 「장준하의 사상계(思想界)와 박정희의 5.16」으로부터 시작해서 장준하가 그 박정희의 정치 밀단(密團)에 의해 1975년 8월 17일 오후 1시 50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抱川郡二東面藥師峰)에서 민중의 비운을 안고 숨지기까지에서 계속해서 증언 될 것이지만, 여기서는 우선 장준하와 박정희의 해방 전후의 족적을 비교해 두 인물사의 심판(?)을 내리려 한다.

필자가 굳이 이 장(章)에서 장준하와 박정희를 대비코져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의 존엄’을 수호해 내기 위해서이다. 그의 평생지기였던 김준엽은 장준하의 (대통령) 박정희에 대한 소신을 이렇게 전했다. “그 친구에겐 부동의 소신이 있었습니다. ‘박정희가 국무총리라면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안된다. 박정희가 어떻게 될 수 있단 말이냐? 역사를 위해서도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박정희가 대통령이라니?!” 장준하가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투철한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단순한 애국 정신에서가 아니었다. 국가주의에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의 신앙이자 신조였던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 없어서”였다. 장준하가 뜻하는 조상이란 소위 ‘동포’ 의식의 산물이 아니었다. 스스로 하는 삶, 자주하는 삶의 유산자(遺産者)로서의 조상이었다. 그것이 그가 죽어도 박정희를 수용할 수 없는 이유였다.

장준하의 머리에, 가슴 속에 각인되어 있는 박정희는 누가 뭐라 해도 “소위 그 천황폐하 앞에서 니폰도를 뽑아들고 충성을 맹세한 자”, “소위 그 천황폐하 앞에서 손가락을 물어뜯어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 혈서를 쓴 자”였다. 온몸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사선(死線)을 살아온 장준하, 이미 ‘참’이 종교가 되어 있는 장준하였으니…….

   
▲ 만주군 '예비소위' 박정희(좌)와 광복군 장교 시절의 장준하(우).
박정희가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서부공립심상소학교」(이하 문경소학교) 교사로 부임(1937.4.1.), 3년 동안의 교편생활을 거쳐 1940년 4월 4일 일군(日軍)의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한다. 그가 당시 형편으로는 꽤 괜찮은 소학교 교사를 내치고 일본 육군사관을 꿈꾸며 불원천리 장춘(長春)까지 고향을 떠나 내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닌 특이한 야심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주야로 꿈꾸는 야심이었다.

그것은 야심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 일종의 종교심에 가까운 야심을 가졌다는데서 박정희와 장준하, 장준하와 박정희는 추호도 다름이 없었다. 박정희의 그 종교적이라 할 만큼 열망하는 것이 ‘힘’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힘, 어떤 힘이 아니었다. 그저 힘이었다.

그는 그의 조국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일본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조국이, 민족이 제국주의의 철권에 휘둘려도 관심이 없었고, 일본이 그 철권으로, 군대로 주변국을 압박하고 짓밟아도 분노하지 않았다. 또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박정희에게는 ‘힘’이 신이었으니까.

그는 만주 일군군관학교를 일등으로 수료한다. 군관학교 재학기간 동안의 그의 성실성, 헌신성, 열심 있는 수학·수련태도는 일본, 중국, 만주, 조선 계열의 생도들도 예외 없이 깊은 관심을 갖게 했다. 적어도 밖으로 나타난 박정희의 수련태도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힘을 기를 수만 있다면 그만이었다. 그는 문경소학교 교사시절 그가 많은 교생들의 체육시간엔 패씨름을 시켰고, 이긴 편에겐 자비를 써가면서까지 두둑한 상품을 주곤 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언제나 일등을 한 패를 일본패, 2등은 조선패, 3등은 중국패라 한 것이다. 왜 였을까? 왜 그랬을까? 어째서 매번 1등은 일본패라 했을까? 이유는 오직 하나, 적어도 현상으로는 일본이 승전국이요,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23일, 만주 육사예과를 졸업한다. 전교 수석으로 만주국 황제 부의(溥義)가 수여하는 금시계를 선물로, 교장인 나구모(南雲親一郞, 남운친일랑)로부터는 전교생들이 운집한 자리에서 영광의 칭송(?)을 듣는다.

“다카키(박정희의 일본명) 생도는 태생은 조선이라해도 천황폐하께 바치는 충성심에서는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인데가 있다.”

이같은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졸업식에 함께 참여했던 그의 한 선배는 박정희가 후에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후 한 자리에서 그때를 회고하며, ‘조선인으로서(?) 그때 정말 감격스러웠다’고 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1942년 9월 일본의 육군성이 베푸는 특전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 정규과정을 마치고 1944년 4월 일본육사를 졸업한다. 박정희의 과정 이수 자세는 만군사관학교에서처럼 철저, 출중했고, 주변의, 특히 일본의 지휘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상」을 받았다.

이제까지의 박정희의 관심은 ‘힘을 기른다’는데 있었다. 육사를 마친 박정희는 일본의 북부 「마쓰야마」(松山)에 주둔 중인 「제14연대」에 배속, 2개월 복무 후 만주 영안(목단강 하류)에 있는 「보병 제8연대」로 전속되어 3개월을 복무하다가 화북지방의 열하성에 있는 「열하보병 제8단」으로 옮겨 거기서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중국 출신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게 된다.

‘힘은 꺾이는 때가 있다’, ‘영원한 힘은 없다’는 것을 최초로 경험하는 때였다. 그런데도 박정희의 그 꿈은 그대로 남았다. 아제까지 걸어온 죄의 길에 대한 통절한 회심이 없었다.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는 정도였다.

   
▲ 일본육사 본과 시절 가나가와현 소재 상무대에서 동기생들과 찍은 사진, 앞줄 왼쪽 세번째가 박정희. (사진:박정희인터넷기념관)
박정희! 그는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바로 그 무렵, 중국 서안(西安)에 주둔해 있던 O.S.S 특수훈련을 마친 철기 이범석은 「한국광복군정진군」(韓國光復軍精進軍) 사령관의 특명을 임정으로부터 받자마자 곧, 장준하를 불렀다. “이제 조선반도의 침투작전은 불가능해졌다. 우리가 한반도 접수를 서둘려야 한다. 재중국미군전구사령부에서도 한반도 접수 작전이 수립되었다. 차후 명령을 기다려라!” 장준하는 빼앗겼던 땅의 회복에 온몸을 떨었다.

박정희는 후에 군사쿠데타로 민주정권을 찬탈하여 그 장악에 성공한 후, 만주군관학교, 만주지역에서의 군복무를 「비밀광복군」으로 그 주변의 숱한 무리들이 조작하기 위해 온간 술수를 다하던 때, 그에게 누군가가 “각하, 만주에는 왜 가셨던 겁니까?”하고 묻자, 일말의 주저함 없이 “긴 칼 차기 위해 갔지…….”라고 대답했다. 박정희의 한 자료에는 그가 만군사관학교나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휴가차 고향을 찾았는데, 그가 고향을 찾을 때마다 ‘보기에도 불편하리만큼 긴 칼을 차고 왔었다’고 그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독자들은 이미 장준하가 어떻게 왔으며, 자랐으며 살아갔나 그리고 어떻게 그의 삶을 마감했나를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하늘 아래 두 사람이 있었다. 다른 두 사람이 말이다. 장준하와 박정희. 역사란 실로 무서운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말한다면 뭐라 할까? 누가 이겼다고 할까? 삶에 졌다, 이겼다가 있을 수 없는 것이거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정희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사실은 아니다. 인생을 살아내는데 있어 절대적인 과제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가 빈주먹뿐이라 해도 당당한 삶을, 스스로의 생각에 한없는 감사의 염(念)을 금치 못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보라. 박정희 말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의 족적을 그토록 지워버리려 하고 거짓으로 다시 그려내려 한 것일까? 이제까지의 자신의 삶을 지워내려 할 때, 그것은 이미 스스로에 대한 심판인 것을 박정희는 알지 못했다. 살아서는 안될 자였다는 심판이었다.

살아서는 안될 놈, 그것이 박정희 위에 내리는 역사의 명이었다. 비슷한 때에 장준하는 일본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을 단행한다. 1941년 도일하여 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 영어와 일어를 일 년 동안 연수하고, 다음해 일본 신학교에 편입, 한 해를 지나 3학년 2학기를 거의 종강하는 11월이었다. 1년을 더 하면 학교를 마치게 되는 때 귀국을 단행한 것이다.

일본정부가 대학생 징집령을 내리기도 했지만 장준하는 자신의 문제보다는 장준하가 신성을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던 신안 소학교의 제자로 지금은 애인이 되어 있는 로자(김희숙의 교명, 필자 주)의 신상문제 때문이었다.

지금 조선에서는 목하 미혼 여성들이 정신대의 징발 대상이 되어 있다 준하는 희숙을 지켜야 했다. 기혼 여성들은 징발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었기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는 대로 양가 어른들의 허락을 얻어 결혼식을 올리리라는 결심에서였다. 귀국한 장준하는 결심한 바를 기탄없이 양가의 어른들께 말씀드려 어렵잖게 허락을 얻어냈다.

김희숙과 결혼식을 치룬 날이 1944년 1월 5일, 결혼한 지 보름 만에 장준하는 로자의 신분을 감싸놓고, 집을 떠난다. 일군에의 입대를 위해서였다. 일군 입대를 단행하면서 장준하는 희숙에게 이렇게 말한다.

“로자, 내가 우선 일군에 입대하면 바로 중국에 있는 부대로 전속을 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중국으로의 전출이 이루어지면 거기서 탈출해서 우리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으로 갈 거야…….”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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