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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와 박정희(朴正熙)<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9.23 14:39

해방전후 양인(兩人)의 족적(足跡)을 중심으로(3)

보수라인의 대표적인 언론인 조갑제는 그가 쓴 박정희의 전기 「박정희의 결정적 순간」에서 “만리장성 북쪽의 열하성에 포진하고 있던 만주군 8단(團, 연대)의 네 조선인 장교들,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의 참전을 가장 먼저 안 것은 반벽산의 단 본부에 있던 단장(團長) 부관 박정희 중위였다”라고 쓰고 있다.

   
▲ 조갑제, <박정희> 전기
조갑제는 박정희가 어떻게 방원철, 신현준 같은 선배 장교들보다도 먼저 소련의 참전을 알게 되었는가는 말하고 있지 않지만 필자의 분석으로는 그의 특수한 직책이 준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 특수한 직책이란 박정희의 「작전」 부관이라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1년여, 이 만주 열하성 제8단에서 복무했는데, 2,3개월 정도 선 소대장으로 근무했을 분, 일본의 패전으로 무장해제 당하기까지 제8단장의 「작전」 부관으로 재직했다.

박정희의 미화를 획책하는 이들 중엔 “박정희의 팔로군을 비롯한 항일세력의 토벌은 없었다. 일선 소대장으로서 그의 참전 기간은 2,3개월뿐이었다. 그는 해방이 될 때까지 행정관으로 근무했다”면서 그를 두둔하고 있지만 이는 박정희가 수행한 「행정관」이라는게 무엇이었나, 어떤 것이었나를 간과한데서 빚어지는 것이다.

박정희의 업무를 내근이었다 하거나 일반 행정직이었다 하거나 간에 실제로 박정희의 수행임무는 「작전 부관」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더군다나 박정희의 ‘작전 부관으로서 그 때’는 줄곧 전시였다는 사실, 박정희가 상부로부터 받는 모든 명령이 전쟁·전장(戰爭·戰場)에서 실행되는 것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박정희의 죄는 역사적으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국부군, 독립 항일유격군, 만주 일대의 비적군만이 아니었다. 그에 못지 않는 항일조직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광복군, 연안의 조선 의용군, 독립된 게릴라 부대 등 헤아릴 수 없는 수의 자주의 혼들이 그 작전, 그 전략에 억울하디 억울하게 죽어갔다.

조갑제는 같은 책 74쪽 「광복의 그날」에서 “8단은 만리장성 북쪽에 흩어져 있는 전(全) 병력(약4천명)을 상룽에 집결시켰다가 상부의 명령에 따라 내 몽골의 뚜어룬(多倫)으로 북진하라는 「작전 임무」를 부여받았다”면서 “박정희의 이런 명령을 신현준의 제6연을 비롯한 예하부대에 전달했다”고 전한다.

8월 13일, 중화기 중대의 선임장교 박원철이 만리장성 남쪽에서 작전을 마치고 반벽산(半壁山)에서 20리쯤 떨어진 고산자(孤山子)의 본부로 돌아와 잠시 휴식 중에 박정희 작전관(作戰官)의 전화가 걸려왔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지금부터 기밀유지를 위해서 조선어를 쓰겠습니다. 지난 7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우리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서 상룽에 집결했다가 뚜어룬으로 진격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새벽5시까지 반벽산에 도착해 주십시오. 반벽산에서 부대를 정비하여 상룽으로 향합니다...”

그는 「작전관」으로써 나무랄 것이 없었다. 그는 마치 그의 전 존재가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것은 ‘항일세력의 씨’를 말리는 반역사적인 범행이었다.

‘뜻’ 밖에서 살다(?)간 사람

‘한국현대사의 정신(情神)’으로 일컬어지는 함석헌(咸錫憲)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 혹은 ‘하느님’을 기독교 밖의 사람들 곧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꿔서 할 필요가 있다”면서 “‘뜻’이라, ‘역사’라 할 수 있다”고 했다.

“하난님은 못 믿겠다면 아니 믿어도 좋지만 뜻도 아니 믿을 수는 없지 않으냐? 긍정해도 뜻은 살아있고, 부정해도 뜻은 살아있다. 져서도 뜻만 있으면 되고, 이겨서도 뜻이 없으면 아니된다. 그래서 뜻이라고 한 것이다. 이야말로 만인의 종교다.”

   
▲ 박정희가 세상에 와서 그의 명이 다할 때까지찾아온 것이‘힘’이었다
함석헌의 말을 빌린다면 박정희는 ‘뜻’ 밖의 사람이었다. 광복의 직전후사(直前後事)가, 그리고 5.16군사반란 이후 그가 그의 죄값으로 비운에 갈 때까지 그는 ‘뜻’ 밖에서 ‘힘’을 신(神)으로 믿고, 오직 힘을 추구하다가 아이러니컬하게도 전혀 또 다른 힘에 의해 그의 생(生)을 마감했다. 박정희! 실로 그는 인간의 부정적인 구석을 예외 없이 챙기고 있었다.

박정희 중위로부터 작전 명령을 전달받은 화기중대장 방원철 대위는 중대원들을 끌고 박정희로부터 받은 지시대로 상룽에 도착, 상부와의 연락을 위하여 무전기를 켰다. 무전기를 켜자 곧바로 한 방송이 흘러 나온다. 장개석 총통의 육성연설이었다.

“일본은 14년에 걸친 중국 침략전쟁에서 완전히 패망하여 항복하였습니다. 동북지방에서는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도 더 심한 압제를 받았습니다.(박정희의 부대가 주둔한 곳 역시 이 동북지방이었음. 필자주) 조선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들에게 빌붙어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하는 바입니다...” 방원철은 가슴앓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조선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심한 압제를 받았다. 조선 사람들 중에는 일본인들에게 빌붙어 나쁜 일을 한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라는 말에 더욱 그랬다.

박정희는 그 때 장개석의 이 연설을 들었을까, 못 들었을까? 그 때, 박정희는 제5관구 제8단의 「작전」 부관이었는데……. 박정희는 일본의 패망에 누구보다도 견디기 어려우리만큼 분노하는 사람이었다. 박정희가 일본의 패망에 분노하는 것은 그가 친일주의자여서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세상에 와서 이제까지, 아니 그의 명이 다할 때까지 맘(?), 몸 다해 찾아온 것이 ‘힘’이었다. ‘힘’은 아주 확실한 그의 신이었다. 일본은 그에게 더할 수 없는 힘의 화신이었다. 그는 일본 편에 선 사람이 아니라 힘 편에 선 자였다. 반면 그는 조국에의 배신자가 아니었다. 힘이 없는 나라 그것은 박정희에게 조국일 수 없었다. 버려도 문제가 될 것 없는 존재였다. 함석헌의 말을 빌린다면 그는 “‘뜻’ 밖의 사람”이었다.

‘뜻’의 사람 장준하(張俊河)

광복 전후의 그 한국 대역사(大歷史)의 때, 하늘이 낸 사람들 장준하와 박정희가 만나야 하는, 기어이 만나야 하는, 안(못) 만났다는 것이야 말로 기적이라 할 수밖에 없는 그때! 그런데 그들은 너, 나 따로 있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으니……. 하나는 뜻 ‘밖’의 사람, 또 다른 하나는 뜻 ‘안’에 있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 뜻 아과 밖을 가른 것이 바로 그 뜻 자체였다. 빈부가, 유무식이, 상하까지도 함께 할 수 있겠지만 절대로 함께 할 수 없는 것이 ‘의미와 무의미’라는 것이다. 장준하는 뜻의 추구에 목숨을 건 사람이었다. 광복 전후만이 아닌 일생을 그랬다.

광복 직전후의 두 사람을 그리다 보면 맘이 아리지 않을 수가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어찌 사람의 하나님이 ‘이런 역사’를 만드실 수 있을까?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진짜 한국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 속한 「가짜 광복군 평진대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진짜 광복군 제2지대에 장준하가 있고, 가짜 광복군 평진대대에 박정희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장준하와 박정희는 역사에의 헌신과 반역의 길로 나누어져 있었다. 박정희의 해방 직전의 일본군 작전 장교로서의 그의 형태는 이미 앞에서 언급된 터, 장준하는 그 4개월 여전 4.29일 한반도의 해방을 위한 상륙침투작전 훈련을 위해 미국방성과 공동으로 실시되는 O.S.S 특수부대로의 이동을 앞두고 장준하 자신이 창설한 「한인토교부대」에서 김구 주석의 격려를 받는다.

   
▲ ‘뜻’의 사람 장준하(張俊河)

그리고 3개월 후, O.S.S 훈련을 마치고 한국 광복군 대위의 진급과 함께 「한국광복군정진대경인지역책」으로 임명되어 한반도의 해방을 위한 결전의 날, 8월 21일을 기다린다. 이 때, 장준하는 그의 또 하나의 생명인 월간 「제단」 2호 발간을 끝내가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하늘의 뜻은 달랐던 것일까? 8월 10일 포츠담 선언에 의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선언되면서 O.S.S의 한국상륙작전은 무(無)로 끝나게 된다. 그 이후 장준하는 11월 23일 백범 주석을 경호, 임정요인 일부와 귀국하게 되고, 박정희는 다음 해, 1946년 5월 미군이 제공하는 LST를 타고 천진을 출발 부산으로 귀향하게 된다.

필자가 「함석헌,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를 쓰기 위해 몇가지 자료를 찾아가던 중, 광복 직전, 직후를 대하면서 했던 생각, 이제까지 줄곳 해오는 생각이 하나있다. ‘만일 박정희가 장준하를 그때 만주시절 함께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이 생각이 필자로 하여금 또 한 사건의 연상으로 이어지게 한다.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군 현역소장 최용덕을 중국정의의 허가를 받아 평진대대(平津大隊)의 대장으로 임명했는데, 박정희는 이 평진대대의 3중대장에 임명되었다. 평진대대란 일본군관이나 군병이었던 자들이 일본의 항복과 함께 무장해제를 당하고 갈 곳 없이 모여든 무리들의 집단이었다.

그런데 최용덕은 이 평진부대장으로 부임하면서도 비록 명색이기는 했지만 또 하나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명색의 직책이라는 것이 소위 「한인토교부대장」이라는 것이었다. 최용덕은 내심 이 「한인토교부대장」이라는 직책에 대단한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다. 동시에 백범이 그랬듯이 장준하라 이름하는 절은 청년에게 뜨거운 애정을 품고 있었다. 그 「토교부대」란 바로 장준하가 있어 이루어진 광복군 지부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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