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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의 숙명, ‘재야(在野)’<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9.30 17:06

<思想>에서 <思想界>로 (1)

창사(創社) 「한길사」

「조선민족청년단」 교무 처장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나온 장준하는 “글쓰기”를 시작한다. 생각에 생각을 더하면서 걸러지는 주제들을 담고 또 담았다. 어떤 신문사, 월 주간지 등의 원고 청탁이 있어서 만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에 있어서만은 장준하에겐 공사도, 고료(稿料) 유무도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그 글을 쓰기 위해 그 때에 온 사람처럼 글을 써 모았다.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종교에 이르기까지 글을 모으고 쓰기에, 쓰고 모으기에 심신을 다 쏟았다. 현장의 과제가 주어질 때 장준하는 전혀 문필과는 무관한 현장에의 제물로 드려지고, 일말일지라도 한가(閑暇)가 허락될 땐 글쓰기를 계속 했다. 그의 글쓰기는 정확하게 그에게 내린 천명이었고 동시에 그의 숨쉬기였다. 그리고 그 같은 주어진 삶에의 순명(殉名)은 후에 그로 하여금 「한국의 사상계」를 구축해내는데 절대의 요소가 되게 한다.

그의 글쓰기가 부단히 계속되고 쓴 글이 모아져가면서 또 하나의 일감을 이루게 된다. 이른바 「한길사」창사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한 사업에의 의욕이나 열심히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하늘의 보답이었다.

일제의 철권과 그 포화 속에서도 생명만큼이나 존엄스럽게 지켜낸 <등불> 1,2호, 장정 6천리를 맨몸으로 이겨내 기어이 찾아든 내 나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중경에서 2,3호, 토교에서 4,5호, 그리고 ‘역사와 약속한 죽음’을 훈련하는 O.S.S의 땅 서안, 여기서는 아예 그 이름까지 「祭壇」(제단)으로 개명해서 1,2호, 게다가 자신의 매일 매일을 기록한 대학노트 일곱 분량의 일기들, 실로 그것은 그가 생사를 내던져 지켜낸 「생의 존엄성」에 대한 하늘의 응답이었다 해야 옳다! 이렇듯 사선을 넘나드는 글 살림이 이제 「한길사」로, 이후에는 「사상」으로, 「사상」에서 다시 그 위대한 <思想界>(사상계)로 승화된다.

   
▲ 사상계

1948년 「한길사」를 창립하여 한해를 경영하는 동안 이윤을 창출하는 출판사로서의 경영에 거의 심혈을 기울였지만 결과는 공수를 면하지 못했다. 장준하로서도 무서운 것은 현실이었다. 글자 그대로 전전긍긍 현실의 압박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세끼를 먹기 위해 전쟁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그 시련의 한해를 접하고 다시 새해를 맞는다.

예기치 않은 조선신학교(한국신학대학의전신)편입

1949년 초 장준하는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의 동문 문동환(文童煥)을 만나게 된다. 문동환은 그에게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신학을 하라’고 권한다. 조선 신학교에 편입을 하라는 것이었다.

“장형이 일본에서 수학한 3년, 이후 임정에서의 실제로 이루어낸 새교회개척에 실제로 목회까지 하지 않았나? 조선신학교등록을 하시오. 나도 할 수 있는 대로 힘써 보겠소.”

그래서 장준하는 드디어 조선신학교 학생이 된다. 장준하가 조선신학교에 재학한 것은 한 학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한학기의 정규졸업은 장준하의 학력과 그의 일반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륜을 감안한 결과였다.

   
▲ 조선신학교(왼쪽)와 지금의 한신대학교(오른쪽)

재학기간이 한 학기 만이었다고는 하나 이미 일본동양대학 철학과에 입학 1년을 수료한 후 1942년 일본신학교(日本神學校)에 편입, 다음해 1943년 11월까지 수업에 임했으니 3년을 수료한 터였고, 특히 당시 신학교에서는 신학수업중의 교회봉사와 사회복지시설등에서의 봉사를 중요시하고 있는 터라 장준하의 졸업은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그는 돈독한 크리스챤이었다.

신성 중학시절, 신안소학교교사시절, 일본신학교 재학시절 교회 학교교사로, 순회전도강사로, 계몽요원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감행했고, 더욱 놀라운 것은 광복군시절엔 아예 목회자로서 활동한 것이다. 임천한국 광복군 훈련반원들 중의 기독자 모임을 이끌었고 중경 임정 안에서 역시 기독교 예배 모임을 주관하는 일에 힘을 쏟으면서 이미 알려진 대로 김구 주석으로부터 <장목사>라는 애칭으로 불리어진다. 김구주석이 장준하를 일러 <장목사>할 때는 애칭으로 불리어진 것이지만 그는 곧이어 실제로 한교회의 목회자로 등장한다.

장준하가 예의 그 「폭탄선언」으로 중경을 떠나 토교로 전출하면서였다. 장준하를 중심으로 50명의 대원이 토교로 옮겨오면서 새교회를 설립한다. 토고에는 여러 임정요인들의 가족들과 다수의 교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미 소문이 난 신학대학생이 왔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새교회」를 세우기로 일사천리 합의가 이루어졌고, 바로 다음 주 부터 토교 대원들의 병사(兵舍)로 결정된 마을복판에 자리 잡은 한교(韓僑) 기독청년회관의 강단을 예배처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름 하여 「토교한인교회」. 그 토교한인교회목회자가 장준하였다. 이 장준하의 조선신학교편입을 학교당국에 강력히 요청한 것이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문동환 학우였다. 장준하의 편입서류들을 만든 것도 역시 문동환이었다.

특히 장준하의 졸업반 편입에 학장을 비롯한 관계 교수들의 합의를 쉽게 도출하게 한 것은 장준하가 작성하여 「세계기독교연차대회」에 제출한 「1945년 한국기독교실태보고서」였다. 이는 「세계교회협의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요청한 것을 주석김구가 장준하에게 맡겨 작성케 한 것이었다. 후에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학교, 필자주)으로 개명되는 조선신학교는 어쨌든 참 좋은 선택을 한 바 되었다.

이 장준하와 조선 신학교, 조선신학과 장준하의 관계에서 우리는 좀 더 아름다운 정경을 주목하게 된다. 장준하가 의문의 죽음이 아닌 ‘한의 죽음’을 하고 간 그 열여덟해 후(1993), 「한신대」에서 재정한 제1회 「한신상」이 수여된 것 말이다.

장준하를 배출했다는 것은 한신으로서도 큰 자랑으로 여겨지는 사실이겠지만 장준하 역시 그 조선신학교의 출신이라는 사실이 이후의 자신을 세워 가는데 전기(轉機)까지는 아니라 해도 깊은 근을 이루게 했다. 조선신학교를 졸업했다는 사실에서만이 아니라 이후 해를 더해 갈수록 한신의 교단에 나타나는 지도적 인물들을 주목하게 되면서 더욱 그랬다.

제도권 度圈)내에서의 삼년

열아홉살의 함석헌은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 평양고보 4학년이 되는 해 학교를 자퇴하고 물러나오면서 “나는 이후 관(官) 짜는 원수가 되기로 했다”고 선언한다. 함석헌이 말하는 ‘관’이란 ‘국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함석헌이 말할 때의 그 관, 그 국가란 일본을 두고 한 것이었지만 그 속성에 있어서의 국가란 일본과 조선이 다를 것이 없다. 국가를 <야만집단>이라 할 수는 없겠지만, 또 그래서도 안되겠지만 국가가 야만의 최근거리에 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장준하가 조선 신학교를 졸업하는 1949년이 가고 새해가 밝았다. 어느날 문교부장관비서실로부터 전화가 왔다. 문교부장관으로 임명된 백낙준의 명(命)이 실린 전화였다. 백낙준의 장준하의 호칭이 장비서였다. 백낙준이 장준하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 경교장의 비서시절이었기 때문이었다.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의 환국은 일제 치하에서 울분의 삶을 살던 국민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임정에의 관심은 김구가 있어 배가 되고 있었고, 모든 언론들을 통해서 보도되는 <경교장의 소식>들은 장준하라는 청년공보비서를 통해서 제공, 전달되는 것이었다. 물론 김구를 비롯한 임정요원들의 의사가 반영되는 것이었지만 장준하의 손을 통하는 격조 높은 경교장의 발표문들이 「서울경성대학」(서울대학의 전신. 필자주)의 법문학부장 백낙준의 주목을 끓었다. 어느 날 백낙준은 백범을 찾아  뵙겠다며 경교장을 찾았다. 대맞춰 백낙준을 영접한 것이 장준하였다. 사실 백낙준은 김구보다도 장준하를 맘에 두고 방문한 것이었다.

   
▲ 백낙준(白樂濬, 1895.3.9~1985.1.13) 1950년부터 1952년까지 문교부 장관을 맡아 한국전쟁 중의 교육문제 해결에 진력하였다.

백낙준은 자신을 맞아주는 이 젊은이가 바로 장준하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백낙준은 장준하의 이력까지를 꿰고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것, 더군다나 자신이 친히 알고 지내온 모교 신성중학(信聖中學)의 후배 장석인의 아들이자 그 역시 신성중학의 졸업생이라는 것, 그리고 일본신학을 거쳐 일군에 지원, 그 이후 일군의 탈출에서부터 해방과 더불어 김구 주석을 경호하고 환국하기까지를 읽고 있었다.

“음, 장비서로군!” 첫 마디가 그랬다. 사람이란 묘한 동물이다. 그렇게 한번 만난 백낙준과 장준하는 조건 없는 동지가 되어 갔다. 이후 백낙준은 안으로 밖으로 장준하가 기댈 튼튼한 벽이 되어준다. 이렇게 해서 백낙준은 서울경성대학에서 연희, 연세대학의 총장을 거쳐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하면서 바로 이어 장준하를 문교부의 중진공직에 특채한다.

장준하는 백낙준의 호의에 감사하면서 대한민국 행정부에 투신하게 된다. 즉 제도권 사람이 된 것이다. 1950년 3월부터 1953년,3월까지 만 3년, 장준하는 제도권의 공직생활에 헌신했다. 그것은 장준하의 그 이후 죽을 때까지의 그의 생에 걸맞지 않은 것이었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장준하에게 「황금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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