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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천정을 찢으라<정중규 칼럼> 성공회 정동성당과 천주교 명동성당
정중규 | 승인 2015.10.07 14:37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복음 4,18~19)

나자렛 회당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돌아가실 때까지 당신 사명을 수행하신다. 아침이 되면 갈릴리 호숫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장애인들에겐 치유 행위를 펼치셨다.

중풍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마르코복음 2,1~12)도 그 하나다. 카파르나움 어느 집에 그분이 계신다는 소문이 퍼지자,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마침 누군가가 들것에 중풍 병자를 싣고 데려왔는데 군중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갈 수가 없자 지붕을 벗겨 들것 채로 내린다. 그분 앞에 당연히 치유 받은 장애인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실어왔던 들것을 들고 귀가했다는 해피엔딩 이야기다.

그런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 그분의 교회가 병자들이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 낮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시대 갈릴리 주택 구조가 흙과 짚을 엮어 지붕을 만들만큼 허술해서였다지만, 내게는 교회의 개방성과 수용성 그 이미지로 다가온다.

   
▲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 낮고도 낮았다” - 중풍병자를 고치는 예수. 13세기경, 터키 이스탄불 벽화.

6월항쟁의 꿈을 잊지 않고 담을 허무는 정동성당
 
마침 며칠 전 서울시청에 업무 차 들렀다 맞은편 대한성공회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을 찾았다. 잔뜩 흐린 잿빛 하늘 아래서도 단아하고 고풍스러운 자태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제껏 정동성당을 가렸던 서울지방국세청 남대문 별관 건물이 철거되면서 큰 길에서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온 것이다. 서울시가 광복 7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세종로 일대를 역사문화특화공간으로 지정하면서 철거가 시작돼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근원지’라는 표지판에서 보듯, 민주화와 함께 했던 정동성당. 일제 잔재가 철거된 그 빈자리를 4.19 학생운동을 회상하게 하고, 6.10 민주항쟁을 기억하는 장소로 시민들에게 제공하겠다는 취지가 각별했다. 사회정의를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교회의 선택적 과제가 아니라 사명이라고 여기면서 사회정의와 민주화,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성공회의 방침은 교회의 개방성과 수용성을 지향한다는 차원에서 고무적이다.

   
▲ 재개발 공사가 진행 중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명동성당 (사진출처=천주교 서울대교구 홈페이지 갈무리)

6월항쟁의 흔적을 지우며 재개발에 몰두하는 명동성당

이런 움직임은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또 다른 주역 명동성당의 최근 움직임과 대비되지 않을 수 없다. 몹시도 뜨거웠던 6월 그날, 명동성당으로 피해 들어와 농성 중인 학생들을 전두환 정권이 진압하려들자 김수환 추기경이 나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단호하게 맞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그 때 그 시절 명동성당은 정동성당과 더불어 우리 사회 민주주의와 인권 수호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그런 명동성당이 지금 2029년까지 관광특구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킨다는 야심찬 목표 아래 재개발 사업에 몰두하고 있다. 총 1만 평이 넘는 대형건축물로 인한 문화재 훼손 같은 역사 파괴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70년대 이후의 명동성당 그 정신에 대한 훼손이다. 소외된 이들의 피난처였던 명동들머리를 화단으로 꾸민 것에서 박근혜 정부가 대한문 앞 천막농성장을 화단으로 바꾼 것이 연상되고, 명동성당 신관 복합쇼핑몰 ‘1898 Myeongdong Cathedral’을 둘러볼 때마다 두꺼운 붉은 벽돌이 가난한 이들의 소리를 차단하는 방음벽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낮은 곳으로의 내려감과 낮은 이들과의 연대를 잃어버린 언덕 위의 교회, 그 높은 언덕 위로 낮은 곳의 신음소리가 올라갈리, 낮은 곳의 비참함이 보일리 만무하다. 그렇잖아도 언덕 위에 서 있는 명동성당이 견고한 건물과 더불어 개방과 수용에서 더욱 까막눈 되어버릴까 안타깝다.

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 낮고도 낮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분리와 성별의 유대교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교의 선교는 개방과 수용이었다. 그분은 분리와 성별의 벽을 허무셨다. 가장 소외된 이들이 사는 변두리,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도 그러했다. 탄생만이 아니라 그분의 공생활 자체가 끊임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강생이었다. 자리가 중요하다. 자리가 자세를 낳는다. 자세가 마음을 결정짓는다. 평생을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예수의 그 마음에서 교회가 탄생했다. 교회가 설 자리가 낮은 곳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은 다리가 짧아 높은 문턱을 넘을 수 없다. 그래서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사하라에서 토착민들과 함께 살 때 짐승은 못 넘어도 사람은 넘을 수 있게 나지막한 울타리를 쳤다. 가난한 이들은 그렇게 문턱이 낮아야 마음 편히 들어올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병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 낮고도 낮았던 이유다. 그렇게 천정이 뜯긴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은 삶의 용기를 얻고 벌떡 일어나 바깥세상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아갈 수 있다.

다시 교회는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이 시대 어느 교회가 자신의 천정을 찢으면서까지 사회의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것인가. 지금 우리 교회에 “너의 죄는 용서 받았다”는 격려를 받고 가난한 이들이 용기를 내며 다시 일어설 텃밭이 마련되어 있는가.

프란치스코 교황은 방한 당시 한국천주교주교단과의 만남에서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에서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유혹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고, 미국 의회 연설에서는 “시리아 난민들의 수에 놀라 물러서지 말고,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고,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라” 호소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아이콘택트 할 수 있으려면 우선 교회 스스로 그들과 같이 가난해져야 한다. 교회가 가난해져야 함은,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더 옳고 참되고 성스러워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래야만 비로소 옳고 참되고 성스러움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 “교회는 사회 한복판에 참여해야 한다”(89항) 했을 때 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그 ‘한복판’ 중심부는 세속적 관점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도시의 끝, 성문 밖 최변방에 또 다른 중심부를 만들라는 것이다. 홀로만 높고 깨끗한 언덕 위의 하얀 집에서 벗어나 세상 한복판 가장 낮은 곳 소외된 이들이 사는 진창에로 내려가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을 하기 위해선 그 어떤 것도 기꺼이 제쳐놓을 있을 때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다.

물론 교회도 사회 속에 존재하기에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겠지만, 대조사회(對照社會)로서의 교회라면 늘 “예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신다면”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문제를 근본에서부터 통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세족례에 재소자와 여성과 무슬림을 초대하고, 동성애자와 이혼과 낙태 문제 등 무엇이든 근본에서부터 새롭게 다시보기를 시도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눈길이 바로 그러하지 않는가.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도그마가 교회보다 먼저 있은 것이 아니었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 나래를 편다”할 때 그것은 철학에 대한 것이지만, 신학과 도그마도 그러하다. 하늘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이 먼저 있고 나서 교회가 만들어졌고 그 재료를 들고 주무른 것이 신학자들이었다.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 아니라 예수운동을 펼치셨고 거기에 생명을 바치셨다. 그 피 묻은 몸에서 교회라는 꽃이 피어났다.

   
▲ 국세청 별관 철거로 전경이 개방된 대한성공회 주교좌 정동성당 @지유석

성찰과 반성을 담은 성공회 125주년 비전 선언문

성공회는 ‘125주년 비전 선언문’에서 남북 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적극적 행동, 사회 양극화 해소를 위한 사목적 방향 설정, 종교인의 사회적 책무인 미래세대 육성, 하느님의 창조질서 보존을 위한 자연파괴 저항,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교회의 우선적 선택 등을 담았다. 교회를 가리고 있던 건물 철거로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정동성당. 교회의 담을 낮추는 것이 교회로서는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기에 시민들에게 무엇을 보여줄 지 고민이 되지만, 거꾸로 담 너머 있던 세상을 더욱 훤하게 바라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기는 정동성당.

성공회는 이를 계기로 교회의 본분에 맞게 모든 이에게 담 없이 열린 교회로 지내왔는지, 사회적 약자에게 나눔을 실천했는지, 교회 안팎으로 들리는 여러 가지 아픈 소리를 듣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일에 충실했는지 등을 성찰하겠다고 밝혔다.

명동성당이 다시 명동성당다움을 되찾게 되기를

명동성당에서도 그런 바램(願)이, 그런 바람(風)이 다시 일어나기를. 명동성당에서도 '명동 비전 선언문'이 나오기를. 명동성당이 정동성당처럼 담을 낮추고 시민들께 다가서기를. 명동성당이 보기 좋고 아름다운 교회 성전이 아닌 사회 밖의 모든 아픔을 향한 연민과 연대의식으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며 아파하고 슬퍼하고 울음 울며 다시 사람을 성전으로 모시기를.

명동성당이 세속주의 천박성에 점령당한 교회의 안마당에 복음적 영성의 깊음과 높음과 넓음의 숯불을 다시 피어내기를. 명동성당이 정의로움과 자비로움을 추구하며 개방과 수용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곳이 되기를. 그리하여 예수의 교회처럼 천정이 찢어지고 열리면서 명동성당의 명동성당다움을 되찾는 성령강림이 일어나기를.

   
 
<필자 소개>

정중규
대구대학교 한국재활정보연구소 부소장이자 정책네트워크 내일 장애인행복포럼 대표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고 있다.
 

정중규  mugeou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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