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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의 숙명, ‘재야(在野)’<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 승인 2015.10.08 16:26

<思想>에서 <思想界>로 (2)

장준하는 「재야」(在野)를 숙명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고, 또 그렇게 살고 간 사람이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제도권(制度圈)내에서 살 수 없었던 것은 그 안에 그의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았던 솟구치는 <참>의 불 때문이었다. 이후에 말해지겠지만 그가 형(形)에서 질(質)에서 현실적인 정신적인 지향노선에서까지 달랐던 사람 함석헌(咸錫憲)과 1955년 늦겨울 처음만나 그 비운(?)의 죽음을 맞은 1975년 8월 17일 그날까지 하나의 원체(原體)처럼 살다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색깔은 달라도 두 가슴속에 꺼질 줄 모르고 피어오르는 <참의 불길> 때문이었다. 어쨌든 장준하에게 백낙준은 큰 그늘 이었다.

장준하가 서기관이라는 쉽지 않은 공직에 임관되어 문교부의 「국민정신계몽담당관」의 직무를 수행해오는 3년 동안 국가에 대한 고마움, 관(官)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기도 했다. 필자는 지난주의 칼럼에서 장준하의 이 3년을 또 다른 의미에서 「황금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생(生) 자체를 절대의 선물로 확신했던 장준하에게 생의 흑암기니 황금기니 하는 말 들 자체가 어울리지 않은 것들이었지만 굳이 필자가 그 3년을 황금기였다고 말하는 것은 장준하의 독자들이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장준하가 “국가(國家)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든가, “관(官)에 대한 고마움을 느꼈다”든가 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힐문(詰問)하는 이들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었다. 장준하가 이제까지의 그 생(生)에 있어 느껴본 적이 없는 그 고마움이란 전적으로 백낙준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었다. 백낙준은 장준하에게 있어 백범과는 그 유형이 다른 지도자였다. 백범이 장준하에게 범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지도자라면 백낙준은 장준하로 하여금 더러는 길동무 같은 “친구”를 느끼게 하는 이 었다.

장준하로 하여금 더욱 백낙준을 고맙게 여긴 것은 “인격”으로서의 장준하에 대한 대접이었다. 백낙준은 한 번도 장준하의 의견, 건의, 요구를 ‘안돼’ 하는 적이 없었다. 오히려 뜨겁게 공감하고 뜨겁게 지원했다. 모든 걸 장과장이 장국장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은 결코 아니었다. 이처럼 전적으로 일임, 위임하는 상사에 대한 장준하의 태도 역시 자신이 그렇게 하리라 해서가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헌신적이 되어갔고, 그렇게 자신을 드려가면서 백낙준만이 아닌 국가가 관직이고 미워 간 것이다.

이같은 백낙준과 장준하의 <인격적 관계>의 스토리가 우리들 모두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참 애국, 참 애민(愛民) 이야말로 법령이나 규범 따위에서가 아닌 사람 그대로의 참 인격적 대접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메시지 말이다.

장준하가 속한기관의 명칭이 「국민사상연구원」(國民思想硏究員), 자신의 직함이 「국민정신계몽담당관」이다. 국민사상연구원의 기본과제를 부단히 구상하여 문서화하고, 무엇보다도 민족이 분단된 상황에서 공무원들의 사상적, 이념적 정당성의 확보를 위한 담당관으로서의 작업에 심혈을 쏟던 중 6.25전쟁이 발발, 부산으로의 피난수도 생활을 하게 되면서 장준하의 공직생활은 더욱 바빠져 간다. 전란 속에 있는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로하고, 지난(至難)의 생활 속에서 일망정 더불어 살아가는 의기를 키워나갈 수 있도록 불철주야 쉴 줄을 몰랐다.

   
▲ 잡지 <사상계>

하늘은 일을 사랑하는 자에게 그 일 이후에 있을, 있어야 할 일을 제공한다. 선천적으로 체질적으로 장준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이 부러워 하리만큼 일을 이루어 갔다. 게다가 백낙준의 “전시에도 교육은 멈출 수 없다”는 교육지침, 행정지침이 일의 사람 장준하를 더욱 고무시켰다. 그래서 이루어진 것이 공무원의 세계만이 아닌 전시 중의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월간 「思想」의 발행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정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국민사상연구원」의 회지(會誌)였다.

국민사상연구원 안에 편집진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 발행에서 처리까지 연구원안의 과제여야 했지만 「국민정신계몽운동」이 장준하에 의해 장악되면서 그 편집도 업무도 전혀 다른 길을 열어갔다. 그것은 백낙준의 자원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국민사상과 정신진흥”을 위한 과제라면 자신이 간섭하는 것보다는 그 시종을 장준하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 보다 확실하고 효율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백낙준에겐 장준하가 있어, 장준하에겐 백낙준이 있어 「국가」라는 체제 안에서도 그 같은 과제수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전쟁 중에서도 ‘사상’을 생각하는 사람

백낙준의 이와 같은 자신에 대한 대접에 장준하의 그 대응역시 명쾌했다. 전시 중에서도, 전란 속에서도 「思想」을 생각하는 사람 장준하는 편집은 자신이 전담을 하고 업무와 영업을 맡아줄 사람으로 서영훈(후에 흥사단 이사장·적십자사 총재 역임)을 택했다. 평소 지극한 기독교 신앙과 정직과 신실을 생의 지침으로 해온 신우의 관계가 잡지 「思想」 아래서 손을 잡게 했다. 잡지에 대한 여론의 평가는 대단했다. 피난수도에 모여든 지식인들에게 보여진 사상계는 그야말로 더할 수 없는 위로요, 갈한 목에 청량수였다.

잡지 「思想」은 2, 3호를 계속하면서 영업의 측면에서도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다. 3호가 나간 후에는 학계의 상당한 저명인사들 중 고료와 관계없이 투고를 해오는 이들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것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은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잡지를 읽어본 시민들은 그야말로 환호를 보냈고, 글재주있는 교수들이 무고료의 투고를 요청하고 있는 「思想」이 바로 경무대로부터 날아든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경위는 이랬다. 영업팀장 서영훈이 이화여대의 고형곤(高亨坤·전 국무총리 고건의 부친)을 찾아갔다. 잡지 3월호의 원고 청탁을 위해서였다.

고형곤은 지인 서영훈의 원고청탁에 쾌히 응했고, 뿐만 아니라 이미 「思想」 1, 2호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은 터여서 이후 사상계의 경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손으로 여겨지는 같은 대학의 한 여학장을 서영훈과 친히 함께 찾아 소개해주기 까지 했다. 고형곤은 돌아갔고, 서영훈은 소개받은 여학장과 마주앉았다. 이 여학장이 다른 사람 아닌 이미 이승만의 분신이 되어있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 라는 것을 서영훈이 알턱이 없었고, 그를 소개한 고형곤 역시 그 「思想」의 정신적 지원자가 박마리아의 남편 이기붕과 이승만 휘하의 라이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서영훈은 그저 좋은 후원자를 얻었다는 생각만으로 그 여학장이 묻는대로, 또 묻지 않는것가지 마치 「思想」의 운영보고라 하리만큼 자세한 보고(?)를 했다. 그런데 서영훈의 보고에 박마리아의 심기를 뒤집어놓은 것이 바로 그 “백낙준의 정신적 후원” 운운이었다. 이후 「思想」은 적어도 사업체로서의 존재만은 접어야 했다. 백낙준이 후원자로서의 그 손을 접는다 해도 다를 것이 없었다.

서영훈은 잡지「思想」에 몸을 담으면서도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만은 장준하의 「思想」과 함께 하리라 했다. 그런데 일이 잘못돼도 너무 잘못돼버린 것이다. 평소 장준하의 인물됨에 깊이 감동하고 있는 서영훈은 직장으로서 「思想」 보다도 장준하가 하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개의치 않으리라 했다. 이화여대로 고형곤을 찾아간 것도 그래서였고, 또 그 고형곤을 통해 박마리아를 만난 것도, 그 박마리아를 만나 잡지 「思想」의 주필 장준하를 자신이 아는 그대로 소개한 것도 그리고 더 나아가 잡지 「思想」의 정신적 후원자가 문교부장관 백낙준이라고 까지 이제까지 있어온 사실을 말했던 것인데, 이 마지막 소리가 화근이 돼버린 것이다.

   
▲ 이승만, 프란체스카 부부와 이기붕, 박마리아 부부(오른쪽에서 두 번째)

경무대, 「思想」은 안돼

그 여학장 박마리아는 한국정치에 특심을 품은 사람이었다. 남편 이기붕은 일찍이 서울시장을 거쳤고(1949-1950), 지난해(1951)는 국방장관을 거쳐 같은 해 이범석과 함께 자유당을 창당해낸 둘째가라면 얼굴을 붉힐 만큼의 철저한 이승만맨 이었다. 이기붕의 이 같은 전역은 시종여일 박마리아의 작품이었다. 그는 자신의 남편이 이승만의 제물이 되어 감을 무엇보다 기뻐하는 여인이었다. 박마리아에게는 꿈이 있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자신의 남편 이기붕으로 대통령 이승만의 후계를 잇게 하는 것. 자도 깨도 그녀는 그 꿈에서 깨어날 줄을 몰랐다. 전쟁 중의 국방장관이라는 꿈을 접고 1951년 광복시절 이후부터 자유당을 창당하는 일에 전념케 한 것도 박마리아의 고도의 전략이었다. 8.15 광복절에서 “애국신당을 조직하라”는 이승만의 발언을 명(命)으로 받든 것이다. 그것이 자신에게 달라붙는 ‘죽음의 그림자’라 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백낙준? 흥 백낙준이라니…”
박마리아는 경무대로 올라갔고, 후란체스카에게 이 「思想」에 대한 불경(?)스러움을 간언(諫言)한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 사실을 꼭 파파께 말씀을 드려주셔야 합니다” 잡지 4월호의 출판을 앞두었을 때다. 며칠 후 장준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백낙준 문교부 장관이었다.
“장국장, 장관실이 아닌 내 집으로 지금 좀 오게나”
장준하는 직감이 있었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수없이 사선을 넘나들면서 얻은 체감이었다.

“내가 어제 경무대를 다녀왔어…” 백낙준이 하는 말이었다.
“……”
“그 「思想」 안 된다는 거야. 대통령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이야…”

어쩔 수가 없었다. 백낙준은 이기붕의 적수로 인식되어있고, 그가 후원하는 잡지의 주간은 이승만의 정적이었던 김구의 비서라니…. 실로 그것은 악수만 엉켜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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