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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張俊河)의 숙명, 재야(在野)<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10.15 15:09

<思想>에서 <思想界>로 (3)

“장 국장(장준하는 당시 「국민사상연구원」의 사무국장이었다. 필자 주), 오히려 내가 미안하게 되었소. 정말 힘을 모아 나라를 위해 뭔가 좋은 일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새 일을 찾아보도록 하자고.”

장준하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다행히 발행 3호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독자들의 예상 밖의 뜨거운 반응과 격려까지 더해져 정말 한번 기(氣)를 펴보려던 참이었는데…….

“장관님, 오히려 정말 제가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잡지의 운영에 사면을 잘 살펴야 했었는데,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 동안 여러 모양으로 <思想>을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오히려 이번 일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고 장관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새 일을 찾아가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장준하는 백낙준 장관의 사저를 돌아 나오게 되었고, 그 이후에도 어려운 길목에서마다 백낙준은 장준하의 귀한 손이 되어 주었다. 장준하가 백낙준의 사저를 돌아오는 그때, 그가 그렇게 사랑하며 혼을 쏟던 <思想>도 함께 숨을 거두고 있었다.

   
▲ 사상계 시절의 장준하. (장준하기념사업회)
난관(難關)에 감춰진 역사(하느님)의 비의(秘意)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서영훈-고형곤-박마리아 그리고 이승만으로 이어지는 월간 <思想>의 사건은 인간 장준하에겐 더할 수 없이 자랑스러운 미래에로의 가교가 되게 한다. 백낙준 집을 돌아 나올 땐, 그 의기의 사내 장준하도 별 수가 없었다. 분하고 억울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

몸통을 조국에 바쳐 살자했던 나, 조국이 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 것인가? 그래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무얼 해야 하는 것인가? 그는 지금 「국민사상연구원」의 사업국장이다. 실제로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고 있는 국가 공무원이다. 제 생각을 딱 덮고 「국민사상연구원」 운영에 충성하면 살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장준하는 그럴 수 없는 사람, 죽어도 제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思想> 4호는 그 사이 발행이 되어 사랑하는 아내 김희숙과 함께 리어카를 이용해 시내 요소의 서점에 이미 배포를 마쳤고, 지금 자신의 책상 위엔 제5호, 그러니까 1953년 신년호를 위해 어렵디 어렵게 받아놓은 원고들이 쌓여 있던 터!

“자, 잡지는 이제 못내게 됐고, 그럼 받아놓은 원고는 어떡한다?”, “원고를 돌려줄 수는 없다. 버릴 수는 더구나 없다.” 그렇게 한 밤을 지새우고 난 장준하는 결단을 한다. “이제 내 손으로, 정말 내 손으로 잡지를 낸다.”하는 결단이었다. 믿음의 결단이었다면 그것은 결코 장준하의 결단은 아니었다. 그를 역사의 중심에 역사의 사람으로 이끌어 내려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였다. 이후 형언하기 어려우리만큼의 고난(苦難)의 한국사(韓國史)와 함께할 미래가 장준하를 찾아준 것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나, 내가 한다. 내가 할 것이다.” 이 결단 후, 장준하는 자신을 훌쩍 뛰어넘어 미래로 간듯했다. 그러나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잡지 발행은 고사하고 <思想>이라는 그 잡지의 이름마저도 자신이 사용할 수 없는 법 치하에 있음을 장준하는 모르고 있었다.

   
 
당시 잡지 <思想>은 몇가지 행정상의 이유로 국회의원 이(李) 모씨로 잡지의 발행인을 대행하게 하고 있었고, 잡지의 판권 역시 그의 소유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잡지를 문교부 산하기구로부터 독립하여 자주하는 <思想>으로 발행키 위해 판권을 회복하려 하는 터에, 이 씨의 판권 포기 거부로 장준하는 하는 수 없이 원래 잡지 「思想」에 ‘界’자 한 자를 더하여 「思想界」라는 이름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思想界」라는 이름의 「판권 등록증」을 수령하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미 헌병대에서 관장하고 있는 한강 도강증을 발급받아야만 다녀올 수 있는 서울을 두 번 씩이나 오르내려야 했고, 처음에는 말이 없던 「은행잔고증명」을 요구 받았을 땐 천지가 아득했다.

갈 곳이 백낙준 밖에는 없었다. 그때 백낙준은 바로 그 장준하의 <思想>이 문제가 되어 그 자신도 문교부 장관직을 사임하고 은인자중하고 있는 차였다. 그런 줄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을 찾은 장준하를 대하는 백낙준은 ‘꺾이지 않는’ 장준하를 오히려 치하하며, 친히 알고 있는 한 실업인에게 부탁해 장준하 명의의 80만원 잔고의 통장을 만들어 그 잔고증명을 갖추게 해주었다. 게다가 적지 않은 액수의 자금 일부까지 얹어 잡지의 발행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 「思想」을 「思想界」로 바꾸어 발행, 배포, 판매, 수금까지의 전 과정에 당시 국내 최대의 잡지사였던 「리더스 다이제스트」 사장 이춘우(李春雨)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춘우는 자신의 친우를 통해 장준하를 소개 받았지만, 후에 장준하를 자신에게 소개해준 친구보다도 장준하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루게 된다. 이춘우가 자선에 가까울 정도로 장준하를 돕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얼굴 생김은 틀림없는 부잣집 옥동자인데, 하는 것을 보면 또 영락없는 머슴이었습니다.” 박마리아의 사주(使嗾), 경무대의 엄명(?)으로 「思想」이 깨지면서 참으로 억울하게 장준하 곁을 떠나게 된 서영훈은 장준하가 비명에 간 후 그를 기리는 그의 추모집 「민족혼·민주혼·자유혼」에서 그 때의 장준하를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참으로 뜻 밖의 일이어서 놀라기도 했고, 화도 났으나 답답하고 죄송하기 그지 없었다. 그러나 장주 간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고, 나를 위로하며, 일단 <思想>지는 편만하지 않을 수 없으나 후일을 기약하고, 재기하면 된다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참으로 냉철하고 침착하며, 철저한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초지를 관철하는 의지의 사람이요, 신념의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흥분이나 비분강개나 허장성세 같은 것이 없었다.”

어쨌든 다시 시작되는 사상계의 그 ‘界’자는 이전의 제호 「思想」의 서체의 제공자인 오홍석(吳紅錫)의 꼭같은 체로 덧붙여져 1953년 4월호를 그 창간호로 감히 한국현대사에 민주주의의 최선보(最先步)를 내딛게 된다. 외형으로는 갈라진 것은 그 「思想」에서 「思想界」로 글자 한 자 더한 것이었지만 그 변화의 이면에는 1975년 8월 17일, 한국현대사 속의 민주주의를 위해 일체의 헌신한 민주 조국의 지도자로서 장준하가 그 사랑해마지 않던 조국을 숨져 떠나는 날까지 그의 생의 장도(長途)에 거룩한 성소(聖素, Holy element)로 흘러나게 된다.

그 성소(聖素)란 관(官)에서 민(民)으로, 제도권(制度圈)에서 시민권·민중권(市民圈·民衆圈)으로의 끊임없는 도약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 장준하가 하늘로부터 입은 은혜였다. 장준하가 이후 자유당의 이승만 독재 치하에서 거룩한 싸움을 싸우며, 4.19혁명의 불길을 불을 붙여대기까지의, 5.16군사쿠데타 세력과 민주·민족·자주혼의 선각자로서의 싸움은 관보(官報)의 성격을 벗어날 수 없는 「思想」으로서는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다.

후에 그 ‘박정희의 천적’이니, ‘재야의 대통령’이니 하는 역사적인 별칭은 「思想界」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만약 장준하가 운이 좋아(?) 백낙준과 함께하는 세월을 살았다면 후에 씨알사상, 씨알철학의 창도자로 새 사상을 세계에 제시하게 되는 함석헌과의 조우는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 그것은 「思想」이 아닌 「思想界」로만, 관(官)이 아닌 민(民), 제도권이 아닌 민중세상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思想」을 이승만에게 빼앗겼던 장준하의 서러움, 그것이 후에 한국민중사의 봉화가 되는 「思想界」로 웅비하게 된다니…….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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