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8일 일요일, 비
앞산, 뒷산, 양편의 솔숲에도 소리 없이 비가 온다. 조용조용 내려 단풍잎 얼굴에는 고운 물을 들이고 앞산에는 골안개로 하늘하늘 너울을 드리워주면서 바람결 따라 그 자태를 뽐내게 해 준다. 휴천재 창밖을 내다보면서 제일 많이 하는 소리가 “참 좋다.”(신음에 가까운 어조로)라는 말마디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는 구절이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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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에 공소예절에 갔다. 거의 5개월만이다. 공소 화단은 주인 없이 몇 해를 보내 함부로 자라오른 풀들이며 다 진 꽃들이 사방으로 쓰러져 있다. 내 집이라면 아무도 저리 버려두지 않겠지만 누구도 저 공소의 주인 되려 하지 않는다. 떠나간 수녀님 생각이 많이 난다.
공소예절에 김교수댁 손님들이 함께 와서 자리를 채웠지만 쓸쓸한 표정들은 늦가을 풍경이다. 주일미사에 설교하는 신부가 “장례식에서 갓 돌아온 사람”의 표정이고, 미사 끝나고 성당을 나오는 신자들 얼굴이 “일년내내 사순절 재계지키는 사람들” 얼굴이니 "어느 누가 그리스도교에 매력을 느끼고 성당을 찾아오겠느냐?"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탄이 떠오른다. 우리도 복음 말씀이 기뻐서 그걸 들으러 성당 간 게 아니라 그냥 주일이어서 성당 나가는 본분 땜에 나왔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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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하도 자주 비운 다음이어서 종일 아래층 식당과 부엌을 청소했다. 보스코가 한데 모아 들고 내려온 쓰레기 봉지가 서너 갠데 함께 뒤섞어놓은 것들이어서 일일이 다시 쏟아 분리수거를 해야 한다. 그 일이 더 힘들다. “왜 남자들은 쓰레기를 분리할 줄 모를까?”
언젠가 본 영화에서 온통 쓰레기와 폐가구로 가득 찬 집을 무대로 얘기가 꾸려지는데 여자인 나는 구역질이 나 죽을 지경인데 보스코는 무척 재미있어 하던 일이 있다, 엄마가 없으면 애들이 집을 저렇게 해 놓고 살고 싶을 거라면서. 그는 영화를 끝까지 보았고 나는 화면에 속이 부글거려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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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다 잠시 하늘이 벗겨지기에 보스코에게 두 가지 일을 시켰다. 텃밭의 울콩을 따는 일과 감동 옆의 대봉시를 따는 일. 울콩이 빗물을 받았다 해가 나면 깍지가 터져버린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그가 빨래 소쿠리를 들고 내려가 사다리를 옮겨가면서 하나 가득 따왔다. 삼년 전 몇 알 심은 적 있고 그 뒤로는 저절로 싹트고 자라고 배나무를 온통 감고 올라가 콩이 열리곤 하니 불로소득이다.
감나무는 병이 들어 해마다 죄다 꼭지가 뻐지고 말았지만 금년에는 봄에 규소 비료도 주고 퇴비도 주었더니만 그래도 서른 개 가까이 남아서 붉게 익었고 물까치떼가 극성스럽게 파먹는 중이다. 감나무도 약을 안 치면 감농사 망한다고들 하는데 약을 치지 않고 거름으로만 해결할 작정이다. 덜 먹더라도 약은 치지 말자는 우리 고집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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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댁이 양파모종을 갖고 올라왔다. 엊그제 드린 품삯이 과하다 여겼는지 한길 가 송전댁 밭에서 남은 모종을 챙겨들고 올라온 길이다. 모종 값을 달래니까 나더러 갖다 주란다. 보스코가 울콩을 따는 동안 둘이서 앉아 심으니 한 두럭 반은 채웠다.
한 두럭은 도정 체칠리아 몫이다. 체칠리아가 곶감 깎는 일로 바빠서 대신 해준다. 시골에 살다보면 농사도 시간이 남는 사람이 대신 해 주는 인정이 있어 나도 남의 덕을 많이 본다. 저 양파를 내가 차지해도 어디 나가서 팔 것도 아니고 한 자루면 우리 두 식구 한 해 먹고 남으니 캐서 주나 밭 째 주나 남 주기는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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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내 엄마 집에서 돌아오다 미산리 저수지 아래 은행나무 밑에서 주워온 은행들을 씻고 벗기고 손질해 쟁반에 널어 말린다. 겨우내 심심풀이로 구워먹을 은행 알이다. 저녁식사 후 한 옹큼 구워서 보스코랑 나눠먹었다. 지금부터는 초겨울 산속 다람쥐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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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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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대300에 씁쓸해 하는 동료들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