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8일 일요일, 맑음

정부에서는 국도 3번 왕복 4차선 도로를 생초 앞으로 뚫겠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나다니는 차량이 너무 많아진다고 반대해서 차선은 딴데로 뚫렸다. 성심원 미사를 갈 적마다 새로 뚫린 자동차전용도로로 쌩~하니 달린다. 예전의 국도는 구불구불 생초 어탕집들도 지나고 피라미 튀김집도 보여 지나가던 사람들이 차를 세우고 출출한 배를 채우기도 했는데 이제는 인가도 차도에서 안 보이므로 어탕 한 그릇 먹자고 자동차 전용도로를 내려서 마을로 들어가려면 여간한 식도락 아니고선 안 된다.

속도는 사람들을 더 빨리 더 멀리 달리게 만들지만 인간 사이를 그만큼 멀러 떼어놓는다. 내가 그 찻길에서 유일하게 사람을 만나는 곳이라곤 새로 생긴 주유소, 두 아줌마가 번갈아 주유를 해 주는 집이다. 워낙 손님도 없고 카드 수수료를 걱정하는 분들이어서 일부러 현금을 지불한다. “여자끼리 힘내세요!” 하면 주인은 1000원을 빼주면서 “만난 거 사 잡수세요.” 한다. 자동차전용도로에서도 이렇게 인정이 있고 피가 흐른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대림절 첫주여서 찐보라 제의에 대림초가 켜져 있다. 오늘도 유신부님은 깊이 있는 강론을 하시는데 서양 사람의 우리말은 귀에 잘 안 들어온다. 보스코는 어려서부터 서양신부님들 밑에서 자라 저런 말들을 잘 알아듣는 편이다.

예수님 가신지 2000년이 지나도 세말은 안 오니 예수님이 심판자로 오셔서 인류를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들이 과연 믿느냐는 물음이었다. "예루살렘은 우리 하느님의 정의"라는 오늘 성서 말씀과 달리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지금 중동의 모든 전쟁과 학살의 주동자인데 하느님의 심판을 누가 믿겠느냐는 물음이었다. 각자가 죽음을 맞는 순간 당사자에게는 해와 달이 빛을 잃고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는 셈이니 결국 그게 세말인가 하는 물음으로 유신부님 강론이 끝났다. 

예수님 가신지 2000년 지났어도

세월호 유가족의 원망은 하늘에 닿은 기별이 없고

그 비극을 모릐쇠하는 권력가들의 세도는 하늘을 찌르고 있으니...

미사 후 실비아 수녀님 댁에 들러 차와 석류와 단감을 대접받고 조곤조곤 재미난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당신이 운영하시던 양로원에 첫 미사를 온 신부님이 그곳 할머니들의 기도와 열성으로 사제가 되었다면서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라는 인사를 드리니 어느 할머니가 “갚긴 무얼 갚아. 그냥 긋고 가!”라고 불쑥 한마디 하시더란다.

할머니들이 치매에 걸리면 걸핏 전직이 드러난단다. “자, 제상 차려야제?” 하는 분은 종갓집 며느리였을 수 있고, “쟤 오늘 머리 올려줘라!”하는 분은 색시집 마담이었을 수 있고, “그냥 긋고 가!”하는 할머니는 점빵을 한 분이란다. 어차피 인생은 타인들의 신세를 지고 살다 그대로가는 길이어서 무슨 수로도 다 갚지는 못하고 그냥 "하느님의 외상장부에 긋고가는 외상"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단다.

수녀님 얘기가 치매에도 ‘긍정 치매’와 ‘부정 치매‘가 있어 생글생글 웃으며 “수녀, 수녀 먹으라고 떡을 놔뒀지 뭐야.”라면서 할머니 손에 꼭 쥐고 있던 똥덩어리를 수녀님 손에 꼭 쥐어주는 인심은 그래도 ’긍정 치매‘에 해당한단다. 매사에 심술을 부리고 기운이 펄펄해서 다른 할메들의 얼굴을 쥐어뜯는 분은 ’부정 치매‘에 해당한다는데, 대개는 살아온 가락대로 마지막을 보내는 고로 “인생에 월반(越班)은 없다.”라는  진리를 배운단다.

수녀님이 원지에 있는 ‘산촌’이라는 식당으로 우리 부부를 데리고 가서 점심을 들면서 맘으로나 몸으로나 고통 받는 성직자 수도자 얘기로 한참 가슴이 에이기도 했다. '영적 동반'을 하면서 자상한 모성애로 영혼을 들여다 보면, 각자가 걸어온 고난의 길, 머리로도 맘으로도 본인으로서는 도저히 수긍 못할 십자가의 길이 결국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을 문득 깨닫는다면서 영적으로도 “인생에 월반(越班)은 없다.”는 신념이 들더란다.

원지에 있는 마트에 들러 낼모레 할 김장꺼리(생강, 쪽파, 미나리, 새우젓, 청각, 무)를 샀다. 김장꺼리를 거저 주는 친구들도 있고 내가 담근 김치를 나눠줄 사람들도 있어 행복하다.

일요일인데도 어제 구입한 DVD 플레이어를 휴천재 낡은 TV에 달아주고 설명까지 해주고 간 젊은 기사들이 고맙고, 어제 만든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러와 준 도미니카1이 고맙다.

저녁을 먹고 보스코는 마늘을 까고(김장철 보스코의 몫) 나는 생강과 파를 까며 두어 시간 보냈다. 예전에 엄마가 해마다 백여 포기 김장을 하시면서 밤을 새워 마늘과 생강을 까시는데도 “나 공부해요.”라는 핑계로 외면했었는데 나를 이 일에서 면제시켜 줄 엄마는 유무상통에서 지금 예쁜 잠을 자고 계신다.

전순란  한국신학대학 1969년도에 입학. 전) 가톨릭 우리밀 살리기 운동 공동대표 현) 이주여성인권센터 상임이사 / 두레방 상임이사 Gustavo Gutierrez의 해방신학을 번역했으며,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성염(보스코, 아호: 휴천)교수의 아내이다. 현재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고 살며 그곳을 휴천재라 부른다. 소소한 일상과 휴천재의 소식을 사진, 글과 함께 블로그에 전한다. http://donbosco.pe.kr/xe1/?mid=junprofiie

전순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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