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발레교습소>의 한 장면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되는 건 없고 스트레스만 쌓이고, 살벌한 경쟁으로 진정한 인간관계란 건 공염불이요 모여서 헐뜯거나 거짓 치장하는 게 전부인 만남이라는 게 얼마나 부질없는지 이제 알 만큼 다 알잖아요. ‘사는 게 다 그런 게 아니겠나’ 하는 게 푸념이지 그게 무슨 철든 거냐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이제 어렴풋하게나마 사는 게 뭔지 눈치를 채고 말았겠지요. 맞아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속아왔어요.

‘청년이여 꿈을 가져라’, ‘아프니까 청춘이다’ 시쳇말로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 줄 이제 알만하지요? 날 때부터 ‘루저’, 세대 자체가 ‘포기 세대’니 어쩌겠어요. 그 동안 한 고생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그냥 헛짓 한 거네요. 왜 그랬을까요. 내 못난 탓이라고 왜 그렇게 자학하면서 지내왔는지 돌이켜 보면 너무 아까운 지난날이지요. 이제부터라도 앞으로는 그러지 맙시다. 주변을 둘러봅시다. 이게 어찌 그대들 청년의 탓입니까.

하는 일마다 꼬이고, 되는 게 없어 너무 답답한 민재가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이 하나같이 막막한 상황이라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우린 왜 다 이러냐?”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또 골치가 아픈 문제에 부닥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현실은 팍팍하기 그지없는데 영화까지 이런 걸 봐야 하는가’ 하는 학생들의 질문이 또 제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는 친구들이 부적응 학생이거나, 이 사회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떠도는 소위 루저(loser)들이라면 이 대사를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을 겁니다. 영화 대사처럼 ‘우린 왜 다 이러냐’ 하면서 자괴감에 젖을 테고 좀 심하면 ‘역시 난 안 돼’ 하면서 낙담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잘못하면 이 영화가 안 그래도 지친 영혼들에게 구제불능의 쐐기를 박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영화를 권하는 저는 참 나쁜 사람입니다. 

전통적으로 비극은 규범을 내면화하도록 하여 일탈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고 논의되어 왔습니다. 일탈 행위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기 마련이니 규범을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문학적 효과는 ‘과오에 대한 반성’이라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민재’는 아버지가 바라는 항공학과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됩니다. 재수는 죽어도 싫으니 뭘 배우는지도 모르는 조경학과에 지원하고 합격합니다. 항공사 기장인 아버지는 항공학과 아니면 안 된다고 막무가냅니다. 민재의 비극은, 가정에서 늘 부재하는 아버지처럼은 살기 싫은데 아버지만큼의 생활력을 가지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라는 데 있습니다. ‘창섭’에게는 이런 ‘민재’의 고민이 철부지 응석으로 느껴집니다. 창섭이는 공부는 아예 손 놓은 지 오래고 연예인 백댄스가 꿈인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대를 이어 노가다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창섭’이에게 항공사 기장 아들 ‘민재’의 고민이 철없어 보이는 게 당연합니다. “평생 노가다 할거냐”고 충고하는 ‘민재’의 멱살을 잡고 “노가다 하면 사람도 아니냐”고 분노하는 장면에서 가슴 뭉클했습니다. ‘창섭’의 비극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젊은이들의 비극은 누구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일까요. 누구를 탓할 수 있습니까. 이 젊은이들 중 8,90%가 낙오자가 되었다는 패배감에 젖어 살 텐데 이들이 도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단 말입니까. 절대 다수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마는 구조인데 이들이 반성을 하고 각성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 아닙니까. 그러니 『발레 교습소』는 탈출구가 없는 지독한 비극입니다. 이런 작품을 보여주는 건 일종의 학대가 아닐까요.

어떤 직업을 고를까 고민하는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의 한가한 일로 보이는 게 우리 사회 현실입니다. 직장을 구하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어 버렸으니까요. 적성에 맞는 직업을 선택하는 게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당장 생계 걱정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적성을 고려하는 게 사치일 수 있습니다. 최근 한국정보고용원의 발표에 의하면 요즘 미취업 청년의 정규직 취업률이 21.5%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되었답니다. 5명 중 한 명 꼴로 월평균 임금 260만 원 정도의 정규직에 취업하고 나머지는 무직 상태이거나 한 달 140만 원 정도의 박봉에 시달리는 임시직에 취업한다고 합니다. 이런 형편이니 소질과 적성을 운운하는 건 참 철없는 얘기일 수 있습니다.

‘이스털린’이라는 미국의 경제학자가 우리의 행복이 소득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고 합니다.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듯이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참 멋있는 말이긴 한데 실상이 그런지 의심스럽습니다.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연간 소득이 75000 달러까지는 소득이 많을수록 행복감은 비례하여 커졌다고 합니다. 더 이상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감에는 별 차이가 없더랍니다. 그런데 연소득 75000 달러 소득은 우리 돈으로 환산하여 월급이 약 600만 원 정도 된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한 달에 이 정도를 버는 집이 얼마나 될까요. 소질과 적성 얘기가 철없는 얘기로 들릴 수 있듯이 ‘이스털린의 역설’ 또한 우리 사회 현실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돈을 많이 벌수록 마음은 가난해진다’는 역설이 삶의 진실을 일부 담고 있기는 하겠지만 현실을 너무 모르는 공염불일 수 있습니다.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면서 번 돈을 모아 고가의 명품 핸드백을 구입한다는 어느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일을 하는가,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면 진정 행복해지는가? 회의가 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위의식 때문에, 자기기만을 위해 꼭 필요하지도 않은 상품을 구입하려고 자기 몸을 혹사시키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을 가질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노동 현실을 도외시하고 삶의 가치를 운위하는 것이 위선일 수 있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행복해지는지 반성할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직업을 구하는 일이 삶의 진리를 찾아 떠나는 가슴 설레는 여행일 수는 없는 것일까요?

▲ 필자 이한수            인성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   블로그 http://blog.daum.net/2hansu

이한수(인천평화교회 교인)  hansu85@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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