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아직도 사랑을 믿어?

우리 시대에 사랑은 존재하는가? 우리는 정말로 사랑을 믿는가? 아니면 사랑은 멋진 섹스를 위한 수사학적 장식에 불과한 것인가? 사랑은 우리의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사학인가? 나는 집착하는가, 아니면 사랑하는가? 사랑과 성이 등가시되는 사회에서 사랑이 성 행위를 위한 게임규칙의 수사학으로 전락하는 경우를 우리는 너무도 많이 접한다.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에게 전해지는 수많은 노래들이 예나 지금이나 ‘사랑’을 주제로 한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기념일들이 넘쳐난다. 발렌타인데이, 빼빼로 데이, 만남 100일 기념, 만난지 일천일 기념 등. 그렇게 ‘사랑’이란 단어는 우리 주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넘쳐 나지만, 정작 우리는 사랑에 굶주려한다. 결국 그렇게 넘쳐나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곧 우리들의 사랑 결여(lack)를 지시할 뿐이다. 이렇게 사랑에 목마른 시대에 문득 궁금하다. 정말 사랑이라는 것이 있을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게 가능할까? 이 물음은 묘하게도 보편(the universal)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를 둘러싼 중세 유명론 논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하다. 즉 사랑의 존재론은 진리의 존재론과 맥을 같이한다. 진리를 향한, 혹은 정의를 향한 수많은 외침과 함성이 있지만, 그 누구도 진리가 있다, 정의가 존재한다고 확실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사랑한다’고 믿으며 삶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을 경험할 뿐.

사랑이란?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탄생”¹⁾이라 했다. 결혼식 주례사로 흔한 말들 중 하나가 결혼은 ‘둘이 하나가 되는 일’이라는 말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정확히 이 말의 정반대이다. 하나가 둘로 분화하거나 분열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둘”(the Two)이 탄생하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사랑은 ‘일자’(the One)의 탄생 혹은 시작이 아니라, 혹은 둘(the Two)이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둘 즉 “다수”(the multiple)로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 전통 속에서 ‘존재’는 일자(the One)이고, 혹은 일자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였으며, 다수(the multiple)이란 일자의 존재론적 타락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래서 현실적 존재를 어느 한 측면에서 조명하여, 그것을 부각시켜, 존재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나머지 다른 다양한 측면들을 그 하나의 양상에 부속된 것으로 간주하는 습벽, 바로 그것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를 ‘무엇’(what)으로 간주하는 그리스적 사유의 습벽이 서양철학의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탓이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란 무엇인가?’(what is Being?)이라 묻는다. 이 물음 속에서 “무엇” 즉 “what”은 물어지는 대상을 하나의 실체로 탐문한다. 이 질문의 형식 속에 존재의 다수적 측면들이 그 존재의 핵심인 무엇에 대한 다양한 속성들로 간주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²⁾ 결혼을 ‘둘이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는 우리의 관습적 시선 속에는 이미 두 존재 중 하나의 입김이 다른 하나를 압도하여, ‘하나’로 통합/통치하는 존재론적 폭력이 전제되어 있음을 망각한 채 우리는 ‘조화’와 ‘평화’ 혹은 ‘화합’ 혹은 ‘희생’이란 이름으로 미화해 온 것이다. 이런 습속에 맞서 바디우는 사랑을 ‘둘의 시작’ 혹은 ‘둘의 탄생’으로 규정한다. 이는 곧 사랑이란 철학적으로 재 발명되어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는 사랑의 이미지, 개념, 통념과 상식 등으로 우리는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아니, 하이데거의 말을 조금 흉내 내어 표현하자면, 사랑 안에는 사랑의 본질이 없다! 진정한 사랑에 이르려면,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생각해 왔던 개념의 영토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바로 그 바깥의 영토를 바디우는 ‘둘’(the Two)이라 이름한다. 
 

‘사랑’이란 현상은 좀 역설적이다. 우리는 이성 생식을 통해 즉 우리 자신을 이성의 배우자와 성을 통한 유전자 재조합 과정을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가는 존재로서, 언제나 성적 욕망을 본능으로 장착한 채 태어난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이성의 상대를 보고, 성적 매력을 느끼는 것은 내 안의 유전자가 그렇게 느끼도록 신경세포를 배선해 놓은 결과이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결국 유전자가 선천적으로 배선해 놓은 신경세포들의 협동이 만들어낸 환상(illusion) 아닌가? 사실 쇼펜하우어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이런 이야기들을 했었다. 쇼펜하우어는 유전자 대신 “생에 대한 의지”(Wille zur Leben, will-to-life)라는 “인간 존재의 내부에 고유한, 살아남고 싶어하는, 번식하고 싶어하는 본능적 욕구”³⁾가 사랑이라는 망상(delusion)을 만들어 낸다고 단언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자신과 동일한 것’이 죽음이라는 숙명을 맞이하지 않고,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 즉 사랑이란 자신이 원하는 것 혹은 욕망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임을 알게 되고, 그리고 도킨스나 쇼펜하우어는 만일 사랑이 그런 본능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면, 결국 그것은 환상이거나 망상이라고 비판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이 말하는 사랑이 도킨스의 유전자적 욕망인지 아니면 쇼펜하우어 같은 생에로의 의지가 빚어내는 망상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사랑’을 남발한다.

‘나 너 사랑해!’
왜?
‘니가 그냥 좋으니까.’
왜 좋은데?
‘그냥, 나 너 좋아해. 아무런 이유 없어. 그냥 사랑해!’

남/녀 간에 흔히 엇갈리는 사랑 대화라고 하면 과장일까? 사실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당사자는 정말 왜 사랑하는지를 모른다. 그럴 수밖에. 자신이 사랑한다기보다는 자신 안에 담겨진 유전자가 선천적으로 배선해 놓은 회로의 작동을 따라 ‘사랑’을 했으니까. 당연히 자신은 이유를 모른다. 그저 소위 ‘이기적’ 유전자의 작동방식을 ‘자아’ 혹은 ‘주체’라는 이름으로 실행할 뿐이다. 거의 모든 남성들이 그렇게 사랑을 한다면 과장일까?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사랑 안에는 사랑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의 행위가 아니라, 유전자 혹은 생에의 의지가 작동한 결과이지 결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내가 사랑한다면, 사랑의 본질은 사랑으로 일컬어지는 기존의 모든 현상과 행동을 넘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 혹은 그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경험을 태동하는 “사유”⁴⁾이다. 사랑은 본능을 뛰어넘는 감정이다.

성관계는 없다

만일 ‘성’이 유전자가 종족보존 본능을 창출하여, 유기체를 유도함으로써 발생하는 현상이라면, 사랑과 성이 등가시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동물적 본능을 ‘사랑’이라는 허위의 명사로 포장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하는 행위에 정당한 명분을 부여하면서 올바르게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 자체가 무용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이라는 명사가 드러내는 지평은 기존의 의식지평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라캉의 문제적인 발언, 즉 ‘성관계는 없다’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라캉이 보기에 실재는 “나르시스적”이고, 따라서 관계는 “상상적”이다. 결국 ‘성관계’란 없다. 각자가 나르시스적으로 상상한 ‘관계의 형상’을 투사한 것에 불과할 뿐, 성이라는 관계의 지평에 이르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들이 ‘관계’라고 말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관계가 아니라, 나르시스적 상상력의 투사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매 순간 사건처럼 만나, 다음 순간 사라진다. 그러한 생성과 소멸을 배겨내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러한 ‘영원한 소멸’(eternal perishing)을 기억으로 포박함으로써만 보존할 뿐이다. 그러니 그것은 기억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보관하는 것이지 실재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관계가 가능하려면, 그것은 언제나 ‘비-관계의 도래’를 기다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상의 나르시스적 투영에 불과하고, 그래서 진정한 관계는 오히려 우리가 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의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래를 ‘보충’(supplement)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듯하다. 보충이라고 하면, 무언가 주재료를 보충하는 보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데,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진정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사실은 허상이고, 우리가 보충적인 것 혹은 보조적인 것이라 간주하는 것들이 실재에 훨씬 근접하다는 것이다. 사랑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성’을 사랑관계의 핵심으로, 그를 통해 우리가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어떤 것을 보충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사랑이라는 전체 관계의 그림과 이상을 드러낸다. 하지만 실상은 성과 사랑은 그렇게 도래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렇게 도래하는 성과 사랑은 오히려 ‘성관계’를 결여한 관계 즉 성을 통해 관계로 나아가는 관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성-관계는 “제 자신을 넘어” “타자의 존재에 접근”⁵⁾할 수 있는 관계이다. 
 

사실 동물은 ‘성’(sexuality)을 결여하고 있다. 그들은 ‘종족보존의 본능’을 갖고 있을 뿐이고, 그들은 ‘성’을 통해 관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내장시킨 종족보존의 본능을 실현하고 나면, 다시 아무런 일도 없던 관계로 되돌아간다. 이성 생식의 방법으로 종족을 이어가는 유기체들 중 오직 인간만이 ‘번식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거의 모든 고등 유기체가 ‘번식기’에만 성을 통한 종족보존 방식을 택한 이유는 ‘성 활동’은 매우 치명적이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성 행위 시 두 유기체들은 주위 환경에 둔감해지고, 주의력이 떨어진다. 이런 상태에서 포식자가 주변에 있기라도 한다면, 그의 대가는 곧 죽음이다. 따라서 호르몬 분비의 시기를 조절하여, 별도의 번식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번식기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아서, 본래 종족보존을 위한 생물학적 장치였을 ‘성’을 쾌락으로, 유희로, 놀이로 활용하는 유일한 ‘종’(species)이다.

따라서 우리가 소위 ‘성’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동물들은 성을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 엄격히 조절해서 활용한다. 인간처럼 탐닉하는 방식은 동물에게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견에 반대해서, 한 동물 실험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성적 쾌감을 유도하는 호르몬을 분비하는 스위치와 먹이를 내리는 스위치를 실험 생쥐 앞에 두면, 생쥐는 먹이를 내리는 스위치가 아니라 성적 쾌감을 유도하는 호르몬 스위치를 계속 누르면서 죽어간다고. 그러니 동물들도 ‘성적 쾌락을 무절제하게 즐기려 한다고.’ 턱도 없는 소리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동물이 실험용으로 가공된 유기체라는 점이다. 그리고 자연의 삶 속에서 성적 쾌감을 부여하는 호르몬을 원하는 때에 누르면 방출하는 스위치는 없다. 모든 동물은 그러한 생물학적 스위치가 오로지 ‘번식기’에만 한정해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은 전혀 동물적이지 않다. 왜 우리는 성적 쾌락을 즐길수 있는 유기체가 된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성’을 인간의 특별한 관계 방식으로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성을 조명하기에 앞서, 우리는 전통적으로 성을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래서 생물학적인 것으로 조명하는 기존의 방식을 심각하게 의심해야 한다. 그러한 기존의 성 담론은 결국 ‘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인간이 담지한 ‘동물적 성’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진 성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전혀 동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둘의 탄생

결국 사랑이란 성을 매개로 한다 혹은 할 수도 있다. 물론 성을 결여한 사랑관계도 무수히 많다. 부모-자식 간의 사랑, 친구들 간의 사랑, 사제 간의 사랑 등. 하지만 우리가 통상 ‘사랑’이라는 말을 한정해서 표현하는 이성 간의 관계에서 ‘성을 매개로 하는 사랑’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성을 매개로 하는 사랑’은 ‘성을 달성하기 위한 정당성으로서 사랑’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사랑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동물에게는 ‘성’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성이 동물적이라고 본능이라고 그래서 제어가 되지 않는다는 ‘구라’를 전개한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동물의 성은 엄격히 조절과 제어가 되고 있으며, 인간처럼 아무 때나 발동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전혀 아니다. 인간의 성은 인간 유기체에게 동물의 성과는 다른 의미 구조와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이냐이다.
 
우리가 우리의 성을 동물적 본능으로서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 표현하는 담론 구조 속에는 성의 본래적 의미추구 대상이 결여되어 있다는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본래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 목적이 있을 터인데, 그것을 찾을 수 없을 때, ‘성’을 동물적인 것으로 퇴행하여 이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는 도착(perversion)이다. 인간이 성을 추구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바로 ‘관계’를 추구하기 위함이다. 타자와의 만남을 번식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동물적 수준에서 번식기 때 활용되는 일이다. 그런데 진화의 과정에서 이 기제가 어떤 이유로 유기체들에게 주체적으로 ‘전용’(appropriation)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우연한 전용은 다른 동물들은 갖고 있지 않은 어떤 문화적 특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인간의 성을 조명해 보아야 한다. 그럼 우리 인간의 성이 갖고 있는 의미와 목적은 무엇일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동물적 단계의 의미와 목적으로부터 ‘일탈’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성의 타인을 번식을 위한 도구로 보는 동물적 관점에서 벗어나, 만남 그 자체를 즐거움과 유희와 쾌락으로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동물적 성으로부터의 일탈이 가져온 성의 혁명이다. 즉 성을 통해 그리고 성의 즐거움과 그의 추구를 통해 우리는 동물적 성의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 즉 성의 인간적 지평을 열었다.
 
문제는 우리가 만나야 할 타자(the other)를 온전히 그대로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시공간의 역설일수도 있다. 우리는 3차원의 존재를 시각적으로 2차원 평면으로 환원하여 볼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즉 본래 입체적인 존재를 우리는 2차원 평면에 보여지는 한 측면으로만 파악하도록 된 시각적 존재들이 인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타자를 만날 때, 그 존재의 온전한 전체성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한정된 범위의 차원으로 환원한다. 따라서 타자는 우리에게 관계 속에서 만나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우리가 관계라고 가정하는 것은 사실 근원적으로 내 자신의 나르시스적 상상의 투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비-관계”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보다 심각한 것은 우리가 이 나르시스적 투사의 공간을 탈출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시공간의 탈출은 오직 하나를 의미한다: 죽음. 따라서 타자는 나에게 언제나 ‘비-관계’의 존재로 나타날 것이며, 그 비관계적 타자의 출현은 나로 하여금 “탈-중심”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나-중심의 나르시스적 상상의 공간에 기억을 매개로 구축한 나의 세계가 아니라, “탈중심적 관점에서” 나의 세계를 탈구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인간의 삶에 도입해 주는 진화의 새로운 지평이다.

나의 세계를 탈구하는 탈중심적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바로 타자들과 더불어 나아가야 할 미래를 함께 바라보며 나아가는 동무의 관계로 세계를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르시스적 투사의 세계가 깨지지 않는 것은 곧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억을 매개로 해서 ‘타자’를 알고 있다는 생각을 넘어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사랑스러운 그녀는 전혀 그녀와 맞닿아있지 않은 내 상상 속의 그녀일 뿐이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자 한다면, 당신과 그녀가 어떤 미래의 시간을 향해 손잡고 나갈 수 있는지를 꿈꿀 때만 가능하다. 그녀가 정말 진심으로 어떤 존재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든, 나만의 방식으로 내 인식의 한계 안에서 인식론적 환원을 거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녀가 나를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녀를 만날 수 없는 만큼, 그녀도 나를 만날 수 없다. 그녀와 나는 함께 미래의 시간을 꿈꾸며,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나아갈 때에만 드문 드문 만날 수 있다. 그러한 만남의 약속을 우리는 성을 통해 체험한다.
 
인간에게 성을 통해 관계로 나아가는 일이 가능한가? 라캉은 인간이 나르시스적 인식의 주체 구조를 갖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함께 삶 속에서 동무관계의 꿈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우리는 드문 드문 만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동무 관계는 성을 매개로 할 수도 있다.

동무와 연인 사이

▲ 보부아르(왼쪽)와 사르트르(오른쪽)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평생 맺은 계약결혼으로 유명하다. 사르트르는 지속적으로 다른 여자들을 찾아다니는 바람둥이였고, 보부아르도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특별한 죄책이나 부담감을 갖지는 않았던 듯 하다. 그 둘은 “글쓰기”라는 공동의 공간과 꿈을 통해 삶을 동무관계로 펼쳐 나갔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를 이렇게 요약한다:

사르트르와 나 사이에는 늘 말이 있었어요.⁶⁾

말은 관계를 끊임없이 “ ‘쉼없는 재서술’(로티), 혹은 ‘수행적 재구성’(하버마스)의 갱신”⁷⁾으로 유도하여 관계의 역동성을 가져다 준다. 말을 통해 우리의 생물학적 조건들의 구속을 끊임없이 재서술하고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퇴행하는 존재들이다. 사랑이 성이고, 성은 동물적 본능이라고 우겨대는 우리의 심사가 바로 그 퇴행의 증거이다. 진정한 사랑은 그래서 ‘동물적 욕망’이라는 수사를 넘어선 인간적 지평의 ‘동무’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동무와 친구와 동지는 다르다. 대의를 푯대삼아 모이는 관계를 ‘동지’라고 한다면, 그들은 “거사와 함께 투신하고 혁명에 신명을 바친다. 그 과정에서 취향은 무시되어도 좋고, 사랑조차 종종 걸림돌일 뿐이며, ‘의사소통적 합리성’도 부차적이다.”⁸⁾ 단 배신만은 결코 용서되지 않는다. 친구에게는 “대의도 이데올로기도, 관념의 일관성만으로 묶어둘 끈도 없다.”⁹⁾ 친구는 “ ‘시간’을 먹고 산다.”¹⁰⁾ 오랜 시간동안 익숙해진 얼굴이기 때문에, 온갖 모습들을 다 알고 있고, 그래서 어떤 말을 해도 내가 익숙한 그 사람의 삶의 패턴을 넘어서 이해되지 않는다. 내 모든 것을 이해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의 회심과 사건을 인정하지 않는다. 동무는 친구도 동지도 아니다. 동무란 “서로 간의 차이가 만드는 서늘함의 긴장으로 이드거니 함께 걷”¹¹⁾는 관계이다. 동무가 함께 걸어갈 길은 어차피 없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걸어간다면, 그들은 동무가 아니라 친구 아니면 동지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무는 “오히려 ‘길없는 길’을 걷고 어울려 다른 길을 조형하면서, 잠시만 한 눈을 팔면 머-얼-리 몸을 끄-을-며 달아나 그림자조차 감추어버리는 관계”¹²⁾이다. 그래서 동무라는 관계는 “기존의 체계에 빌붙은 삶의 양식 속에서는 자생할 수가 없”¹³⁾다.
 
동무는 “미래적 연대의 형식”¹⁴⁾이다. 함께 만들어갈 세상을 꿈꾸는 연대의 형식, 바로 그것이 동무의 관계이고, 진정한 사랑의 시공간이다. 그러니 사랑은 없다. 아직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 미래를 가상적으로 체험할 뿐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성은 바로 그 오지 않은 미래의 가상적 체험이다. 하지만 그 역은 결코 아니다. 즉 성을 얻기 위해 사랑이라는 정당성을 뒤집어 씌우는 관계는 인간의 ‘퇴행’에 불과하다.

그대 사랑하는가? 그럼 미래를 이야기하라! 둘이서 어떻게 미래를 만들어갈 것인지. 말은 언표되는 미래를 획일화하여 하나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길을 걷는 동무는 서로 다른 느낌으로 풍경을 본다. 하지만 가는 길이 같아, 같이 걷는다. 그때 사랑은 함께 걷는 방식을 열어주는 끈이 된다. 사랑은 무엇이 아니라, 과정이고 방법이다.

<각주 설명> 1)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사랑 예찬』, 조재룡 역 (서울: 도서출판 길, 2010), 39-41. 2) 서동은,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바꾼 철학자들: 고대부터 현대까지 핵심개념으로 읽는 철학사』, 희망철학연구소 저 (경기, 파주: 동녘, 2015), 303-305. 3) 알랭드 보통(Alain de Botton), 『철학의 위안: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정명진 역 (서울: 청미래, 2012), 251. 4) 바디우, 『사랑예찬』, 27. 5) 바디우, 『사랑예찬』, 29. 6) 김영민, 『동무와 연인: 말, 혹은 살로 맺은 동행의 풍경』, 4쇄 (서울: 한겨레출판, 2013), 17. 7)  앞의 책, 43. 8)  앞의 책, 31. 9)  앞의 책, 32. 10) 앞의 책. 11)  앞의 책, 32. 12) 김영민, 『동무와 연인』, 33. 13) 앞의 책, 34. 14) 앞의 책, 82.

 

<필자 소개> 박일준 감리교신학대학 종교철학과, 보스턴대학 신학석사, 드류 대학 철학박사. 종교학과 철학과 신학의 접경 지역들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집중하며, 특별히 인지과학과 진화생물학의 연구결과들을 종교철학적으로 성찰해 나아가면서 ‘인-간’ 즉 ‘삶-사이’를 ‘인간-이후’ 시대에 어떻게 자리매김해 나갈 것인지를 궁리하고 있다. 현재 감리교신학대학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소속으로 ‘트랜스휴머니즘 시대의 혼종적 인간론 연구: 화이트헤드의 사건적 존재론과 진화론과 인지과학을 통한 사이-존재로서 인간론 구성’이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으로 섬기고 있다.

 

박일준(에큐메니안 신학위원장)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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