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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에게 보내진 함석헌의 절필선언<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12.24 15:13

장준하에게 보내진 함석헌의 절필선언(絶筆宣言)(2)

   
 
함석헌이 윤형중의 “함석헌 선생에게 할 말이 있다”를 읽으면서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픔을 당해야 했던 것은 윤형중의 전혀 그 ‘탈성서적인 비난’과 그와는 전혀 다른 입장인 <사상계>로부터 그 <할 말이 있다>에서 삭제 당한 원고 내용 때문이었다.

사상계의, 더욱 분명히 말한다면 장준하의 손에서 지워진 부분을 두고, “그들이 다 나와 친분이 있으니 어디까지나 나를 믿어서 한 일인 줄 알지만…”이라는 함석헌의 ‘이해’가 전제되어 있다해도 ‘뜻’ 하나를 생명으로 하는 함석헌에게 말의 부분을 삭제 당한다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모요, 치욕이었다.

어쨌든 그 부분을 삭제하게 한 것은 장준하였다. 장준하가 함석헌의 그 글을 삭제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원문대로 실을 경우 “선생님은 감옥 가시게 된다”(그것은 청년시절부터 살아온 언론인으로서의 감(感)이었다. 필자 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결코 무사할 수 없다고 느껴지는 <사상계>사의 수난 때문이었다.

두 가지가 다 장준하로서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두 사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그것은 “선생님”이었다. <사상계>가 그 원고삭제 사건으로 독자들로부터 불신을 당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정부 당국으로부터 폐간을 당한다 해도 “선생님이 감옥 가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몇몇 편집위원들과 논의를 거듭했지만 내용을 원문대로 실을 것이냐 아니면 문제될 부분을 삭제할 것이냐의 결정은 ‘사장의 몫’으로 넘겨졌다. 장준하는 마지막 결단을 한다. “문제가 될 것으로 확신되는 두 가지는 지우기로 한다.” 그래서 두 가지는 과감히 삭제해 버렸다. 장준하로서도 그 부분을 삭제하겠노라는 함석헌에게의 사전제의는 어려웠던 것일까?

장준하가 삭제한 두 가지 내용

삭제한 첫 기사가 대통령에 대한 기사였다. 6.25동란 시, 수도 서울을 버리고 경호 대원들의 호위 속에 줄행랑을 친 대통령은 피난처 대전에서 대국민 방송을 한다. “수도 서울의 사수를 결의했으니 서울시민들과 온 국민들을 전혀 동요치 말고 생업에 열중하라”는 것이었다. 그 방송은 서울 경무대에서 하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물론 완전히 날조된 거짓이었다. 대통령의 육성방송을 그대로 믿었던 시민들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윤형중은 함석헌의 글을 가톨릭을 비방하는 글로 받았지만 함석헌이 겨냥한 것은 사회 전반의 타락과 정치, 경제, 교육, 종교 등 각 부분의 부패와 부조리를 예리하게 지적하며, 그 혁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크거나 적거나 현상에서 지니고 있는 기득권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게 하고 있는 체제를 지원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언제나 기득권은 현상을 옹호한다. 함석헌은 현상유지 측이 용납할 수 없는 자였다. “부정(否定)만이 역사를 구원한다”는 것이 그 신조였으니…. 함석헌이 주시하며, 당기는 살(虄)의 과녁은 사실 집권세력이었고, 그래서 그 최종 대상은 대통령일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대통령 이승만을 조준했다.

   
▲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이승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대통령의 국민 기만을 공적으로 회개하라는 것이었다. 정치에 있어 절대의 요소가 신의(信義)인데, 나라의 주인인 민중을 속이고 저 혼자 살기 위해 심야에 서울을 빠져나감으로 수도 서울의 시민들을 대혼란에 빠뜨린 그 죄를 말이다. “이승만 정권이 이런 글을 쓴 선생님을 절대로 그냥둘리 없지.” 장준하의 언론기관 경영인으로서의 직감이었다.

장준하가 삭제한 또 다른 하나가 <훈장 단 군인>에 대한 질책이었다. “동포를 죽이고, 무슨 훈장이냐?”하는 것인데, 이건 실로 용서할 수 없는 반동이었다. 더구나 6.25에 참전했던 무수한 재향군인들, 전선에서 팔, 다리를 잃은 상이용사들에겐 함석헌은 그야말로 국적(國賊)이요, 살려둬서는 안될 자였다.

장준하가 삭제한 <훈장 단 군인들>에 대한 함석헌의 글은 이랬다.

남쪽 동포도, 북쪽 동포도, 동포라고는 하면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칼을 겨누고, 형이 동생에게 총을 들이대는 천이나 알고, 만이나 알면서도 쳐들어온다니, 정말 대적으로 알고 같이 총칼을 들었지. 어느 한 사람도 팔을 벌리고, “들어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 땅이 소원이면 가져라. 물자가 목적이면 마음대로 해라. 정권이 쥐고 싶어 그런다면 그대로 하려무나. 내가 그것을 너하고야 바꾸겠느냐? 참과 바꾸겠느냐?” 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항하지 않으면 그저 살겠다고 도망을 쳤을 뿐이다. … 전쟁이 지나간 후 서로 이겼노라 했다. 형제 싸움에 서로 이겼노라니 정말은 진 것 아닌가. 어찌 승전 축하를 할까. 슬피 울어도 부족할 일인데, 어느 군인도, 어느 장교도 주는 훈장 자랑으로 알고 다녔지. “형제를 죽이고 훈장이 무슨 훈장이냐”하고 때어 던진 것을 보지 못했다. 노자는 전쟁에서 이기면 (죽은 적병을) 상례(喪禮)로서 대한다 했건만….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해 보아도 이 ‘대통령과 군인’에 대한 기사는 도저히 그대로 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첫째 이유는 “선생님을 감옥 가게 할 수는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끝까지 <선생의 감옥길>을 막지는 못했다.

함석헌의 고집(?)때문이었다. 장준하가 함석헌의 신변을 염려하면서 함석헌의 그 “할 말이 있다”에서 두 가지 글을 삭제한 것이 1957년 3월호에서인데, 장준하가 삭제한 그 글의 효과(?)는 다음해 8월까지 1년 5개월 동안만이었다.

함석헌은 그가 선언한대로 윤형중과의 논쟁을 끝내는 1957년 6월부터 이후 58년 7월까지 사상계에 글쓰기를 중단한다. 장준하 또한 함석헌을 누구보다도 깊이 읽고 있는 터인지라 함석헌의 글을 요청하지 않은 채 약간은 불편한 속내를 감추며 그런대로 버텨오고 있었다. 그런데 6.25 8주년이 다가온다. 아무래도 때가 때인지라 <큰 말>이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장준하는 원효로 자택(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으로 함석헌을 찾아간다.

4월말쯤으로 기억된다. 6.25를 맞는 민족에게 <한 말씀>을 달라는 것이었다. 물론 함석헌은 거부했다. “말도, 글도 받은 것이 있어야 하는 건데, 나는 받은 말씀이 없소.” 그것이 함석헌의 답변이었다. “선생님, 선생님 말씀이 필요합니다. 6.25의 부끄러움을 선생님 말고 누가 쓸 수 있겠습니까? 5월 중으로만 써 주시면 됩니다. 저 돌아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함석헌은 장준하를 돌려보내면서까지 ‘못 쓴다’였다. 장준하는 그 특유한 살몃한 웃음을 띠며, “아닙니다. 선생님 꼭 쓰셔야 합니다.” 하면서 돌아갔다.

5월이 중순을 넘는다. 장준하는 내심 걱정되었다. 글을 써야할 사람이 ‘못 쓴다’하는데, 천하의 장준하로서도 재주가 없었다. 5월 마지막 날을 며칠 앞두고 장준하는 다시 함석헌을 찾았다. 역시 함석헌은 요지부동이었다. “쓰셔야 한다”, “못 쓴다” 꼭 같은 말이 한참이나 오고갔다. 장준하는 마지못해 일어서며, “선생님, 말일까지만 써주시면 됩니다. 말일 쯤 편집사원을 보내겠습니다.”

돌아 나오는 장준하에게 함석헌의 대답은 여전했다. “못 씁니다. 기대하지 마시오.” <사상계>의 발행은 한 달 전쯤이 통례였고, 늦어지는 경우 그 달 초, 중쯤이었다. 5월이 다했는데, 함석헌의 원고는 끝내오지 않았다.

6.25 기념호로 내려고 했던 편집계획에 상당한 수정을 해야 했다. 함석헌의 글로 6.25의 역사적 의미를 찾아보려 했던 것인데, 함석헌의 글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랴부랴 6월호를 냈고, 바로 7월 준비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계창호(당시 사상계 편집부장, ㈜한국특송회장)가 함석헌을 찾았다. 6.25의 역사적 의미를 담은 원고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저희 사장님께서 지난 해 ‘할 말이 있다’에서 일방적으로 내용을 삭제한 것을 크게 죄송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장님은 그 글대로 실려 가가게 되면 선생님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면서 꾸중을 듣더라도, 내가 듣겠다며 그 글을 삭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이후론 일방적으로 선생님 글에 손대는 일,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편집부장인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

함석헌은 계창호의 정중한 말투에 묶였던 맘이 약간 풀리는 듯했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데 그건 6.25특집기사로 요청한 것 아닌가? 지금도 그 글이 필요하다는 건가?” 계창호는 장준하가 이미 일러준 대로 “네, 선생님 그건 역사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되지 않습니다.”면서 용기를 가지고 함석헌을 주시했다. 함석헌의 대구에 속으론 “됐구나!” 스스로 위로를 받으면서…. 함석헌은 한 동안 문제를 숙고하는 듯하더니, “아무리 생각해도 7월달에 실리기는 어렵겠고, 8월호에 싣는 것으로 해도 괜찮겠다면 써보도록 하지.”

함석헌의 글이 명문이라는 사실은 언제 읽어도 현대문으로 읽혀진다는데 있다. 계창호는 고마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 글로 함석헌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감옥행이 될 줄을 말이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컬하게도 함석헌을 서대문 형무소로 이끌고 간 그 글의 내용은 지난해 함석헌의 <할 말이 있다>는 그 글에서 장준하가 삭제한 바로 그 <대통령과 군인> 건이었다.

장준하가 함석헌의 신원을 염려하여 삭제했던 그 글을 다시 함석헌이 계창호 손에 내준 원고에 글자하나 다르지 않게 다시 담겨있었다. “하, 못 말릴 어른이로세!” 장준하의 탄식이었다. 장준하는 실로 난처했다. 이대로 싣는다면 선생님의 투옥은 불문가지요. 그렇다고 그 부분을 다시 지운다면 정말 넌 너, 난 나 사이가 되어버릴 것이니….

그 글이 <사상계>와 함석헌 사(史)에 영원히 남을 저 명격문(名檄文)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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