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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12.31 16:04
   
 

함석헌을 옥중에 “스무날 참선을 하게”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원고가 1958년 8월 <사상계>에 실리기까지는 대단히 흥미스러운 스토리가 있다. 1956년 1월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잇는가?”를 필두로 <사상계>가 1968년 1월 1일자로 ‘부완혁에게 위임되기까지 13년 동안 함석헌은 33회에 걸쳐 집필을 했는데 (33회의 보도 중 7회는 사회각계 인사와의 대담, 필자주) 함석헌을 크게 관심하는 이들 중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사상계>에의 집필 중 대표적인 글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1.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2.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3. “5.16을 어떻게 볼까?”

함석헌이 못 잊어 하는 사람, 계창호(桂昌鎬)

“참 저널리스트들 놀라워. <사상계> 있던 계창호 말이야.”
필자는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함석헌과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누렸다. 필자가 <씨알의 소리> 출판 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씨알의 소리> 운영을 위한 기획팀이 있었다. 그 이름을 <씨알의 소리- 기획위원회)라 했다. 매월 첫주 월요일 정기 위원회를 가졌고, 그 회는 물론 함석헌도 참석했다. 정확하게 그 일자를 기억할 수는 없으나 어느 회의에서 였다. 잡지기획과 운영을 의논 하던 중 함석헌이 언뜻 ‘계창호’를 언급했다. 그리곤 회의와는 별 연관도 없는 “참, 저널리스트들 놀라워…….”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한 회의에서 함석헌은 예의 그 저널리스트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필자는 함석헌의 그 계창호에 대한 깊은 무엇이 있었으리라는 것을 감지하고 한 조용한 시간에 계창호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님, 계창호씨 얘기를 좀 들려주시지요. 혹시 선생님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함석헌은 평상시의 그 답지 않게 말에 힘을 주었다.
“그럼, 있고말고. 참 저널리스트들 대단해. 다 그럴 수야 없겠지만......” 그리고 잠시 말이 없던 함석헌은, “계창호가 내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썼지”하는 것이었다. 필자가 들은 소리는 아주 정확하게 그랬다. “계창호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썼지.”
“아니, 선생님, 뭐라 하셨습니까? 선생님의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계창호 씨가 썼단 말입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생님의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계창호 씨가 썼다니 말입니다.”
틀림없이 그렇게 알아들은 필자의 놀라움은 실로 형언할 수가 없었다.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계창호씨가 썼다니..!

그것은 오해가 빚은 것이었지만 그 상당한 책임은 함석헌에게 있었다. 그 전말(顚末)은 이랬다. 계창호는 함석헌의 원고를 얻기 위해 두 차례나 함석한과 전화통화를 했었고 원고 수취 시간을 약속, 약속한 시간에 함석헌의 집을 다시 찾았다. 이 원고 하나를 받기 위해 장준하가 두 차례, 계창호가 두 차례 함석헌을 찾았는데…….

그런데 함석헌은 아직도 탈고를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한 시간쯤은 기다려야 한단다. 함석헌은 참 미안하다면서 집에서 사람을 시켜 전달할 터이니 돌아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계창호는 “아닙니다. 전 밖에서 다른 글을 읽으면서 기다리겠습니다. 한 시간 정도라니 선생님 평안한 맘으로 탈고해주십시오. 저는 문제없습니다.” 그래서 기다리기를 한 시간여. 함석헌의 원고 집필이 끝났다. 참으로 어렵게 받아낸 글이었다. 그런데 계창호 에게 함석헌은 정말 큰 숙제를 함께 주었다.

“제목이 없이 쓴 글이니 가서 읽어보고 알아서 제목을 붙여내라”는 것이었다. 일단 그렇게도 고대하던 함석헌의 글을 받아냈으니 큰 고비를 넘은 건 분명한데 “제목은 네가 알아서 붙이라”니 그것 역시 작은 짐이 아니었다.

“내가 함석헌 선생님 글에 제목을 붙인다?” 계창호는 함석헌 원고를 폈다. <사상계> 사의 깃발이 날리는 사(社)의 찦차 안에서였다. 찦차 안에서 함석헌의 원고를 처음부터 다 읽을 수는 없고, 대충 훑어보는데 한 페이지에 특별히 시선이 꽂히는 부분이 있었다. 작년 3월호에 실은 원고 “할 말이 있다”에서 장준하가, “선생님을 위해서 안된다”며 삭제해버린 바로 “대통령과 훈장 찬 군인” 그 내용이었다.

계창호는 쓴 웃음을 지었다. 장준하가 말한 대로라면 이 글은 그대로 싣고는 무사할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더욱 시급한 과제는 제목을 뽑아내는 일이다. 함석헌은 계창호가 읽은 그 글에서 6.25전쟁의 도화선인 그 3.8선이 왜 생겼는가?를 묻고 스스로 다음과 같이 자답하고 있었다.

“6.25 싸움의 직접적 원인은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 두 번째 세계대전을 마치려 하면서 로키산의 독수리와 북빙양의 곰이 그 미끼를 나누려 할 때 서로 물고 당기다가 할 수 없이 찢어진 금이 이 파리한 염소 같은 우리나라의 허리동강이인 38선이다. 피가 하나요, 조상이 하나요, 땅이 하나요, 풍속, 도덕이 하나요, 이날 껏 역사가 하나요, 이해 운명이 한가지인 우리로서는 갈라질 아무런 터무니도 없다. 이 싸움의 원인은 밖에 있지 안에 있지 않다. 우리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다.”

여기까지의 함석헌의 서술은 사실적이요, 상식적이었다. 사실대로의 전개였다. 그러나 여기서 함석헌은 종교적 해설을 끌어온다. “모든 역사적 현실은 자신의 택한 것”이라는 것이다. 한반도를 현실적으로 양단한 것은 미. 쏘라는 대국이었다지만 그것의 근본책임은 한국자신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한번 생각해 볼 때 아무리 싸움은 다른 놈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왜 거기 등을 내놓았던가? 왜 남의 미끼가 됐던가? 거기는 우리 속에서 찾을 까닭이 있어야 할 것이다. 쉬운 말로 만만한데 말뚝이지, 만만치 않다면 아무 놈도 감히 말뚝을 내 등에 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른 바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에 진 일본의 식민지 였던 것이 원인 아닌 가? 그렇다면 미운 것은 미국도 소련도 아니며, 일본도 아니며 우리들 자신이다. “ 계창호가 찦차 안에서 마지막 읽은 것이 함석헌이 지적하고 있는 <근본결점>이었다.

“우리의 근본결점은 위대한 종교가 없는 데 있다. 우리나라의 백가지폐가 간난에 있다 하지만 간난 중에서도 심한간난은 ‘생각의 간난’이다. 철학의 간난, 종교의 간난, 우리나라는 우선 물자의 간난 때문에 못사는 나라 아닌가. 중국 평원을 우리에게 주어보라. 미국의 자원을 우리에게 주어 보라. 그래도 못살 것인가. 금수강산이름은 좋지만 이 마른 뼈다귀 같은 산만을 파먹고는 힘이 날 수도, 생각이 날 수도 없지 않은가?”

계창호의 시선이 꽂힌 곳이 “우리나라의 백가지 폐”라는 말이었고, 더욱 “간난중에서도 심한 간난은 ‘생각의 간난’이다.”라는 말이었다. 계창호는 속주머니에 있는 만년필을 뽑아 함석헌의 원고 표지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휘갈겼다. 그만큼 제목의 확신이 강하게 온 것이다. 계창호는 원고를 가지고 인쇄소로 달렸다. 그는 인쇄소에 도착하자마자 함석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함석헌이외다…….”
“선생님, 저 계창호입니다. 선생님 글의 원제목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고 했습니다만 어떻습니까?”
함석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계창호가 작제(作題)한 그 제목에 내심 놀랐던 것이다. “거, 저널리스트들 놀라워, 놀라워.” 하게 했으니…….

함석헌은 후에 계창호가 만든 그 제목을 여러 곳에서 선용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 (1958.10 <사상계>)
“꿈틀거리는 백성이어야 산다” (1963.8<사상계>124호)
“썩어지는 씨알이어야 산다” (씨알의 소리 창간호1970년 4월)등이 그랬다.

계창호와 사상계

   
 

계창호, <사상계>에 계창호는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계창호는 “해방 이듬해 북한공산당의 지주 숙청직전 네 명의 형제와 함께 부모의 손에 끌려” 월남, 덕수초등학교, 덕수중학교 그리고 서울 고등학교를 거쳐 서울 대학에 진학, 대학 재학 중 장준하의 도움을 받아 사상계에 입사하게 된다.

계창호가 장준하를 만나게 된 것은 고등학교시절 교우였던 장준하의 동생인 장창하(張昌何)를 통해서였다. 창하가 창호를 형 장준하에게 힘써 소개하게 된 과정은 이랬다. 1951년 11월 아이젠하워장군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는데, 그는 대통령 후보시절 당선이 되면 한국전쟁에서 무수한 미국의 장병들이 생명을 바친 한국 방문은 물론 그 전선을 직접 시찰, 정전의 길을 모색하겠다고 공약을 했던지라.

그 공약의 이행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게 되어 12월 10일 임시수도부산충무로 광장에서 시민환영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환영대회에서의 환영사를 <서울고등학교 학도 호국단> 운영위원장 (현재의 학생회장)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울고등학교학도호국단> 단장이 바로 계창호였다. 계창호는 이 환영사 문제를 장창하와 상의하게 되었고 그래서 이후 자연스럽게 장준하를 만나 상상에 넘치는 도움을 입게 된 것이다. 계창호는 대학에 진학을 하면서부터 <사상계>사의 일꾼이되었고 1955년 <사상계> 창간 3년이 되는 해부터는 아예 장준하의 집에 입주하게 되는가 하면, 1958년엔 <사상계>의 편집부장 대행, 1959년엔 정식편집부장으로 발령을 받는다. 장준하의 <인물몰아오기>는 자타가 공인하며 놀라워했지만 계창호 또한 ‘쓸 만한 인물“ 끓어오기에 결코 못지않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계창호가 <사상계>의 편집부장직에 발령되면서 사장특명의 인사권(人事權)을 위임했다는 사실이다.

「장준하선생 추모문집 간행위원회」에서 펴낸 <장준하의 생애와 사상>에서 계창호는 1959년 <사상계> 편집부장의 명(命)을 정식으로 받으면서 ,사상계>의 새로운 인물군(人物群)을 이루어내는데 그때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사상계가 원하는 사람은 단순히 잡지를 할 사람이 아니라 구국동지(救國同志)를 겸하는 인물이어야 했다. 선생(장준하사장:필자주)은 나에게 인사전권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쟁쟁한 인물들이 <사상계>로 몰려들었다. 먼저 59년 1월 문리대정치학과 동기인 손세일군 (후에 동아일보논설위원, 신동아편집장, 민주당국회의원)이 부산에서 올라왔고, 59년 9월 고교동기이며 대학동기(사회학과) 이문휘 (후에 재미 Korea porum 대표) 등이 합류했고, 곧 이어 1959년 10월에는 후배인 유경환 (후에 문화일보논설실장), 안병섭 (후에 단국대 교수)등 두 젊은이, 그리고 다시 뒤이어 송복군(후에 연세대 교수)이 들어왔다. 여성으로는 역시 서울대 출신으로 한국일보 견습기자 시험에 합격, 교육 중에 있던 김재희양 (후에 Unicef 임원)이 반 강제로 입사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연초에 입사한 박성룡, 5월 입사한 소설가 박경수(<재야의 빛 장준하> 편저자, 필자주)씨까지 모두 여덟 명의 인재가 집결하여 편집실 인원은 기존멤버 다섯을 합쳐 일거에 13명의 풋풋한 신세대 팀으로 대편 확대개편 되었다!”

그리고 계창호는 이렇게 그 전언을 맺는다.
“....그리고 비로소 ‘편집부’라는 기구 명칭을 쓰게 되었다.”
장준하 곁에 계창호가 있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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