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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구속과 장준하의 2차 소환(1)<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1.10 17:22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통해 이후 이루어지는 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다시 함석헌과 ,<사상계>의 관계를 말하기 전에 필자는 이제까지의 그 관계 진전을 요약하여 피력해 둠으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우려 한다. -필자주-
 
   
 
1955년 <사상계>와 1956명의 함석헌
1956년 1월 함석헌의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발표한 이후 계속되는 함석헌의 글과 <사상계>의 눈부신 확장은 기이하다할 만큼의 랑데-부(randez-vous)를 이룬다. 그 랑데-부의 극치가 바로 함석헌의 투옥과 2차에 걸친 장준하의 연행이었다. 함석헌의 투옥과 장준하의 2차에 걸친 연행은 <사상계>에 그야말로 무진장(無盡藏)의 프로파간다(propaganda)가 되어주었다. 아마 한국의 잡지사에는 물론 대신문을 포함한 언론사상 초유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장준하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서였거나 아니면 <사상계> 자체의 확장에 의해 부득불 이루어진 것이었거나 간에 1955년은 <사상계>가 장준하의 1인 체제에서 벗어나 단연 주간(主幹) 주제의 ‘편집위원회’ 체제를 선택하게 된다. 소설가 김성한(金聲韓)을 초대주간으로 편집위원으로는 장준하 자신을 포함 엄요섭(儼嶢燮), 홍이섭(洪以燮), 정병욱, 정태섭(鄭泰燮), 신상초(申相礎), 강봉식(姜鳳植), 안병욱(安秉煜)등 실로 당당한 학자들이 등단을 했다. 
 
게다가 적중한 것이 「대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이었다. 이때까지 3000부의 발행을 넘지 못하고 있는 사상계였다. 이 <사상계>가 수위를 점하는 확고부동한 대중교양잡지로 비상한 것이 바로 이 「대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의 1955년 6월호였다. 
 
평상발행숫자대로 3000부를 발행한 <사상계>는 끊임없이 어어져 오는 대학가의 구매요청을 도저히 방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3000부를 재판 발행 했고, 그런데도 이어지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어 2000부를 3판으로 발행, 물경(勿驚) 8000부의 당신 한국 잡지 사상 최대의 월간지 역사를 열었다. 이 「대학생에게 보내는 특집」의 그 기획부터 편집까지가 바로 계창호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1955년 <사상계>는 단연 한국잡지사(史)에 자랑스러운 역사를 이룬다. 드디어 1만부 시대를 연 것이다. 그것이 1955년 송년호인데 출판부수가 1만 3천부였다. 출판업계에 알려질 만큼 알려진 유력(?)인사들까지도 혀를 내두르게 하는 그야말로 쾌거였다. 그리고 이듬해 1956년 첫 달, 1월호에 함석헌의 그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가 발표된다. 이때 발표되는 함석헌의 글은 물론 글도 글이려니와 그야말로 대로를 달라는 전마(戰馬)와도 같은 호기를 탄 것 이었다! 
 
그 글 “한국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는 이렇듯 대대적으로 확장된 <사상계>를 타고 나타난 것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사상계>는 누가 뭐라 해도 함석헌을 실어낼 동력(動力)이었다. 그것은 <사상계>가 아니고는 당시로선 함석헌을 실어낼 동력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상계>의 그때 함석헌이, 함석헌의 그때 <사상계>가 있었다!
<사상계>의 장준하 혹은 <사상계>와 함석헌의 랑데-부(randez-vous)! 이론(異論)들이 없지 않겠지만 필자의 견해대로라면 그것은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를 이끄는 그 절대의지에 의한 놀라운 축복이었고, 관포지교(管鮑之交)로도 미칠 수 없는 실로 희귀의 진(眞) 풍경이었고, 더군다나 주권을 유린당한 채 한숨의 삶을 살아가는 이 땅의 무명민초(無名民草)들에겐 더 할 수 없는 위로요, 기쁨이요 축복이었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함석헌은 <사상계>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주 절묘하게 키워간다. <사상계>는 함석헌을 통해 매일의 축제를 벌려갔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 새 역사를 갈망하는 민중의 대변자로, 지도자(?)로 부동의 자리 매김을 해갔다. 1958년에 접어들면서 <사상계>는 400-500 페이지 분량의 월간지로 4만부의 발행을 돌파하고 있었고 드디어 세계의 석학들, 지성인들의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이 함석헌과 <사상계>의 또 하나의 자랑이 「논의 구도」라는 것이었다. 사장 장준하의 의사라 해도 <사상계>의 업(業)이 되기까지는 혹은 연(軟)하게, 혹은 열(熱)하게 이어진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으니……. 이런 것이 장준하의 자산이었고, 그것은 그를 민중 혹은 민주주의의 지도자로 부상시킨 초석이기도 했다. 
 
1958년 전반의 사상계와 1958년 후반의 함석헌
장준하는 그의 전역(前歷)과는 달리 타고난 민주주의의 신봉자였다. 1958년 새해에 접어 들면서 심사숙고를 거듭해온 장준하와 편집위원회는 우선 편집위원회를 보강하고 내년 1959년에는 편집기자들을 공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이렇듯 민중을 일깨우는 언론의 공기(公器)로서 사상계는 5월 편집위원회를 대거 확충하고, 2~3개월 후 예의 계창호가 함석헌에게서 어렵게 받아 온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8월호에 발표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함석헌을 <사상계>의 맨(Men)으로, <사상계>를 장준하가 기대했던 것 같이 함석헌의 발언대(發言臺) 로 만들어 버렸다. 함석헌이 그 글이 화근(?)이 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스무날 동안의 옥살이를 마치고 출소하던 날, 출소하는 함석헌을 맞이하는 장준하는 한이 없이 기뻤다. 
 
“선생님, 이제는 사상계를 아주 선생님의 잡지로 아시고 무슨 말씀이던지 기탄없이 써 주십시오” 하게까지 되었으니 말이다. 천하에 입이 무겁기로 정평이 있는 장준하라면 그것은 결코 인사치레의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 말을 받은 함석헌의 대꾸가 모든 마중인들로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나 더러 사상계를 맡으라? 아주 감옥에서 살라는 말이구먼…….”
 
두 지도자의 구속과 소환
함석헌은 한주일 쯤 후 이 글로 인해 서울 시경 사찰과로 연행되었고 (사실은 남대문 곁 통일사 統一社 시경사찰과의 비밀아지트, 필자주) 이틀 동안 조사를 받게 된다. 이틀사이 20여 시간의 심문을 받은 함석헌은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16일 동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이 기간 <사상계> 사에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할 만한 대역사(大役事)가 일고 있었다. 우선 장준하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서울 시경에 소환된 것이다. 두 차례는 피의자로였고, 세 번째는 장준하가 담당 조사관에게 자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처음 사찰과에 불러 갔을 때 조사관은 함석헌을 처음 연행하여 조사할 때와 같이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그 수사관은 양(梁)모 라는 자로 함석헌을 조사하는 도중 함석헌의 수염을 잡아당기면서, “영감, 뭐 대통령이라도 될 것 같애”라며 치욕을 안겼던 자였다. 장준하에 대한 태도역시 다르지 않았다. 장준하의 호칭에 “사장”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어투는 고약하기 그지없는 잡범 취급하듯 했다. 그 양(梁) 조서관의 책상 위엔 몇 권의 사상계가 펼쳐진 채 놓여있는데, 하나같이 장준하의 이름으로 발표된 권두언(卷頭言)들이었다. 특히 이번에 반포된 8월호의 권두언과 또 다른 함석헌의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붉은 색, 파랑색의 밑줄이 거의 전선(全線)에 그어져 있었다. 
 
“거국적 각성을 촉구한다”라는 제하의 장준하의 권두언 중 몇 군데를 구체적으로 장준하에게 들이대며, “당시의 권두언은 함석헌과 공모해서 쓴 것이 분명하다. 함석헌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되었다면 공모한 당신도 감옥에 가야 한다”며 윽박을 지르는 것이었다. 
 
   
 
그 수사관이 장준하의 권두언과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공모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 명백하다면서 장준하에게 들이대는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하나는 두 사람이 꼭 같이 “8.15는 참 해방이 아니었다”고 주장한 것. 다른 하나는 장준하의 권두언 끝자리에 쓰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의 글 제목이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쓰였는데, 공모 없이 그런 글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 이었다!
 
권두언의 결언으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우리 겨레의 진정한 해방을 위하여 깊이 반성할 때가 왔다고 본다. 의(義)의 씨는 뿌려야 의의 열매로 거두어 진다”라고 한 장준하의 그 글속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바로 그 공모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참으로 싱겁게 끝나버렸다. 그 글의 제목자체가 함석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는 소리를 높였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우리 <사상계> 편집기자 한 사람이 그 글을 함석헌 선생에게서 받아올 때 제목 없이 받았는데 ‘좋은 제목이 생각나거든 붙여 쓰시오’하셔서 그 기자가 정독을 한 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요. 나도 선생님의 글을 미리 전독, 정독을 했고, 그 말이 좋아서 인용했을 뿐이요. 정 내 말을 못 믿겠다면 제목을 만든 기자를 불러다 확인해 보시오.”
 
두 번째 불려갔을 때는 수사관의 태도가 한참 누그러져 있었다. 함석헌이나 장준하나 이승만 정권에 비판적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너무 분명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장준하가 자청해 그 조사관을 다시 만난 것은 옥중에 있는 함석헌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양(梁) 조사관은 장준하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을 넌지시 전해주는 것이었다. 
 
“바로 말하기는 나도 어렵고 조심스럽소만은 너무 걱정 마시오. 며칠 내로 석방 될 것이오.” 이 소식은 바로 <사상계>의 전 사원들에게 전해지면서 일대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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