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슬픔의 아이였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렇다. 슬픔은 중년이 된 지금도 그림자처럼 내게 붙어 있다. 그만큼 슬픔은 내게 익숙한 감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슬픔의 전문가인 것은 아니다. 나는 오랫동안 슬픔을 느껴왔지만 슬픔의 실체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지 못한다. 슬픔은 언제나 내 곁에 있지만 늘 알 수 없는 신비로 남아 있다. 그래서 말해질 수 없는 슬픔에 대해 말하려는 내 이야기는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내게 슬픔은 비극이 아니라 현실이다. 유년기부터 슬픔은 내 감정세계의 중심 자리를 지켜 왔다.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컨트롤타워를 책임지고 있다면 내 마음 속에서는 ‘슬픔’이 감정의 운전대를 쥐고 있다. 차이는 라일리 마음 안의 기쁨이 대표의식의 과잉으로 다른 감정들을 몰아붙이는 것과 달리 내 마음 안의 슬픔은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착해서가 아니다. 슬픔은 다른 감정을 지배하고 다그칠 여력이 없다.

슬픔에 익숙하다고 해서 슬픔을 좋아한다는 것은 아니다. 슬픔은 나를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한다. 그래도 내가 슬픔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은 슬픔이 삶을 지탱하고 지속하게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슬픔으로부터 배운 몇 가지.

# 슬픔은 관계적 감정이다.
슬픔은 공감을 호소하는 감정이다.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것 같은 슬픔도 타인의 공감을 바라는 물결을 일으킨다. 그 물결을 타고 나의 슬픔이 너의 슬픔으로 흘러 들어가고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으로 흘러 들어온다. 이처럼 슬픔을 관계적으로 느낄 때 나와 너는 인간이 된다. 인간은 서로 의지하고(人) 관계하는(間) 존재다. 관계적 인간은 공감하는 인간(homo empathicus), 연민하는 인간(homo sympathicus)이다. 맹자는 삶의 곤경에 빠져 슬퍼하고 아파하는 이를 보고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인간이 아니라고 했다(無惻隱之心 非人間). 슬픔에 공감하고 연민해야 인간이다.   

# 슬픔은 다른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 안의 기쁨, 분노, 슬픔, 행복, 두려움, 놀라움, 미움과 같은 기본 감정들은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들은 같은 마음의 수로를 따라 흐르면서 서로 만나고 부딪히고 섞이고 변화한다. 어느 한 감정이 마음의 물길을 막거나 오염시키면 다른 감정들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면 다른 감정도 온전히 느낄 수 없다. 기뻐하지 못하면 슬퍼할 수 없고 슬퍼하지 못하면 기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슬픔을 ‘부정적’ 감정으로 여겨 피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슬픔이 ‘어두운’ 감정이라면 기쁨은 ‘밝은’ 감정이다. 어둠과 빛이 둘이 아니듯이 슬픔 없이는 기쁨도 없다.    

# 충분히 울어야 다시 설 수 있다.
슬픔은 눈물과 가장 가까이 연결되어 있다. 눈물은 슬픔의 언어다. 눈물에는 슬픔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 충분히 눈물 흘리며 울 때 슬픔은 경감되고 치유된다. ‘울다’라는 뜻의 한자 ‘읍(泣)’은 ‘눈물 루(淚)’ 자에서 따온 ‘삼수 변(氵)’에 ‘설 립(立)’자로 구성되어 있다. 히스이 고타로는 이를 눈물을 흘린 후에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슬픔을 온전히 느끼고 표현하지 못하면 슬픔은 딱딱한 돌덩이처럼 우리 몸과 마음속에 박혀 일상으로 돌아갈 길을 차단해 버린다. 슬픔은 안에서 밖으로 흘러나와야 하는 감정이다. 슬픔을 겪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맘껏 울어도 좋은 안전한 관계와 공간이다.  

# 슬픔은 뛰지 않는다.
기쁨이나 분노와 같은 감정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금세 사라진다. 그런 감정의 순간성과 휘발성은 위험할 수도 있지만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다. 만약 기쁨이 몇 시간이고 몇 날이고 멈추지 않고 계속 된다면 심각한 병적 상태가 될 것이다. 분노도 너무 길게 지속되면 자신과 남을 모두 태워버린다. 하지만 한 번 생겨난 슬픔은 상대적으로 더 오래 지속된다. 슬픔은 서서히 맺혔다가 천천히 풀리는 감정이다. 느린 감정인 슬픔은 몸과 삶의 속도도 늦춘다. 다 이유가 있다. 슬픔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집중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상실한 것의 의미를 성찰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슬픔에는 최저속도제한이 없다.

# 슬픔은 집착이 아니다. 
슬픔은 좋아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상태를 상실할 때 생겨나는 반응적 감정이다. 상실한 대상은 회복할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되살아나지 않고 지나간 것은 되돌려지지 않고 잃은 것은 되찾아지지 않는다. 그렇게 상실한 것을 회복할 수 없기에 슬픈 것이다. 상실한 것에 대한 슬픔은 필요한 감정이지만 상실한 것에 대한 집착은 불필요한 괴로움을 일으킨다. 슬픔은 상실한 것의 회복이 아니라 이해를 통해 치유된다. 그것은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것, 상실도 변화의 한 양태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집착을 내려놓고 마음챙겨 상실을 이해할 때 슬픔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 상태로 인도한다.   

# 슬픔이 슬픔을 치유한다.
애끊는 상실을 겪으며 슬퍼하는 이에게는 세상의 모든 아픔과 슬픔이 낯설지 않다. 광주에서 〈오월어머니회〉를 만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이 가슴으로 고백한다. “저희가 이 일을 겪어보기 전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진도 팽목항을 찾아 온 ‘5·18 엄마’가 ‘4·16 엄마’를 부둥켜안고 말한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슬퍼하는 이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치유한다. 각자의 슬픔에 갇히지 않고 서로의 슬픔에 가슴을 연다. 그들은, 파커 파머의 말처럼, “부서져 열린 가슴(a heart broken open)”의 사람들이다.

인생은 생겨났다 사라지는 점(點)들을 이은 선(線)이다. 슬픔은 하나의 점에서 새로운 다른 하나의 점으로 나아갈 때 경험하는 과정적 감정이다. 그래서 C. S. 루이스는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했다. 슬픔은 상실한 것을 기억하고 애도하고 감사하게 하고, 새로운 만남과 사건이 생겨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슬픔이 있어 삶이 지속된다.

▲ 필자 정경일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에서 종교신학, 종교간 대화,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연구했고, 참여불교와 해방신학을 비교연구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평신도 신학자로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저로 Terrorism, Religion, and Global Peace, 『사회적 영성』 등이 있고, 역서로는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공역), 주요 논문으로는 “Just-Peace: A Buddhist-Christian Path to Liberation”, “Liberating Zen: A Christian Experience”, 「사랑, 지혜를 만나다: 어느 그리스도인의 참여불교 탐구」등이 있다.

 

정경일 원장 (새길기독사회문화원)  jungkyeongi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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