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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석방과 「사상계사(社)」의 환호성<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1.15 15:43

   
 
함석헌의 출소와 함께 사상계사(社)에는 그야말로 대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실 <사상계>사의 그 환호성은 옥중에 있는 함석헌에게 대단히 미안한 말이지만 함석헌이 옥중에 끌려가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함석헌이 사상계에 쓴 그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투옥된 사실은 경향 각지의 대소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놀랄 만큼 보도가 되었고, 아직까지 돼오고 있는 터였다.

사상계 사는 말 그대로 불이 날 지경이었다. 사상계사에, 사상계를 판매하는 경향 각지의 서점들에 책을 찾는 시민들의 전화가 그야말로 빗발치듯이 했다.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의 사람들이 직접 <사상계>사를 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사상계> 8월호는 더 이상 증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판매망이 공권력의 탄압아래 봉쇄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서점들은 예외 없이 책을 판매대에서 거둬들여야 했고, 특별한 고객들과의 거래도 극도의 조심을 해야만 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열심있는 독자들은 2, 3권의 값을 얹어주면서 까지 <사상계> 8월호라기보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구해갔다. 그러나 사상계의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사상계>를 뒤흔드는 <사상계> 가족들의 환호성 속에 크고 작은 고민거리들은 다 묻혀버렸다. <사상계>와 함석헌의 글이 이렇듯 나랏 땅의 구석구석까지를 뒤흔들어 놓게 된 것은 당시 이승만 독재정권의 만행과 유무의식 간에 “못 살겠다”는 저변의 아우성을 지혜롭게 모아낸 각 신문 민완(敏腕) 기자들의 <사상계> 못지않은 연대보도운동(連帶報道運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 같은 연대보도운동의 배후에 사상계 편집위원들의 줄기찬 유도활동이 있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었다 해도 말이다. 도하의 신문들이 마치 경쟁이나 하듯이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인한 함석헌의 필화사건을 앞 다투어 1면의 톱기사로 보도했다.

북진통일이 마치 국시처럼 관권에 의해 강제로 주입되고, 경제는 독점화로 굳어져가고, 백주에 야당출신 부대통령이 괴한의 총격에 의한 피습을 당하는가 하면(1956년 9월) 야당주최의 정치집회는 곳곳에서 조직폭력배들의 폭력행사장이 되고, 드디어는 진보당의 조봉암 대표를 비롯한 박기출, 김달호 등 10 여명의 간부들을 국가보안법위반혐의로 검거 투옥하는 등(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간첩죄로 처형됨. 필자 주), 온갖 불법이 자행되고 있어 뜻있는 언론인들은 그 분화구를 찾고 있는 때였다.

정치상황이 이렇듯 숨 막힐 듯 반민주를 연출하고 있는 때, 함석헌의 필화사건은 더할 수 없는 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언론계가 함석헌의 필화사건을 무기로 이승만 정권을 향한 가열 찬 반독재 투쟁을 자신 있게, 맘 푹 놓고 벌려갈 수 있었던 것은 함석헌의 당당하면서도 특이한 생(生)의 여정(旅程) 때문이었다.

함석헌은 일제치하에서 시종일관 조국을 위한 저항의 삶을 살았다. 그는 그의 제자들로부터 실로 존경받는 교사로 자타가 공인하는 터였지만 일본어로 한국역사를 교수 할 수 없다며, 그 일생을 바치기로 스스로 결단하고 부임했던 교단을 떠났고, 그 철권 무단정치에 저항하여 2년 옥고를 치러냈다. 이승만 정권이 오로지 그 정권의 유지를 위해 내세운 국시(國是)가 「반공」이었는데, 이 필화의 주인공 함석헌은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반공주의자가 아니었음에도 해방 직후 북한에 진주한 러시아군과 김일성의 공산집단에 의해 투옥·탄압·고문은 물론 그의 처형직전에서 탈출해온 인물이었다.

함석헌의 이 같은 이력이 당시 그의 필화사건의 배후에서 암암리에 민주언론투쟁을 벌려가는 인사들에게 천만다행의 힘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검찰은 그를 관제공산주의자를 만들려 갖은 획책을 동원했지만 함석헌은 이미 역사의 사람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국가권력도 어쩔 수 없는 마하트마(위대한 혼)로, 민중의 혼으로 영원한 바닥(하늘)에 섰다.

바푸(Bapu) 함석헌

필자는 지난 2010년 1월부터 2015년 3월까지 매월 마지막 주 1회씩 교계의 한 주간지 전면(全面)에 걸쳐 「바푸(Bapu) 함석헌 一代記」라는 주제의 칼럼을 쓴 바 있다. 「바푸」란 인도어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1948년 간디의 암살 이후 인도인들은 물론 네루의 정부까지도 공식명칭으로 간디를 그렇게 불렀다. 바푸라는 이름과 함께 또 하나 알려질 만큼 알려진 인도인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이름이 있다.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고난을 생명의 원리라고 설파한 간디는 ‘힘’에 미쳐버린 세계 구원을 위해 ‘마하트마’로 와서 ‘마하트마’로 살았고, ‘마하트마’로 갔다. 극에 달한 그 혼의 무게를 인도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신약성서 속의 그 저자의 이름조차도 불확실한 「히브리서」의 기자는 자기 조국의 명맥을 지켜온 대대의 자랑스러운 조상들을 당당하게 증언한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정의를 실천하고, 약속된 것을 받고, 사자의입을 막고, 불의 위력을 꺾고, 칼날을 피하고, 약한데서 강해지고, 전쟁에서 용맹을 떨치고, 외국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믿음으로 여자들은 죽었다가 부활한 가족을 다시 맞이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기도 하고, 채찍으로 맞기도 하고,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면서 시련을 겪었습니다. 또 그들은 돌로 맞기도 하고, 톱질을 당하기도 하고, 칼에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궁핍을 당하며, 관을 겪으며, 학대를 받으면서,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떠돌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덧붙이기를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일 만한 곳이 못 되었습니다.” 한글의 첫 성경 「개역」은 괄호 안에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했다.

인도인들의 가슴에 간디가 그랬다.

오, 바푸여!
위대한 혼이시여!

   
 
인도인들에게 간디는 생의 원천 같은 존재였다. 그가 있어 인류는 “네피림-곧 아낙의 자손”이라는 추명(醜名)을 벗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이제는 그들에게 한 위대한 철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Bapu」라는 칭호가 그 증거다. 필자가 그 교계의 한 주간지에 함석헌의 일대기를 연재 하려할 때, 함석헌의 이름에 선재(先在)된 「바푸」란 말이 문제가 되었었다. 신문사에서는 오히여 말이 없었는데, 주변의 이론(異論)은 거칠기까지 했다. 필자 역시 일편 그런감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필자의 평생에 체험된 함석헌은 간디를 「마하트마」니, 「바푸」니 한, 그 인도인들의 체험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확신이 있어 주변의 이론들을 개의치 않게 했다.

“어쩌면 생(生)의 도상에서 아비 없는 자식이 될 뻔했던 내가 역사의 「바푸」안에 안길 수 있게 되었으니….”

함석헌의 날선 독재와의 사움은 비폭력투쟁의 전형으로 알려진 간디의 싸움이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의 투쟁보다도 역경의 싸움이었다. 간디의 투쟁의 대상이 대제국영국이었고, 마틴 루터 킹의 투쟁 대상이 대 백인 권이었다는 데서 말이다. 나라 안에서 민족끼리 하는 싸움은 전력을 동원하는데 있어서도 어려울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것은 더욱 정신적이어야 했다. 더군다나 함석헌의 이승만 독재정권과의 싸움은 철저하게 조직 없는 단일로서 싸움이었다는 데서 더욱 그랬다. 함석헌의 힘은 오직 한 곳, ‘참을 지킨다’는 믿음을 통해서 오는 것이었다. 「참」, 참을 지킨다!

장준하, 계창호를 대동하고 함석헌을 찾다

장준하가 계창호를 데리고 용산구 원효로 4가 70번지 함석헌의 집을 찾아왔다.

“아이쿠, 계창호 군이 왔구먼!”

함석헌은 확실히 장준하 보다고 계창호를 더 기뻐하는 듯 했다. 함석헌이 다시 한 번 계창호를 향해 “아니 그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의 필자가 말야…” 함석헌은 물론 장준하, 계창호가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

장준하가 계창호를 데리고 함석헌을 찾아온 것은 장준하가 나름대로는 함석헌에게 줄 대단한 선물거리를 전달코자 함에서였다. 우선은 필화사건으로 투옥되어 20여일 옥중생활로 고초를 겪은데 대한 위로를 하는 것이었지만, 더 깊이 장준하의 중심엔 분명한 「민주사회」 구현의지를 교환하려는 것이었다. 사상계를 보다 분명하고 견고한 확성기로 민중을 일깨우는 큰 사명을 감당할 것이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함석헌의 기탄없는 지원이 더욱 요청된다는 것, 그러면서 장준하는 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제시했다.      
   
“선생님, 계창호군을 선생님과 <사상계>의 통로 역할을 담당토록 하겠습니다. 사(社)로서 다행스러운 것은 금년 편집부장 역을 사실상 대역해온 계군이 새해부터 정식으로 편집부가 구성이 되고, 그 편집부장직을 담당하게 됩니다. 글을 쓰시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사(社)에도 선생님 시간 나시는 데로 자주 들려주시고 글을 쓰시는 데도 사(社)에 비치된 자료들을 자유롭게 사용하실 수 있도록 계군을 통해 조치하겠습니다. 그동안 사상계의 논조가 지나치게 학구적으로 흐르지 않았나 하는 약간의 의구심이 있던 차에 선생님의 필화 사건이 터지면서, 편집방향에 적지 않은 변화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한 투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필자의 발굴 같은 경우 말입니다”

함석헌은 장준하의 말을 그저 묵묵히 경청(!)하고 있었다. “민주주의의 신장”, 그 말이 함석헌의 목을 메이게 했다. 그 말이 눈물 나도록 고마워서였다. 장준하와 계창호·함석헌이 합석한 지 한 시간여, 함석헌이 한 말은 한마디였다.

“고맙소”

장준하는 초막 같은 함석헌의 집 마루를 내려서며 다시 함석헌의 글을 부탁했다.

“선생님, 몸 맘이 풀리시는 데로 지난 필화사건으로 당하셔야 했던 옥살이의 소감 같은 글이 있었으면 합니다만…”

“알겠소” 한 시간여의 대화에 두 번째의 말 마디였다. 그래서 나온 글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이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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