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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1.22 16:01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글로 연행, 구속된 함석헌은 20일간의 옥고 끝에 풀려나오게 되는데, 함석헌은 이때 자신의 존재와 한국의 운명을 둘이 아닌 하나로 깊이 인식하게 된다. 이전 북에 있을 때나 자유의 땅이라고 믿었던 남으로 내려온 이후 거나 자신과 한국을 언뜻언뜻 하나로 느끼곤 하는 때가 없지 않았으나 금번 필화를 입으면서는 더욱 그랬다. 이전의 고난이 구체적으론 일본제국주의와 쏘련 군정의 탄압에 의한 것이었던데 반해, 이제의 고난은 내 나라 내 조국에 의한 것이다.

함석헌은 함석헌 자신이 본 한국사의 기조(基調)가 그런 것 같이 자신의 생(生) 또한 고난으로 점철(點綴) 될 수밖에 없을 거라는 아니, 고난으로 점철되어야한다는 역사의 음성을 듣는다. 그의 60년의 생(生) 역시 역사의 것으로 였지만, 금번의 필화사건을 겪으면서는 그 느낌이 더해온다. 사생활은 완전히 거두어 간 것 같은, 그러나 삶은 명(命)이시라, 울면서 불면서 주시는(?) 삶은 살아내야 한다. 함석헌에겐 「참」과 「생」보다 큰 종교는 없었으니 말이다. 함석헌에겐 어떤 진리, 어떤 종교도 생을 통한 여과 없이 존재할 수 없었다.

계창호를 데리고 자신을 찾아왔던 장준하가 돌아가면서 ‘석방소감’을 언급한 바도 있지만 함석헌 자신도 예 같지 않게 문제가 되었던 그 글의 동기를 풀어 밝히고 싶었다. 국가권력에 의해 오도되고 있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밝힌 다기 보다 오히려 통치세력의 불순하기 그지없는 의도를 조준하고 싶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불순하기 그지없는 통치세력이란 소위 남북의 집권세력을 의미한다. 남북의 집권세력은 예외 없이 현 체제를 고착화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북은 북대로, 남은 남대로 그 체제를 고수하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기보다는 절대의 비결이 서로간의 증오였다. 서로간의 증오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함석헌은 남북집권세력의 범죄적 행위를 투시했고 어쩌면 남북 집권세력의 그 같은 정책(?)으로 인해, 그래도 세계사적인 사명이 있어 5000년 죽음의 계곡을 해쳐온 역사가 그 명을 다하고, 분단은 영구화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거의 이르면서 다시 붓을 잡는다. 함석헌이 그 같이 두려움(?)을 품은 가슴으로 그 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쓴 것이 1958년인데 필자가 그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지금 2016년, 함석헌은 분단의 고착을 그 전략으로 하는, 혹은 전략으로 해 갈 이 역사적 범죄행위를 투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실로 그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분단을 보는 함석헌의 예언적 통찰

일찍이 함석헌을 일컬어, 「한국의 예언자」니, 혹은 「한국의 예리미아」니 하는 저널리스트들이 있었다. 한국의 역사를 「고난(苦難)의 역사」로 본 그의 예언자적 투시는 논외로 하고라도 몸으로 이루어간 그의 삶이 그랬고,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양(量)의 그의 말, 그의 글의 토설(吐說)들이 그렇다.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출판 한 함석헌 전집을 주목해서 읽노라면 일명 「한국의 성서」라 하기에 거칠 것이 없는 명문에 명저임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물론 「이단(異端)의 서(書)」라는 반격도 없지 않지만 말이다.

‘북진통일’, ‘멸공통일’이 마치 국시처럼, 어떤 측면에서는 이미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절대국책이 되어있는 때, 함석헌은 아니, 함석헌만은 딴 소리를 한다. 함석헌을 연행해간 서울 시경의 수사관들은 함석헌의 「국체거부(國體拒否)」를 추궁한다.

“당신은공산주의자 아닌가? 온 나라, 온 백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심혈을 쏟고 있는 때, 당신의 주장은 이적논리로 시종되고 있다. 공산주의를 가지고 국체를 변혁시키려는 것 아닌가?”
“국부이신 대통령을 위시해 정부를 그렇듯 공격하고 ‘그게 무슨 정부요, 관(官)이냐?’며 심지어 ‘민중 잡아먹고’ 운운하는 것은 정부를 부인하는 것 아니고 뭐냐? 더구나 ‘살고 죽기를 같이 해야 할 자가 저만 달아났다’니 대통령 각하를 두고 하는 말인데 국가원수를 그렇게 모독할 수 있느냐?”
조사관의 질타는 피의자에게 일언반구 반론의 기회를 허락지 않았다. 그야말로 질타였다. 드디어 조사관은 함석헌을 “영감은 용서할 수 없는 반역자야”했다.

“그때 남침한 공산군에 대하여 ‘돌아오너라, 너를 대항해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는 것이 좋다’며 국군들의 전투자체를 비난했다. 그것은 이북에서 선전하는 소위 평화통일을 찬성하는 것 아니냐?”
“공산당과의 전투에서 피 흘려 싸워 혁혁한 전공을 세워 대한민국정부가 수여한 훈장을 뭐? 떼버리라고? 영감. 당신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사형감이야, 사형감.”
드디어 한 조사관이 함석헌의 수염을 잡아 당겼다.
당기며 하는 말이 그랬다. “야, 이 고얀 놈의 영감아!”

그 함석헌의 수염을 잡아 당겼던 수사관의 수사관으로서의 생명은 꽤나 길었다. 1969년 필자는 종료경찰서 정보과에 「박정희3선 개헌」반대 운동이 화근이 되어 연행된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 정보과 제2계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필자가 한 경찰에 이끌려 그의 책상 앞에 섰다. 그는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퍼부었다.

“야, 문대골. 너 좀 맞아야겠어. 지금도 너 함석헌네 집 출입하나? 함석헌, 장준하 이것들 내가 아주 죽여버릴거야.” 그는 아직도 10여 년 전의 이승만 말기 함석헌의 그 필화사건 때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후 참 애석하게도 치유할 수 없는 중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함석헌에게 답변의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그를 들러 앉은 7,8명이나 되는 수사관들 앞에서 이미 수사관들이 심문한 내용들에 대해 답변을 시작한다. 물론 그 답은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답변이었다. 그 답변이 더욱 수사관들의 분통을 터트리게 했음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심문에 대한 함석헌의 답변이 이랬다. 후에 사상계에 발표되는 대로의 그의 답변을 옮겨보면,

   
 
“...그 글에서 가장 심히 받은 비난은 국체를 부인하는 것 아니냐, 혁명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내 종교적인 입장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현실적인 면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이다. 나의 종교, 나의 신앙이 나의 대한민국 국민 됨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진리를 믿기 때문에 대한민국에 더욱 충성을 하게 된다....부족은 하지만 나도 이 나라를 사랑하는 점에서 뉘게 뒤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정신적은 세계에 설 때, 도덕적인 입장에 설 때, 즉 다른 말로 하면 우리나라를 옷, 밥 문제만 해결해 주는 기관으로 보지 않고 정치경제로만 나라가 다 되는 듯 보지 않고, 그 국민의 각 분자가 도덕적으로 완전히 자주하는 인격을 가짐으로써 이루어지는 한 개 정신적 생활체로 볼 때, 나는 우리나라에 대하여 ‘이게 나라냐?’ 하고 싶은 여러 가지 책망거리가 있음을 본다. 그것은 도덕의 세계에서는 완전에 이르기 전엔 됐다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완전을 요구하는 정신의 나라에서는 ‘완전이냐? 그렇지 않으면 없다’ 의 법칙이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도덕에서는 조그마한 잘못이 있어도 ‘네가 사람이냐?’ 하는 비난을 받게 된다. 네가 사람이냐 할 때 그것은 그의 인격을 무시해서는 하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를 능히 완전에 이를 수 있는 인격으로 대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한 말은 그런 심정으로 들어야만 하는 말이다.”

불법 남침의 공산군에 대하여 ‘들어오너라, 너를 대적하여 죽이기보다는 나는 차라리 네 칼에 죽으리라’ 한 말, ‘동포를 죽이고 훈장은 무슨 훈장, 떼어버리라’한 말은 정신 나간 자의 소리라며 도저히 그냥 둘 수 없다는데 대한 함석헌의 반론은 마치 한 새 종교의 경전에 담긴 생명론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야 말로 순 종교적인 입장이 아니고는 토론할 수 없는 문제다. 나는 물론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의 평화주의를 믿는다. 원수를 사랑하기를 힘쓰는 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현실의 나라에서 군대 폐지, 전선에 있어서의 패배주의를 주장, 선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잘못된 일이다. 평화는 칼이 아니고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리 만큼 사람들의 혼이 해방돼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군대를 없앤다고 해서 평화의 시대가 오는 것은 아니다. 혼의 실력이 없이 군대부터 폐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물론 희생적인 사랑에 비할 수는 없지만 대적이 쳐들어 올 때 목숨을 아껴 도망하거나 항복하는 것은 비겁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대항하다가 죽는 것이 훨씬 더 도덕적이다. 그러므로 네 혼에 원수를 사랑할 만한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국가를 위해 용감히 싸우라. 그러나 그것으로는 참 이김, 참 평화는 얻지 못한다. 참 평화의 세계는 내가 스스로 희생이 되어 죄악의 값을 내 몸에 담당하는 사랑으로써만 이룰 수 있다.....평화주의는 총을 버리는 것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혼이 해방이 되는 날, 총은 저절로 버려진다. 혼의 힘을 길러야 한다. 다른 사람은 무엇으로 38선을 뚫고 무엇으로 공산주의를 정복하려는지 알 수가 없지만 나는 이 혼의 힘을 길러 그것으로 하자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아무도 그 밖에는 길이 없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함석헌의 주장이 북진통일의, 멸공의 국책아래 있는 안보요원(?)들에게 정상적인 논리로 들릴 수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였다. 「함석헌의 통일론」은 이상주의자의 극치를 보여준다. 좀 더 들어보자.

“오리새끼와 닭 새끼를 한데 몰아 한 우리에 넣어도 통일은 아니다. 우리 문이 열릴 때 오리새끼는 물로, 닭 새끼는 뜰로 갈 것이다. 무기로 잡는 것은 물질이지, 짐승이지 사람은 아니다. 사람은 그 양심을 때려서만 사로잡을 수 있다. 이북을 다시 점령한다 해도 사람 다 죽이고 서라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것이 승리인가? 그것을 통일이라 할 수 있는가? 그 사람 건지자고 공산주의 배격하자는 것인데, 뿔을 고치다 소를 죽인다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사람을 살리고 공산주의를 이기고 내 형제를 도로 찾는 길은 그의 양심을 찌르는 일 외엔 수가 없다. 무엇으로 양심을 찌를까? 몸은 칼로 찔러 잡을 수 있겠지만 양심은 나의 희생 외에 다른 것으로는 할 수 없다.”

광복 70년이란다. 외세의 압박에서 한국은 광복된 적이 없다. 광복이라는 게 분단을 몰아 왔으니 하는 말이다. 광복이 아닌 분단 70년, 분단된 두 집권세력은 ‘힘의 우위’를 점하기에 미쳐 왔다. 평화와 통일의 주장이 서로의 세력을 강화하는데 동원되어 왔다. 이상주의자의 허론(虛論)같은 함석헌의 통일론이 예언자의 통찰로 체감되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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