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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 <함석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답을 받다<함석헌과 장준하, 그리고 박정희>
문대골 목사 | 승인 2016.01.29 11:28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 밝힌다>를 정독한 장준하는 깊은 상념에 사로 잡혀간다. 그 글을 읽은 이후 며칠이 지나도 장준하는 그 생각에서 풀려날 줄을 몰랐다. 그 생각이란 함석헌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함석헌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이기도 했다. 제삼, 제사 간청을 해도 “난 못써”하며 글쓰기를 거부하는 것을 거의 해를 넘겨 기어코 그의 글을 받아 냈고, 그의 글이 <사상계>에 발표되면서 영업부의 사원들까지도 기뻐한 다기 보다 놀라워 하리만큼 잡지의 발행부수가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장준하가 함석헌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느낌이란 함석헌 그 자체에 대해서였다. 필화사건 이전에도 그 같은 느낌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글로 인해 함석헌이 옥고를 치르면서는 한 분명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 것이다.

지금 <사상계>에는 국내의 내로라하는 학자들 각 부문의 전문가들, 작가들이 망라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필자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장 가요, 문필가들이다. 이런 이들 모두가 장준하에게는 더할 수 없는 고귀한 전우들이었다. 심지가 더 할 수 없이 곧고, 글을 쓰면서도 끊임없이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지금 주어진 과제에 생을 불태워가는 장준하와 함께하는 모든 이 들이 그랬다. 그런데 그런 이들 중에서도 천근의 무게로 자신을 눌러오는 필자가 함석헌이었다. 장준하에게는 ‘목숨을 바쳐’라든가, ‘생명을 걸고’라는 말이 그렇게 낯선 말이 아니었다. 그가 타고나온 생(生)이 그런 것이었고 또 그렇게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장준하, 그는 도무지 인생을 계산할 줄 모르는 이었다. 그가 헤아릴 수 없으리 만큼의 명사(?)들을 그 곁에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이 같은 계산 없는 ‘계시적 삶의 자세’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헌데, 그 장준하에게도 몸 전체로 져내야 하는 하중(荷重)의 짐이 지워진 것이다. 함석헌이라는 짐이었다.

   
 
“선생님을 어쩐다?”
장준하를 둘러싼 그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장준하의 그 일심, 사생결단의 삶의 자세에 의한 것이었던 것처럼, 장준하가 함석헌을 일체로 느끼는 짐으로 진 것 또한 함석헌의 그 ‘죽어서 사는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 함석헌, 장준하는 똑 같이 학자가 아니었다. 함석헌의 말을 빌린다면 민중(民衆) 곧 하늘이 낸 대로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장준하는 ‘죽어서 사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을 아니 느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역사는 죽어야 할 사람이 요구되는 그 때, 죽어야 할 사람이 준비됨으로 이루어져 간다는 것, 장준하는 그 한사람의 모습을 그 사람 함석헌에게서 보았고, 그가 본 그대로 역사의 제물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그것이 함석헌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명답(名答) 이었다.

함석헌을 할 수 있는 한 골고다로 끌어가는 것, 장준하가 딱 부러지게 그렇게 작심을 했거나 아니했거나 간에 이후의 장준하의 함석헌에 대한 자세는 그랬다. 역사의 승화는 제물(祭物)을 절대적인 것으로 요구한다. 누가 뭐라거나 장준하는 함석헌을 그때 준비된 제물로 본 것이다. 역사의 한 차원의 진화를 함석헌에게서, 고난의 극점에서 서야 할 함석헌에게서 말이다.

함석헌을 포함한 장준하의 목전계획(目前計劃)

함석헌의 필화사건 다음해 1959년이 밝았다. 장준하는 예와 달리 전국 주요 지역에 출장하는 일이 눈에 띄게 잦아졌다. 대전에 다녀왔다. 원주, 춘천에 다녀왔다. 대구, 마산, 부산에 다녀왔다. 전주, 광주, 목포에 다녀왔단다. 거의 1959년 전반을 그렇듯 지방 나들이로 소일하는 듯 했다. 장준하가 지방 나들이에서 힘들여 수행하는 일거리가 있었다. 찾아드는 지역의 언론인들을 만나는 일, 사상계 독자들 중 열심 있는 인물들을 만나는 일, 더러는 재정적 후원자들을 만나는 일이었다.

그는 1차 전 지역의 출장을 마치기까지 자신의 출장 목적을 사원들에게 발표하지 않았다. 정말 일이 시작되었을 때 참여하는 모든 인사들이 큰 보람과 자랑스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구호는 큰데 사실은 보잘 것 없는 경우란 장준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장준하의 큰 장점이 매사에 치밀한 준비에 물불을 가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일이 시작 되었을 때 어떤 경우에도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 가히 그 점에서 장준하는 빼어난 사람이었다.

6월 어느 날, 편집회의에서 장준하는 <사상계전국순회시국강연회> 개최를 제안 한다. 지난해 12월 23일 개악제안(改惡提案)된 국가보안법의 통과를 위해 무술 경위들 300여명을 의사당에 난입시켜 야당위원들을 끌어내 지하실에 감금하고, 야당 의원 중 격하게 항의 반항하는 자들은 경찰 방망이로 가차 없이 두들겨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 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새해 2월 <사상계>는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라는 제목만으로 백지 권두언을 내보냈다.

그 몇 개월 전 함석헌의 필화사건이 있었고, 그 여진으로 인한 흥분은 아직 가시지 않은 터에 조금 전에는 공보처의 모 과장이라는 이가 원고 한통을 가지고 사상계 편집부장을 찾아왔다. 감히 사장을 만나야 겠다는 말은 없었지만 그 과장이라는 자는 편집부장 계창호에게 가져온 원고를 건네주면서

“이 원고를 다음호에 싣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계창호 편집부장은 예의 그 과장을 사장실로 안내했다.
“이분이 공보처에서 왔다는데 원고 관계로 왔답니다.” 계창호는 원고를 장준하 앞에 놓고 조용히 돌아나갔다. 원고의 제목은 “국부(國父) 이승만 박사의 계시(啓示)한 민주주의 이념>이라 했다. 장준하는 제목을 읽고도 아주 조용했다.

장준하의 또 하나 성격적인 자산이, 열불날 일 앞에서도 지독스러우리만큼 냉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제목 자체부터 전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장준하는 불가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다음에 이어지는 장준하의 말은 귀를 기울여 듣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큼 낮은 음성이었다.

   
 
“편집위원회에 넘기겠습니다. 편집위원회에서 불가판정이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별도로 가부연락은 하지 않겠습니다. 원고의 등재 여부는 다음 호 잡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공보 처장 전성천(全聖天)이 직접 보냈다는 그 서기관은 “네, 알았습니다. 한 마디를 남기고는 돌아갔다. 너무 싱겁게 일이 끝나는 것 같았다.

사건 소식을 알고 난 몇몇 사건들의 이야기는 달랐다. 그 글을 어떻게 제목만이라도 좀 손을 대서 실어보면 어떠냐? 는 제안이었다. 잡지를 살려놓고 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잡지가 폐간이라도 되는 날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몇 달 전 군정법령(軍政法令) 제 38호로 폐간당한 경향신문의 이야기까지 등장했다. 대표의 책임은 무거웠다. 목전에 놓인 문제해결에 있어 대표는 고독했다. 국가 권력이나 제도권의 불의에 대결할 땐 더욱 그랬다.
“이런 걸 (공보처에서 보내온 그 원고: 필자주) 실으면서 까지 구차히 사느니 차라리 죽게 되면 죽는 거지…….” 그 원고는 싣지 않았지만 다음 달에도 그 다음 달에도 권부로 부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장준하는 이 같은 사실들을 되새기며 <전국순회시국강연회>를 제안한 것이다. “시국강연회라 하면 대정부 투쟁 같은 인식을 줄 수 있어 그렇잖아도 정권과 맞서고 있는 감을 주고 있는 터에 작전상으로 좀 문제가 있는 듯 한데 문화강연회라 하면 어떻겠소. <사상계전국순회문화강연회>, 중요한 것은 우리 사상계가 해야 할 말을 하는 데 있는 것 아니요.”주간 안병욱의 제안이었다.

모두가 ‘좋다’했다. 이렇게 해서 제1회 사상계 전국 순회 문화 강연회 팀이 떴다. 제 1회 강연회 주 강사는 양호민, 안병욱, 황산덕, 한태연 그리고 이 강연회의 간사로 취재부장 이문휘(李文揮)가 따라 붙었다. 이름은 이미 사상계를 통하여 알려질 만큼 알려진 인사들이요, 정말 유명세를 타고 있는 교수들이었다. 이 신선하고도 당차기 그지없는 교수들이 내려온다니 그야말로 강연회가 이루어지게 되는 현장에서는 야단도 보통 야단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미 지역마다 장준하의 치밀한 사전 준비 작업이 있었으니...

핵심은 함석헌을 대중 앞에 불러내는 것

장준하는 이미 한번 다녀온 영남 쪽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부산을 찾았다. 역시 지역신문의 발행인들, 지역의 지사(志士)들. 특히 열심 있는 <사상계>의 독자들을 찾아 금년 가을 쯤 아니면 내년(1969년) 봄 쯤 지금 호남지역에서 개최되고 있는 <사상계 전국 순회 문화 강연회>를 이곳에서도 개최하려 한다면서 물밑작업을 지금부터 치밀하게 좀 해달라는 그런 요청을 계속했다. 장준하는 영남 몇 지역을 거쳐 지금 강연회가 개최되고 있는 광주로 가 그 팀들과 합류했다. 공동 주최 측인 전남일보는 “1000명이 넘는 청중, 사상계전국순회문화강연회”를 대서특필했다.

이렇듯 사상계의 강연회가 계속되는 중에서도 장준하에겐 또 다른 계획이 하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미 신격화 되고 있는 함석헌을 불러내는 것이었다. 장준하에게는 사지(死地)에서도 시들 줄 모르는 꿈이 있었다. 그것은 그 생의 이유이기도 했다. ‘민(民)으로 역사의 주(主)가 되게 한다’는 것이었다.

한때 함석헌의 절필선언 문제로 약간의 간격이 없지 않았으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고, 그 글로 인해 함석헌이 필화를 입는가 하면 출감하여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고, 그 글로 인해 함석헌이 필화를 입는가 하면 출감하여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풀어밝힌다’>를 다시 발표하면서, 장준하는 함석헌에 대해 어떤 일체감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장준하의 머릿속에, 가슴 속에, 함석헌과 함께 직접 민중을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첫 구도로 나타난 것이 <사상계전국순회문화강연회>라는 것이었다.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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