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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산업교회와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눈물<파독광부 교회를 졸업한 이야기 16>
최정규 | 승인 2016.02.03 13:48

   
▲ 70년대 시내의 모습.

1979년 봄. 5년 만의 귀국이었다. 김포공항에 도착하니 큰 동서와 처형들이 마중 나오셨다.
군자동에 큰 동서댁에 도착하자 처형들은 기저귀찬 딸을 껴안고, 반가움에 겨워서 울었다.
난 주눅이 든 기분이었다. 엄마(동생)도 없이 딸 데리고 온 꼴이 되어서 말이다.
이렇게 처음 처가 분들을 만났다.

당시에는 파독 광부 3년 계약이 끝나면 연금(Rente)을 특별적립금 형태로 결산해서 한국에서만 받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나는 연금을 찾아서 미아리 태영 아제 집에 전해 드린 후, 서울역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그런데 내가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갑자기 경찰 세 명이 버스에 오르더니 나에게 내리라고 했다. 난 바짝 긴장했다.
 
간첩으로 오인받다

나는 에발트 광산 사건 때 노무관이 “남산에 가고 싶냐?”며 겁주던 말이 생각났다. 경찰들은 나를 데리고 좁은 골목길로 들어서 한참을 더 갔다. 그들이 멈춘 곳은 창고 같이 생긴, 내부가 넓은 어떤 건물이었다. 그곳에는 경찰과 수사관 같은 사람들이 10여 명 정도 있는 거 같았다.

그들은 우선 몸수색과 내 소지품 조사부터 했다. 그들은 한참 내게 이것저것 묻더니, 갑자기 한참 동안을 크게 웃었다. 문제의 발단은 내가 버스를 탄 미아리부터 시작됐다. 버스 정류장 아줌마가 “토큰이 뭐냐?”고 묻는 나를 ‘간첩’이라고 생각해 경찰에 신고를 한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 감시와 신고를 강요하는 반공 사회였다.

나와 얘기를 나누던 경찰과 수사관들은 갓 귀국한 파독 광부가 토큰이 뭔지 모르는 건 당연하다는 걸 인정한 것이다. 나를 신문하듯 질문을 쏟아내던 한 경찰은 내가 가지고 있던 ‘4색 볼펜’이 보기 좋다며 달라고 하기에, 얼른 주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난 기분이 몹시 찜찜했다.

경동교회 옆에 있는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무실로 들어서니 어떤 아줌마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신인령 선생님을 찾아왔다”고 했더니 그 아줌마가 나를 한참 보더니 “제가 긴데요” 했다. 신인령 선생(노동법 전공, 전노협 후원회 사무처장,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했다)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나도 한참 머뭇거리다가 정 선생이 써준 편지를 드렸다.

“반갑습니다. 잘 왔어요”
“선생님 반갑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
난 내가 방문하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신인령 선생은 다음 날 새문안교회에서 기독학생들의 주관으로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있는데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니 함께 가자고 했다.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내내 나는 울기만 했다. 자료나 전단지로 소식을 접하다가 현장에 함께하니 눈물만 났다.

기도회가 끝나고 나가려는데 경찰들이 막았다. 청년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힘차게 구호를 외치며 밀고 땡기고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자료집에서만 보았던 ‘투쟁의 현장’에 직접 서보니 나는 겁이 났던 기억이 새롭다.

그 다음 날 나는 신 선생님과 함께 인천법원으로 갔다. 동일방직 이총각 지부장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나는 거기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았다.

수갑을 찬 이총각 지부장과 구속자들이 웃으며 버스에서 내려오는데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울부짓으며 “지부장님! 지부장님!” 하며 달려갔고, 경찰은 이들을 막았다.
그때 나의 눈에는 이총각 지부장이 예수님처럼 보였다.

   
▲ 70년대 인천산업선교회.

재판이 끝나자 동일방직 노동자들은 구속자를 싣고 가는 버스를 막기 위하여 달리는 버스로 몸을 던지며 경찰과 치열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나올까? 그 노동자들이 존경스럽고 훌륭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 다음 날에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를 방문하여 담당자와 인사하고, 방문 목적을 이야기 했더니, 좀 기다리는 동안에 교회를 둘러보라고 했다. 그곳은 독일에서 자료로 보았던 사진들과 투쟁소식지, 포스터 등이 가득해 마치 전시관 같았다.

내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그것들을 보고 있는데 노동자들이 와서 잠깐 인사를 했다. 나는 “독일에 있는 한인 광부, 간호사들도 여러분의 투쟁에 함께 분노하고, 연대합니다. 여러분들처럼 열심히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부산으로 간다고 했다. 섬유연맹의 김 거시기가 통일주체에 입후보해서 라고 했다.

황주석, 최한배, 정금채를 만나다

황주석 선생은 만나기가 어려웠다. 만날 장소를 몇 번이나 바꿔가면서 만나야 했다. 아주 좁은 골목의 작은 밥집이었다. 그는 아마도 당시 수배 중이었던 거 같았다.

“반갑습니다. 황주석입니다. 그런데 저를 만나자고 했나요?”
강대인 선생이 써준 편지를 전했다.
“국내에서 활동할 생각입니까?”
“아닙니다. 독일에서 결혼해 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황선생은 한국의 여성노동자들의 현실과 소그룹 운동에 대해서 아주 쉽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리고는 시간이 없다면서 독일로 가기 전에 한 번 더 만나자고 하고 떠났다. 황선생을 만나고 난 다음 오후에 잠실로가, 독일에서 학습조 지도 선생이 추천해준 최한배 선생, 정금채 선생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노동자로 열심히 살고 싶어서 왔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세요”라고 말했다. 
 
책을 훔치다

그러나 별로 말이 없었다. 그냥 막걸리만 잔디밭에 앉아서 마셨다. 밤이 되어서 최선생 댁에서 잠을 잤는데 그는 나에게 책 두 권을 줬다. 카톨릭노동청년회에서 발간한 ‘구원의 빛’과 ‘노동자의 길잡이’이였는데, 이 책을 통해서 훗날 많은 걸 배웠다.

『8억인과 대화』(리영희 지음)라는 책이 있었다.
중국에 대한 책인데 당시 금서라서 그걸 살 수가 없었다. 나는 최 선생 책꽂이서 그 책을 발견하고는 말없이 훔쳐왔다. 혹시나 공항에서 걸리까봐 책 표지를 야한 소설책으로 바꿔서 독일로 가져와 학습조와 읽었다.

신선생님께 전화했더니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사례발표회가 있다고 해서 나도 참석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평생 나를 노동자로 살아가게 해준 사람들을 만났다. 인천 어느 여성사업장 노조탄압사례 발표회가 끝날 무렵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새로 일하게 된 간사로 김세균 선생이 소개됐다.

장충동 족발집에서 뒷풀이를 하고 헤어지는데, 걸쭉한 느낌을 주는 분이 예쁜 여성들과 함께 나에게 오더니 “오늘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노조에 예쁜 여성노동자들이 많습니다. 언제고 오세요” 하면서 손을 내밀어 인사를 청했다. 지금도 한국가면 찾아가는 영등포 원풍모방의 방용석 지부장이었다. 내 삶에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뜨거운 동지애와 정은 그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노동운동과 연관된 방문 일정이 끝나자, 시골 고향집과 처갓집을 갔다. 나는 딸을 데리고 시골 고향 집으로 향했다. 부안 집에 도착하자 어머님은 딸을 껴안고 “아이고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우셨다. 아마도 엄마 없이 아빠랑 온 것이 더 안쓰러워 그랬을 거다.

나는 한국에 간 목적이 있기에 시간이 없어서 시골집에서는 하룻밤만 자고 다시 서울로 출발해야 했다. 집을 나서는데 어머님이 부르시더니

“야! 둘째는 언지 낳을 거여?”
“오메 엄니, 둘 다 일헌 게 애 키우는 거 힘들어서 몰라요”
“야! 종자는 만들어야 헝게. 그러면 내가 가서 키울게. 허니 종자는 만들어라!” (딸이 아닌 아들을 낳으라는 이야기다)

서울에 올라와서 큰 처형과 넷째 처형 함께 직행버스를 타고 제천으로 간 다음, 거기서 택시를 타고 영월읍으로 갔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이 그 방법뿐이었다고 했다. 영월읍 처갓집에 도착하여 처할머니와 형님(처 오빠), 형수를 만났다. 가는 데마다 사람들이 딸을 안고 다니고 싶어 해서 나는 한 번도 안아볼 기회가 없었다.

처갓집에서 생긴 재미있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해도 될 것 같다. 내가 한국 간다고 했더니 울 마누라는 걱정이 되어선지 몇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서울 도착하면 큰 언니 집에서 있으면서 방문 목적에 따른 일정을 진행하고, 영월 오빠 집에 가면 오빠가 술을 좋아하니까 무조건 술을 많이 대접하라”고 일러줬다.

그래서 나는 형님께 솔직히 이야기를 했다.
“형님! 술을 사드리라는 마누라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어쩔 것입니까?”
“아, 내가 지금 치과에서 치료 받고 있어서 물어 봐야 허는데...” 하고는 병원에 전화를 하셨다.
전화를 끊으시더니 “오케이” 하셨다.

형님, 형수님, 넷째 처형, 나 이렇게 보신탕 한 그릇씩 들었다. 형님과 나는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나왔는데 형님이 내 옆구리를 찌르면서 “야! 최서방, 니가 왔으니 어쨌든 동네 친구들 몇 사람 불러서 한잔 더 해야 겠다. 자네도 함께 헐꺼지?”
“예, 당연히 형님과 함께 합니다”
좀 기다리니 형님이 오셨다. “최서방, 가자!” 해서 따라 나섰다. 형님이 운영하는 영랑사 바로옆 농협판매점에 들어서니 형님 친구 세 분이 계셨다. 우선 큰절로 인사를 했다.
 
“독일에서 천사 같은 신정남이랑 함께 사는 최정규입니다. 형님들의 넓은 아량으로 잘 봐주세요”(형님과 한잔했으니 잘 할 수 있었다) 하면서 “대접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했더니, 형님이 주문을 다 했다.

농협판매점이라 우선 병맥주(750cc)와 오징어 구이 등등을 시켰다. 맥주가 스무 병이나 없어져도 내가 끄떡없자, 형님은 또 시켰다. 또 스무 병이 없어져도 똑같았다. 그러자 자리를 마무리하고 형님과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처갓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헌데 그때까지 처할머니, 처형들, 형수님은 자지 않고 계셨다.

형님이 또 “최 서방!”하고 나를 불렀다. “예, 형님!”하자, “나 오늘 너무 기분 좋다. 지금까지 딸 여섯인 우리 집에 매제들과 오늘 같이 멋지게, 재미있게 술 한 잔 마셔본 적도 없고 또 술 마시기에서 져본 적도 없는데, 너! 너무 잘 마신다. 그래서 다시 여기서 시작한다” 하시더니 형수한테 “맥주 가져와!”했다.

형님과 내가 마주앉아 있는 뒷마루 뒷 건물에 계신던 처할머니, 큰처형, 넷째 처형, 형수님이 우리를 보고 계셨는데 형님은 맥주로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셨는지 느닷없이 노래부르기를 하자고 했다.

형님은 맥주를 물처럼 흔하게 마시는 독일을 잘 모르고, 맥주만 마셨으니 내가 잘 견딜 수 있었는데 이번엔 노래자랑대회가 시작되었다. 처가 분들은 밤이 깊어 가는데도 둘이 부르는 노래에 크게 웃으시면서 응원전도 하신다. 나도 예전에 농사지을 때 잘 부르던 남진, 남일해, 배호, 나훈아, 이미자, 현미, 박재란 등등의 떠오르는 노래들을 마구 불러댔다.

“야! 최서방, 그만하자. 내가졌다. 딸 여섯인 우리 집에 다섯째 매제 최서방이 나를 이긴 유일한 사람이다" 마침내 형님은 손을 들으셨다.

   
 

그 다음 날 서울로 올 때 형님은 운동복 한 벌을 선물로 주셨다. 서울에 올라와서 선물 이야기를 했더니 동서들이 “아마도 자네가 선물 받은 첫 번째네” 하셨다. 형님은 무척 구두쇠라고 소문이 나 있었는데 나는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했다. 후일에도 나를 만나면 친동생처럼 잘해주셔서 다른 동서들이 “최서방! 어떻게 한 거야?” 하면서 의아해 했다. 나의 처갓집 첫 방문을 이랬답니다.

독일로 돌아오기 전날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세무서에 근무하는 셋째 동서가 큰 동서를 찾아와 “아무래도 최서방이 수상합니다. 신고해야 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했다고 했다.

아마도 몇 번 만날 때마다 노동자들의 현실을 말하면서 정권에 대한 비판적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세무공무원이었던 동서가 자기 걱정 때문에 나온 이야기였을 것이다.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말기는 거의 ‘광기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그 소리를 들은 큰 동서는 “내가 책임질 테니 가만히 있자!” 했다고 하셨다. 군자동 큰동서는 재일 교포이자 호남 사람이었는데 김대중 선생 지지자였다. 그래서였는지 나를 동생처럼 대해주면서 늘 내 편이 되어주셨다. 나중에 말씀하시길 조카 김 옥두가 김대중 선생 비서인가로 일하고 있었다고 하셨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처형들이 사준 딸래미 예쁜 옷을 잔뜩 들고서 독일로 돌아왔다.

오펠(Opel)자동차에 입사하다

도착하자 마누라가 오펠자동차에서 신규 사원을 모집하니 빨리 가보자고 해서 그 회사에 원서를 내고 입사하게 되었다. 다국적기업인 지엠(GM)의 아담오펠 자동차공장 노동자로 일하게 되면서 나는 엄청난 세상 공부를 하게 된다.

한국 방문을 마치고 온 나는 학습조에 한국에서 활동한 내용을 보고하였다. 특히 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 출자신용협동조합, 공동투쟁 현황,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 등등을 전해주면서 감춰서 들고 온 책과 소식지들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연극과 현장으로 찾아가는 선교, 에발트 광산 투쟁을 통해서 모인 사람들로 공개적인 조직 활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모두 박수를 치면서 그렇게 하자고 했다.

1979년 7월 23일 오펠공장 출근이 시작됐다. 정말로 신났다. 내가 하는 일은 집채만한 커다란 1번 프레스에 철판을 밀어넣고 스위치 누르는 거였다. 물론 봉급도 예전 직장보다는 거의 15%가 많았다. 나도 이제 노동자로서 노동조합에 가입도 하고, 독일 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하고 배우겠다고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박사가 학습조 사람들에게 모이라고 했다. 밤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그는 우선 앉으라 하더니 포도주를 한 잔씩 따랐다. “방금 연락이 왔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총에 죽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제 민주화는 가까이 왔으니 그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잔 합시다”
 
우리는 모두 어리둥절했다. 그 영원할 것 같은 독재자가 자기의 부하의 총으로 죽었다니 말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도 빨갱이 누명은 벗겨지는 건가요?” 누가 물었다. “물론이지” 사람들을 기숙사에 실어 다주고 집으로 와서 맥주 한 병 들고 마시면서 다시 한 번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생각해 보았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산다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 때 그렇게 쉽게 민주화가 올 것 같지 않았다.

   
▲ 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당시 신문기사.

한마음조합 결성

박정희 대통령 죽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제 한국의 민주화는 될거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공개 조직하는 거에 대해서도 이제 그런 활동이 필요하지 않는데 굳이 만들 필요가 있냐는 의견들도 나왔다.

“우리는 민주화의 요구가 파도처럼 전국을 휩쓸게 분명하지만 18년간의 군부독재에 기본 권력이 그대로 있습니다. 지금 상황도 국민적 요구로 물러난 것도 아니고, 내부의 사건으로 발생되어 일어났기에 권력은 여전히 그들이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그동안 추진한 공개 활동 조직을 결성하였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함께 해온 겔센킬켄 광산, 에린 광산, 에발트 광산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조합’을 결성했다. 1979년 11월에 하팅겐의 광산 사택에서였다. 이 한마음조합이 80년대 전 독일을 신나게 뛰는 활동가들을 만들어 낼 줄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최정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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