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이름의 책이 너무 두껍다. 종이는 얇아 잘 붙어서 넘겨지지도 않는다. 질척거린다. 어떤 사람의 책은 양장본이고, 어떤 사람은 아예 표지가 없기도 하다. 인쇄가 잘된 비싼 책이라면 페이지도 잘 넘어가기 마련. 그런 책은 챕터도 여러 개다. 

 

아무튼 우리는 끊임없이 책장을 넘긴다. 술술 넘어가든 꾸역꾸역 넘기든, 멈추는 법이 없다. 중독된 것처럼 끊임없이 넘기는 책장에 슬슬 물려할 때쯤 책은 대단원을 맞이한다. 그리곤 ‘끝’ 

 

남아 있는 책장을 넘기는 것은 사랑의 책을 읽는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어떤 결말에 도달하면 우리는 더 이상 책장을 넘기는 것을 포기한다. 그리곤 다음 책으로, 신뢰라느니 정이라느니 하는 그런 이름의 두껍고 오래된 책을 넘기기 시작한다. 

 

 

우리 시대의 사랑, 아니 대부분 모든 사회의 사랑은 ‘강요’와 ‘강박’에서 시작된다. 노동시스템은 가족의 재생산을 통해 유지되며 노동으로 인해 자본주의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탈연애’는 사실 의도치 않게 체제저항적 성격을 띄게 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솔로들에게는 유감이지만,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는 이리 큰 의미가 담겨져 있다. 

 

그러니 그 옛날 조선의 임금 성종은 30살이 되도록 결혼 못한 가난한 집안 자손들의 혼수비용을 대주며 결혼을 장려했고 이 같은 일을 아예 <경국대전>에 넣어 후손들도 지키도록 하였다. ‘사랑’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연애’가 장려 받는 사회, 남의 연애사에 그리도 관심이 많은 변태적 사회구조의 이면에는 이러한 계산이 깔려있다. 

 

우리의 노동력이 잉여자본을 창출하는 데에 가장 값싼 (최저임금 6,030) 재료이니 만큼 가족의 재생산이 활발할수록 자본주의 시장은 옳다구나 풍악을 울리며 호재를 외치는 것이다. 다시 한 세대를 유지할 힘을 얻기 때문이다. 

 

‘사랑’의 저자는 단 한명? 이런 음모론! 

 

대체 이 따위 불만토로가 사랑이라는 이름의 책의 페이지를 넘기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를 만큼 관계가 있다. 젊은 나이의 사랑놀음이 하나의 결과로 직결된다는 것, 모든 소설이 같은 결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우리의 책이 조작되었으며 그 작가가 어쩌면 단 한명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음모론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지가 않다. ‘사랑’ 이데아처럼 존재할 수 있다면 결혼평균연령(서울기준) 남성 32세, 여성 30세가 이리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질 리가 없다. 20살에도 결혼하고, 25살에도 결혼하고, 때에 따라 격렬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결혼에 골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과 타이밍이 맞아 떨어져야 결혼을 한다는 것인데, 그 상황과 타이밍이라는 것이 우연찮게 대부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이다. 대학졸업, 군대문제(?)해결, 취직과 혼수가 해결되면 결혼도 자연스럽다. 다들 나름대로 특별하게 사랑했다고 하지만 그 결말은 동일하다. 이를 경험했던 전 세대의 ‘어른’들은 그래서 사랑을 ‘경험’이라 말한다. 세대교체가 되고나면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일로 다음 세대에게 같은 말로 되풀이 된다. ‘이데아’는 없다. 오직 ‘경험’과 하나의 결론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사랑은 역할적 측면에서 늘 ‘이데아’여야만 한다. 

 

자본가와 체제의 유지자들이 노동자에게 ‘장인정신’을 이야기 하며 헌신을 요구하듯 사랑하는 이들에게 불꽃처럼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한다. 그런 면에서 이데아적 사랑에 성공했던 사람들, 즉 응답하라 시리즈의 주인공들과 같은 드라마틱하며 순결한 사랑의 스토리는 취직신화처럼 회자된다. 아니면 얼굴한번 못보고 결혼했지만 평생을 화목하게 살았던 기적과도 같은 노부부의 마지막 모습을 방영한다든가 하면서 말이다. 

 

아, 그러나 그것은 기적이다. 체제의 온갖 모순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골인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신화이지 대안이 될 수가 없다. 그러한 예를 우리 삶에 평범하게 적용하려 부단히 노력하다가 결혼이라는 결말에 골인한다. 어설픈 촌극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책의 저자는 단 한 명이다. 다양한 변주는 해석에 불과하다. 조지 오웰의 1984의 주민들처럼, 자신의 삶은 그렇지 않다고 믿을 뿐이고. 

 

결국 사랑이라는 책을 덮어야 

 

진짜 사랑은 존재할까? 글쎄, 다만 그 존재여부를 묻는 것조차 허락해선 안 된다고 믿고 있다. 결국 사랑이라 포장된 가짜 벽을 부딪치고 부수어 그 너머 실존의 세계에서만 마주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리라 그리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단 한가지의 방법은 사랑의 책을 덮는 일이다. 강박증처럼 사랑(연애)을 찾아 헤매지 말고 자연스러움에 몸을 맡겨야만 한다. 사랑을 언급하려하고 설명하려 하는 것, 정의하려 하는 것은 결국 특수한 가치를 보편적 가치로 전락시켜 보급형 사랑으로 평가절하 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랑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잘 단도리 치시라. 유치해지니까.   

 

책장을 완전히 덮고 던져버려라. 아니 기왕이면 태워버려라, 분서갱유를 해도 모자를 정도다. 숨어있는 작가를 찾아내 광장으로 끌고 나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매우 치며 이 작자가 사랑에 쏟은 모든 시간과 노력, 물자와 감정의 책임자임을 밝히고 재판을 받게 하라. 

 

가장 진실한 고백일수록, 가장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있는 법이다. 연애강의도 많고 모범적 연애에 대한 책도 많다 하지만 그 또한 사랑이라는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기 위한 갖은 음모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의 사랑을 맥도날드 런치세트 쯤으로 취급하는 이들에게 분노하고 강박에서 과감히 벗어나길 추천한다. 연애를 하지 않는 상태를 죄악으로 여기고 계속해서 권고하는 자들에게 ‘꼰대’라 말할 수 있길 바란다. 

 

여러분의 사랑이 제법 특수하다고 믿으며 그것을 연인에게 확인하는 유치한 일은 더더욱 하지 않길 바란다. 대답이 정해져있는 질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불안을 달래는 것만큼 안쓰러운 일이 어디 있을까? 또한 대단히 특별한 연애를 바라며 괜히 꽁해 있지 말길 바란다. 만나자는 시간에 나타나지 않아놓고 감성 카톡이나 보내며 자신이 거침없는 야생마이며 아무도 나를 구속할 수 없어 라는 식의 무례한 태도가 진실 된 사랑이라고? 천만에 말씀! 이미 우리의 전지전능한 작가는 그 또한 하나의 복선으로 예비해놓고 계시다. 자꾸 무언가 투영하거나 의미부여 하지 말란 말이다. 그냥 자연스럽게 감정에 충실한 것이 우리가 사랑의 책을 덮고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임을 인식하시라. 그리고 그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알기 바라고. 

 

대체 이 글의 결론이 뭐냐고? 최근의 연애 대부분을 실패한 나의 자조적 빡침에 불과하지 않느냐고? 아니! 그보다 나는 연애와 일상을 구분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탈연애주의자다. 책장을 덮고 보니 내가 무엇에 그리 연연했는가, 무엇을 놓치고 살았는가를 깊게 느꼈을 뿐이다. 일종의 시스템처럼 노력해야 하는 부분에서 노력하고, 참아야 하는 곳에서 참고, 지켜야 할 것을 지켰더니 어느새 모범적으로 책의 중반을 넘기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그것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고,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책장을 덮는 것을 선택했다. 

 

여러분의 책은 어떻게 포장되어 있을까? 제법 건방진 소리를 했지만 나는 단지 한권의 책을 덮었을 뿐이다. 그저 던져진 삶이고 찾아온 사랑일 뿐인데 그렇게 의미부여 하다 놓치지 말자는 외침 정도로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벌써 2월, 지나간 시간들과 살아갈 시간에 진실하자. 각본처럼 살기엔 너무 아까운 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