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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자술서<임마누엘 광야 40년>
정상시(안민교회 담임목사) | 승인 2016.02.12 13:36

본 연재는 한신대 신학과 75학번 동기회 동기 문집인 <임마누엘 광야 40년>에 엮인 글 중 10편을 게재한 것입니다. -편집자주-

머리말

회상과 전망

정상시 (한신 75 동기회 회장)

그해 봄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우리가 한신에 입학하여 처음 교문에 들어섰던 40년 전인 1975년 3월 개나리, 진달래가 만발해 있었지요. 진달래보다 아름다운 싱싱한 웃음꽃도 만발했습니다. 그 향기가 참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40년 그 향기를 맡고 살았는지 모릅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살벌한 겨울 공화국, 유신 군사독재의 한복판에 서 있는 줄! 에덴동산 같던 그 해 봄은 짧았습니다. 입학 한 달 만에 강제 휴업령이 내려졌고 차가운 철제 교문은 굳게 닫힌 채 우리는 쫓겨났습니다. ‘기관원’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점령군처럼 드나들었습니다. 우리는 비로소 ‘때의 징조’를 분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렇게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한신 75 동기는 유난히 고난을 많이 겪었습니다. 1977년 봄 ‘4.7 한신고난선언’사건과 그로 인한 여러 동기들의 제적, 투옥은 그 대표적 사례일 뿐입니다. 이후 1970-80년대, 군사독재 우상숭배에 항거한 ‘행동하는 신앙 운동’의 중심에 우리 한신 75동기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역사와 함께 온 몸으로 ‘신학’을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목회를 했고 그렇게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고 생명나무를 가꾸어 왔습니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고 예쁘고 대견하고 자랑스럽습니다.

시대의 광야길 40년을 걸어온 동기들이 기념문집을 내게 되었습니다. 동기들의 설교, 논문, 수기, 수필 등 글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각자의 『임마누엘 광야 40년』이 녹아있는 글들입니다. ‘적은 무리’한신 75동기 기념문집이 나오게 되어 감격스럽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성춘 편집위원장을 비롯한 편집위원(강원돈, 김창규)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수판이 맞지 않는 일’을 흔쾌히 맡아 출판에 나선 동연출판사 김영호 사장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제 새로운 시작입니다. 『임마누엘 광야 40년』기념문집 발간이 걸어온 광야 길에 대한 회상을 넘어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 한신대 신학과 75학번 동기회 (사진제공 : 정상시 목사)

오랜만에 자술서를 쓰는 기분이다. 1977녀 4월, 긴급조치 9호로 체포되어, 경찰에서 쓴 그 때의 자술서는 말이 자술서이지 사실은 타술서였다. 30년 만에 비로소 뒤늦은 자술서를 쓰는 기분이다. 긴급조치 9호 30주년! 이제야 그 때를 돌아볼 수 있는 가시거리가 확보된 게 아닌가 싶다. 30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사건을 돌아보고 역사화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인 모양이다. 복음서도 예수 사후 30년쯤 지나 집필, 편집 되었다. 나에게 긴급조치 9호는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그 이유는 그 고난이 나를 거듭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사건 전야 상황

1977년 4월 7일, 한신대 고난선언 사건이 일어난 전후 상황을 잠깐 일별하고자 한다.

나는 1975년 한신대에 입학하여 봄꽃이 만발한 수유리 교정에서 낙원 같은 대학생활을 시작하였는데 그 낙원(?)에서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 한 달 만에 학교 교문에 빗장이 쳐졌다. 한신대 휴업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같은 날 고려대 휴교령과 한신대 휴업령이 긴급조치 7호와 함께 내려졌다. 많은 선배들이 제적을 당하고 안병무, 문동환 교수님도 해직되는 상처를 남기고 몇 달 후 학교문이 열렸다. 그러나 학교 분위기는 강간당한 처녀꼴이었다. 정보과 형사들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프락치 시비도 있었다. 그 해 재일교포학원침투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중앙정보부의 작품이었다. 재일동포 한신대 유학생 김철현을 비롯한 나도현, 김명수, 전병생 선배가 구속되었다. 충격이 컸다.

1976년 3월 1일 “3.1 민주구국선언 사건”(명동사건)이 있었다. 안병무, 문동환, 문익환, 윤반웅, 서남동, 이해동, 이우정 등 주로 한신대 교수, 혹은 기장 목사님들이 구속되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이다. 매주 목요일은 종로 5가 기독교 회관에서 목요기도회가 있었고 구속자들의 소식이 가족들이나 NCC 관계자를 통해서 전해졌다. 독재의 만행이 고발되었고 함께 분노하고 함꼐 울고 함께 기도하고 투쟁하였다. 나는 거의 매주 참석했다. 당시 기독교회관 외에도 반독재 민주와 운동의 기지 역할을 감당한 교회들도 많았다.
서울제일교회(박형규 목사)나 한빛교화(이해동 목사) 등은 그 대표적인교회였지만 서울과 다른 지방에서도 한신대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교단 교회들이 반 유신 민주화 운동기지 역할을 감당했다. 교회가 나설 수 밖에 없는 시대였다. 이미 수도권 특수선교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가 있었고 도시산업선교회의 활동 배경도 있었다.

기독청년협의회(EYC)나 한국기독학생총연맹KSCF 등의 활동을 통해 제적, 구속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한신대 선후배들이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었다. 적어도 1970년대 한신대는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고난공동체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1977년 한신대 고난선언 사건 전후의 상황적 배경이었다. 질식할 것 같은 시대의 억압 속에서 민초들의 신음이 한숨이 되는 시대, 한신대 고난 선언은 애송이 예언자들의 광야의 외침이자 양심선언이었고 비명이었다.

사건과 나의 법무부 대학생활

“한신대 고난 선언”사건으로 불리는 우리 사건은 1977년 4월 7일에 한신대 채플실에서 시작된 유신반대 시위 사건이다. 그 때 성명서 제목이 고난선언이다. 선언문 초안자는 김하범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유신철폐와 긴급초지 9호 해제, 사회안전법과 국가보위를 위한 특별조치법의 처례를 요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검철은 우리 사건을 긴급조치 위반과 함께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두려웠고 놀라웠다. 나중에 반공법 위반 조항은 재판과정에서 없어졌다. 우리 사건의 특징 중 하나가 학도호국단 간부들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유신 정권은 대학마저 학생회를 없애고 학도호국단을 만들어 놓았는데, 한신대는 학도호국단이 유신정권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시위를 하였으니 당국도 좀 당황했을 것이다. 그래서 반공법 위반으로 몰아가려고 했는지 모른다. 목사 후보생들로서 신학대학 학생들이었는데 반공법 위반 이라니 역설적으로 반공법의 약효를 많이 떨어뜨린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우리 사건이 일어난 때는 교회력으로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이라는 절기였다. 그 고난 주간에 ‘고난선언’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종교의식보다 고난주간을 잘(?)지키게 되었다. 오용식, 이영재, 김하범, 김현수, 정상시 5명이 구속되었다. 우리 사건의 후속 사건 격으로 5월에 구속 학우의 석방을 요구하는 반유신 시위가 있었다. 김광훈, 진철, 박창수, 임성헌 4명이 구속되었다. 박창수는 수형 생활로 인해 건강 악화로 많이 고생하다가 2003년에 세상을 떠났다. 점점 법무부 대학생이 늘어났다. 그럴수록 학교와 교회, 기독교회관을 중심으로민주 회복과 구속자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또 많은 한신인들과 기장인들의 구속이 이어졌다. 1979년 10.26 사건까지 숨막히는 억압과 이를 극복하려는 민초들의 피맺힌 부르짖음과 몸부림이 이어졌다.

   
▲ 교도소 내 독거실

나는 서대문구 현저동 105번지 15척 담장으로 둘러싸인 서울 구치소로 들어갔다. 법무부 대학에 입학한 셈이었다. 한 평정도의 독방이었다. 방문 앞과 재소자복 상위에는 수번과 함께 노란 딱지를 붙여놓았다. 이른바 요시찰 인물이라는 표시이다. 빨간 딱지는 반공법 위반표지였다. 감방 안에는 뺑끼통(변기통)이있었다. 그리고 식구통이라는 배식구가 있었고 패통이라 불리는 누름판이 있었다. 아마도 버튼의 일본식 발음일 것이다. 긴급히 교도관을 호출할 때 그것을 누르면 나무 막대기가 복도 쪽으로 철컥하며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소제라고 불리는 청소와 배식을 담당하는 기결수의 위세가 상당했다. 소제에게 밉보이면 암암리에 피해를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몇 달 후 성동구치소로 이감을 갔다. 새로 지어진 구치소였다.

그만큼 독재정권 말기 수형시설의 수요가 많아졌던 것이다. 성동구치소에서도 우리는 독방생활이었다. 하지만 서대문 구치소와 달리 동지들이 같은 사동에 있어서 들며 날며 얼굴을 볼 수 있어서 그나마 좋았다. 1976년 한신대 시위로 기소중지 중이던 박남수 선배도 합류하여 10명 이상의 동지들이 한 사동에 방방이 있었다. 독방이었지만 교도관 눈을 요령껏 피해가며 통방도 하고 책도 돌려 보기도 했다. 면회 등을 통해 단편적으로 전해들은 바깥 세상 소식이나 작은 신문 쪼가리라도 입수하면 그것을 함께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정세에 대한 의견도 몰래 나누었다. 제일 재미있는 시간은 통방시간이었다. 주로 저녁 식사 직후 화장실 좁은 문틈에 매달려 옆방과 대화하는 시간인데 교도관도 어느 정도 묵인하는 불법이었다. 짓궂은 농담도 하고 진지한 토론도 있었다. 일반 사동 재소자들도 그 시간 화장실 뒷문을 통해 통방을 한다. “영숙아, 사랑해”등 애인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기도 한다. 재소자들의 숨통 역할을 하였다.

성동 구치소 시절 생각나는 사람 중에 막걸리 반공법과 사회 안전법으로 들어오신 분들이었다. 막걸리 반공법은 막걸리 먹고 취중에 박대통령의 사생활 관련 유언비어를 말하다가 구속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여배우 윤아무개와 재미 봤다 카더라.”이른바 카더라 통신을 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것이었다. 사회안전법으로 들어오신 분은 반공법 위반으로 20년인가 30년의 형기를 마치고 주거 제한 규정을 어기고 어떤 모임에 나갔다가 다시 기약 없는 감방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참 어이없는 징역도 많았다. 사회 안전법 위반 장기수들의 식사는 보통 두 시간 이상이었다. 밥과 반찬을 씹고 또 씹어 완전히 물이 되었을 때 삼킨다고 했다. 위장 장애 때문이란다. 교도소 밥은 콩이 섞인 보리밥이고 반찬은 오경찬이라고 불리는 장아찌와 국인데 주로 짠 편이다.

하루 십분 정도 교도관 입회 하의 운동시간을 준다. 감방 안에서라도 철창당기기 운동을 많이 한다. 그래서 철창이 인삼녹용이라는 말을 한다. 밖에서 여러 고마운 분들이 가끔 책이나 영치금을 넣어 주셨다. 면회 때 필요한 책을 요청하기도 하여 밖에서 못한 공부를 하였다. 면회는 주로 어머님이 오셨다. 어머님은 나의 구속으로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다른 구속자 가족들을 만나면서 많은 위로를 받으셨다. 목요기도회나 구속자가족협의회(나중에 민주화가족협의회) 모임에 자주 나가시며 차츰 데모꾼(?)이 되어가셨다고 한다. 주요 구호는 “이 놈들아 우리 아들 내놓아라!”였다. 보수 신앙의 어머님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신 것이다. 문익환 목사님 부인 박용길 장로님은 지금도 나를 만나면 어머님 안부부터 물으시며 어머님도 거동이 원활치 못한 상황에서도 나를 만나면 ‘그들’안부를 항상 여쭈셨다. 항소 후 서울 구치소로 다시 이감을 왔다.

유난히 추웠던 77년 겨울을 서울 구치소에서 힘들게 보냈다. 78년 봄, 재판이 끝나 형이 확정된 우리는 마침 일어난 ‘서울구치소 금식 개선 투쟁’을 기화로 흩어져 지방으로 쫓기듯 이감되었다. 나는 2년 징역형이 확정된 기결수로서 마산 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마산 교도소에서 만난 사람은 고 이범영(서울대), 이민구(고려대), 설훈(고려대), 장기표(재야), 서익진(서울대), 김창호(서울대) 등이었다. 서울 구치소가 빈대로 악명이 높았는데 마산 교도소는 모기로 악명 높았다. 나는 건강이 더 나빠졌다. 나는 1978년 8월 15일 특별사면으로 출소했다. 1년 4개월, 정확하게는 495일만이었다. 출소 다음날 제일 먼저 나를 찾아온 손님은 정보과 형사였다. 담당형사는 종종 들러 내 근황을 확인했다. 출소했지만 자유의 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사건 이후의 나의 삶

나는 출소 후 기장 선교교육원에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로 이루어진 나치 시대의 본회퍼의 핑켄발데 신학교와 같은 특별한 학교였다. 기장 총회가 목사 후보생 교육기관으로 위촉, 인정을 해주었다. 서남동 교수가 원장이셨고 문익환, 문동한, 안병무, 이문영, 박현채, 이영희, 이우정 등 귀한 분들이 강의를 해주셨다. 한신대 제적생만이 아니라 일반대학 제적생 등 30-40명이 공부를 했다.

   
▲ 류동운 열사
유신의 억압이 강할수록 민중의 저항도 거세어졌다. 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마침내 10.26사태가 일어났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군부가 등장했고 1980년 광주 민중항쟁과 계엄군의 학살만행이 있었다. 한신대 후배였던 류동운 열사가 광주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의 총에 희생되었다. 마찬 역사였다. 80년 봄은 상처를 많이 남겼다. 무덤 같은 침묵이 잠시 이어졌다. 1980년 10월 8일에 발표한 “한산대 피의 선언”은 그 절망적 침묵을 깨는 첫 함성이었다. 나는 “피의 선언”성명서를 썼다. 그 성명서를 쓰는데 30분이 채 안 걸렸다. 내거 썼지만 내가 쓴 글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힘이 내 몸과 손을 사로잡아 성명서를 완성했다. 결국 전교생 200명이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나는 현장을 피했지만 결국 그날 밤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많이 맞았다. 죽는 줄 알았다. 나는 시위 배후 조종자로 다시 구속되었고, 다시 2년 징역형을 받고 20여 개월을 살고 82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되었다. 별(?) 두 개를 달았고 법무부 대학 가방끈도 길어진 것이다.

출소 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여러 활동과 모색의 시간을 가진 후 나는 1984년 교회로 돌아왔다. 그것은 새로운 교회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에 대한 기존 교회의 문은 그리 넓지 못했다. 어딘가 위험하고 문제 인물로 보였을 것이다. 나를 비롯한 출소한 동지들은 1985년 민중교회 협의회를 만들었다. 크고 높은 자리보다 작고 낮은 자리에서 섬김과 나눔의 신앙공동체를 세우고 싶었다. 이것이 이른바 민중교회 운동으로 발전한다. 1988년에는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이 결성되었다. 기장, 예장, 감리교 등 100여 교회가 가입되어 활동했다. 지금은 기장의 “생명선교연대”, 예장의 “일하는 예수회”, 감리교 “고난함께모임”등으로 교단별 NGO로 활동하고 있다.

나도 1987년 안양 박달동에 민중교회를 지향하며 교회를 개척했다. 박달교회였다. 1987년은 6월 항쟁, 7.8월 노동자 대투쟁 등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교회에서는 예배시간 보다 사회선교 활동이 활발했다. 노동상담소, 야학, 무료진료소 등이었다. 이런 활동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노동선교 중심에서 지역생활인 중심 신앙공동체로서 선교 지향으 변화가 있었다.

현재 마을 교회를 자처하며 지역아동센터나 노인복지센터, 마을 사랑방 까페 그리고 경인기장협동조합 안양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다. 박달교회는 1996년, 선교 지형의 변화와 함께 교회 이름을 안민교회로 바꾸었다. 다른 민중 교회도 이전의 노동선교 중심에서 다양회되고 전문화되었다. 아예 교회와 분리되어 전문 선교기관으로 출발하기도 했다. 가출 청소년센터, 외국인노동자센터, 환경선교단체, 노인선교센터, 성폭력상담센터, 장애인 선교센터, 광산촌선교센터, 지역아동센터 등 다양하다. 그 한복판에 한신 출신 법무 대학 동지들이 있었다. 많은 고난도 있었지만 사실은 고난의 은총이었다.

정상시(안민교회 담임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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