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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16권』계씨편-우리가 항상 관심하고 집중하기를 멈춰서는 안 되는 9가지 일과 영화 <귀향(鬼鄕)><이은선의 집언봉사執言奉辭 17>
이은선(세종대 교수) | 승인 2016.03.03 14:04

<명구>
「季氏篇 10」: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계씨편 10 : 공자 왈 군자유구사.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해석>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에게는 아홉 가지 생각할 일이 있다. 볼 때에는 분명하게 볼 것을 생각하고, 들을 때는 똑똑하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 얼굴빛은 온화하게 할 것을 생각하고, 용모는 공손할 것을 생각하며, 말은 거짓이 없어야 함을 생각하고, 일을 행함에는 공경스러울 것을 생각하고, 의심이 나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 화가 났을 때는 곤란한 일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득을 보게 되면 그것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성찰>
지난 번 「헌문편」과 「위령공편」에서 공자의 文의 종교성과 영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공자는 거기서 자신 시대의 폭력의 난무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어떻게 인간다운 방식(人文)으로 삶을 꾸려가야 하는지를 말씀하셨고, 그 일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참된 인간적 사람의 깊은 신앙을 보여주었다. 이편은 그러한 공자의 믿음과 사랑이 현실의 지속적인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덕목과 실천 조항들로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어』열다섯 편 이후 이번 16권의 「계씨편」과 함께 마지막 다섯 편은 일종의 부록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다. 신약성서 마지막의 사목편지들처럼 제일 늦게 편찬된 것들이고, 공자의 직접적인 언술이라기보다는 그 후예들이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하게 편하고, 당시 회자되던 말들을 수집한 것이 많다고 한다. 이 편의 이름이 된 ‘계씨’는 노나라의 실질적인 군주였던 독재자 대부(大夫) 계강자(季康子, ?-B.C.468)를 지칭하는데, 공자의 제자 염유와 자로가 그 신하로 일했기 때문에 당시의 혼돈된 상황에서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공자의 제안들이 이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나타난다.

이번 「계씨편」성찰의 표제어로 삼은 10절의 말씀은 후학들의 정리로 추정된다. 하지만 여기에 공자가 仁과 文의 군자가 매순간, 매일, 간단없이 잊어버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으면서 살아가야하는 참 모습이 핵심적으로 잘 드러난다고 여겨서 가져왔다. ‘생각해야 하는 9가지의 구체적인 일(九思)’로 나열해서 서술했지만, 한 마디로 하면 매 순간 ‘현존에 집중하라’는 것이고, 퇴계의 말씀으로 하면 ‘거경(居敬)’이고, 양명의 언어로 하면 매순간의 ‘치량지(致良知)’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더 근본적으로 『중용』의 ‘신독(愼獨)’이나 ‘지성(至誠)’, 또는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가르침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仁), 그래서 인간적인 모습으로 사는 것(文)이 마땅하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 길에서 어긋났으면 다시 돌아보고 즉각적으로 돌아오며, 잘 모르겠으면 정직하게 묻고, 다른 사람을 대하고 일을 할 때는 진심과 공경의 마음으로 하고, 분쟁과 싸움을 삼가면서,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아닌데도 취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를 항상 살피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날과 같은 난세에, 과거는 무수한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있고, 미래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이, 한민족이, 한 여성이나 엄마가, N포세대의 어떤 청년실업자가, 여야 보수진보의 극한적 대립 속의 어느 정치인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로서, 선택할 수 있는 남은 방식으로 이 길 외에 어떤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인간이기를 저버리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전쟁과 폭력을 지양하면서, 하지만 회의와 좌절, 냉소에 빠지지 않고서 우리 삶을 지속하려면 이 방식 외의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다.

영화 <귀향(鬼鄕)>을 보았다.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옴’의 귀향(歸鄕)이 아닌 ‘귀신이 돌아옴’과 ‘돌아봄’의 뜻을 가진 ‘귀향(鬼鄕/鬼嚮)’을 보면서 그 폭력성의 적나라함 앞에서 오히려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웃 일본의 ‘용서’를 생각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은 과거의 일을 어찌 해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정황, 그 일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인간적인 생의 방식에 ‘용서’ 외에 어떤 것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랜 기간, 우리 이웃으로 곁에 있으면서 우리에게 상상하기조차 힘든 끔찍한 고통과 아픔과 비참을 안겨준 일본, 그러면서도 여전히 미운 짓을 하는 그 이웃 일본과 어떻게 할 것인가? 마침내는 ‘용서’ 외에 남는 것이 별로 없지 않을까, 거의 처음으로 생각해 보았다.

바로 우리가 살기 위해서이다. 용서하는 일은 바로 우리 삶의 현재에 집중하고 몰두하는 일일 것이다. 어찌해볼 수 없는 과거를 잊어서도, 왜곡해서도 안 되지만, 거기에 사로잡혀 있지 않는 방식, 미래의 복수와 승부와 증오도 자살행위처럼 또 하나의 감옥이 될 것이므로, 그래서 여기서 다시 새롭게 시작되는 현재의 삶은 재차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성찰과 각오에서 오는 실천의 행위, 그것을 나는 용서라고 본다. 혹자는 ‘용서’와 ‘믿음’은 그래서 가장 인간다운, 인간적인 두 가지의 행위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외우는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웃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고서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없을 터이기도 하다.

영화 '귀향'(조정래, 2016) 포스터.

영화에서의 무당굿은 그 용서를 위해서 다시 ‘귀신(意識, 생각)’을 불러온다. 몸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의식이 그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에서처럼 그렇게 폭력적으로 분리되어졌을 때 그 의식은 미래로 들어갈 수 없다. 용서가 필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인간적인 행위인 용서는 몸이 아니고는 일어나지 않고, 그래서 몸이 필요하고, 몸이란 바로 현재이고, 현재의 행위이며, 현재의 있음에 대한 집중이고 몰두이기 때문에 영화의 무녀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 엄청난 위기 속에 있는 남북의 갈등에서도 그렇고, 한일 문제, 물질과 정신의 갈등, 내 현실 속의 모든 구체적인 삶의 문제에서도 지금 여기 현재에 대한 집중, 몸을 통한 용서, 오늘에 집중하는 일, 이 일이 「계씨편」‘9가지의 생각(九思)’이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녀가 먼 곳의 귀신을 이곳으로 다시 불러와서 그의 마음(精神)과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듯이, 공자는, 군자와 참된 정치란 먼 곳의 사람들을 “인간적인 덕, 학문의 덕(文德)”으로 불러서 따라오게 하고, 따라오게 했으면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修文德以來之 旣來之 則安之)”이라고 했다. “먼곳의 사람들을 따라오게 하지 못하고, 나라가 산산이 갈라지고 있는데도 오히려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으니”,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적이 오히려 “담장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셨다(而在簫牆之內也). 오늘 북한과의 갈등은 최고조로 달해 있고, 나라 안의 사람들은 헬조선을 말하면서 멀리 달아나고 갈갈이 갈라지고 있는데도, ‘문덕’ 대신에 오히려 ‘테러’를 강조하며 ‘테러방지법’에 목숨을 거는 정치를 보면서 너무나도 유사함에 말을 잊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집중하면서 우리 의식과 몸이 인간적으로 하나가 되어 사는 삶을 지속해 가라고 권한다. 그러면서 그 지속해 나가는 삶을 크게 세 시기의 일로 나누어 그 각각의 시기에 조심해야 하는 사항을 다음과 같이 알려주기도 한다. 즉, 청년기에는 아직 혈기가 안정되지 않은 때이니 특히 그 혈기를 직접 몸으로 쓰는 일(色)에 주의하고(연애, 성생활, 결혼, 건강 등, 小之時 血氣未定 戒之在色), 장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강성하여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이 하면서 “분쟁에 휘말리는 일”을 경계하고(其壯也 血氣方剛 戒之在鬪), 노년이 되어서는 혈기가 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얻고 모으는 일에 몰두하다가 위험한 일을 당하니 오히려 그 “얻는 것(득)”을 경계하라(及其老也 血氣旣衰 戒之在得)는 말씀이다.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내는 바울의 편지에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 “(우리 주 그리스도에 둔) 소망의 인내(데살 전1: 3)”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믿음의 행위도 그렇고, 사랑의 수고와  그리스도 안에 둔 소망, 이 세 가지 모두가 나는 지금 여기의 현재에 몰두하는 삶의 실천이라고 여긴다. 공자가 구사(九思)를 말하며, 바로 현재의 순간에 집중하면서 인간답게 살라고 한 가르침과 다르지 않고, 용서는 그 일을 가능케 하는 현재의 일이며,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실천이다. 맹자의 말대로 하면 ‘집의(集義)’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비참과 고통의 삶을 살았던 우리 민족의 조상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 그 영화에서도 일본군에게 끌려가는 딸에게 엄마는 옷가지 속에 약간의 돈을 넣어주면서 ‘호랑이 굴에 끌려가도 정신만 바싹 차리면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어떤 경우에도 정신을 모으고 집중하라고 신신당부한다. 그 딸은 비록 당시의 몸으로는 돌아오지 못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하는 일을 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비인간의 상황에서도 옆의 사람들에게 계속 인간성을 나누는 다른 사람으로 살 수 있었고, 후에라도 다시 몸으로 그리고 의식으로 돌아와서 시간을 용서하게 하고, 해원하면서 생명의 구원자가 되었다.

우리가 9가지 생각의 실천을 습관으로 체득하고 그렇게 우리 삶을 살아가는 일을 계속해 나간다면 이 견디기 힘든 세상도 살아질 것이며, 나아질 것이고, 이웃도 그 해악을 진정으로 뉘우치는 날이 올 것이다. 용서가 일어나면서 우리의 의식은 더욱 맑아지고 집중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런 우리의 현재와 더불어 우주는 더 찬연히 빛날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둔 소망과 다르지 않다고 믿는다.

이은선(세종대 교수)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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