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연재
너의 ‘권위’으로부터 도망<흐물흐물하게 혹은 말랑말랑하게 교육하기>
김정원 | 승인 2016.03.04 12:26

시간이 지나도 분통이 가시지 않는 일이 있다. 아니, 도리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또렷해지고, 그 당사자에게 찾아가 그 때 왜 그리했는지를 따지고 싶어지는 그런 일말이다. 

나는 22살이었고, 한 수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업은 각 모둠이 선정한 주제를 함께 논의한 뒤, 그 중 대표가 되는 한 친구가 발표를 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진행 방식은 여느 대학의 수업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분위기만큼은 조금 달랐다. 나는 발표를 맡았기에 보다 열심히 준비를 했었는데, 실은 보통 열심히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학점 때문은 아니었다. 사정은 다른 데 있었다. 바로 한 남자 선배의 공격적인 질문 공세를 방어하기 위함이었다. 그 선배는 당시 여러 조직 활동을 유능하게 해왔기에, 덕분에 많은 권위와 인정을 얻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전 발표자들은 그 선배의 날카로운 질문에 안절부절 못하기가 일쑤였고, 발표자들이 쩔쩔매는 사이 선배는 본인의 질문에 본인이 답하곤 하였다. 나는 그 작태가 못마땅하여,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기를 다짐하며 칼을 갈았던 것이다. 

모둠원들의 응원을 받으며 발표는 시작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발표를 마치기가 무섭게 선배는 손을 들고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잔뜩 긴장했지만, 부러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당차게 되받아치며 그의 질문에 질문을 얹었고, 그의 답에 답을 얹었다. 전에 없던 후배의 태도에, 그러니까 아주 새파랗게 어린 후배의 ‘대듬’에 선배는 당황하는 듯 보였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다소 길었던 질의응답 시간이 끝났고, 약간의 승리감과 함께 단에서 내려왔다. 담당 교수는 잘 준비된 발제라 칭찬해주었고, 흥미로웠다고 조원들을 상찬하였다.

그런데, 수업을 마친 후의 교수의 이야기는 조금 달랐다. 교수는 내게 남자친구가 있냐고 물었고, 나는 질문의 의도가 의아하여 교수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교수는 이내 입을 떼었다. 

“너무 그렇게 하면~ 남자친구 안 생길텐데.. 여하튼, 발제 잘 들었어.”

교수가 가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그 물음은 곱씹어 볼수록 묘하게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이었다. 오 분이 가고, 십 분이 가니 더욱 불쾌했고, 그의 수업을 그간 재미지게 참여했다는 사실에 한번 더 불쾌해졌다. 당시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사실 말고는 위안 삼을만한 것이 없었다. 기운이 쭉 빠져 있는 때, 어깨 너머로 들리는 소리는 “야, 아까 걔 몇 학번이야?” 라고 묻는 조금 전 그 선배의 목소리였다. 

이 이야기는 열과 화가 뻗치던 나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멀리서 혹은 가까이에서 경험했음직한 일화일 것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저 수업 안에서 어떠한 권력이 작동되고 있는지를 발견할 수 있다. 눈치 챘듯이 먼저는 ‘나이’ 혹은 ‘학번’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나이보다는 학번이 우선할 수도 있고, 이러한 경우는 보다 끔찍한 상황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나이나 학번은 ‘대화가능성’을 거세하고, 자기정체성을 부인하게 만든다. 정답을 말하는 자와 그 정답을 듣는 이가 단박에 정해진다. 혹여 어리거나 학번이 낮은 친구가 의견을 제시할라치면, 그 ‘태도’를 단정히 해야 하고, 말함에 있어 겸손함을 가장하기도 해야 한다.

그에 반에 선배는 아주 자연스럽게 발언의 기회가 획득된다. 밥상머리가 아님에도, 이러한 불편한 ‘예의 차림’은 토론시간에 꼭 지켜져야 한다. 더군다나 정의롭다고 여겨지는 여러 조직 활동을 했던 선배일 경우엔 그 권위는 곱절이 된다. 후배의 심정적 불편함도 문제겠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후배가 선배 앞에서 자신의 본래적 이야기를 잃어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는 후배에 그치지 않는다. 선배 역시 자위적 권위 안에 갇혀, 자기와는 다르지만 모방이 가능한 권력자의 가면을 쓰게 된다. 둘 모두가 온전한 ‘자기’를 잃어버리고서 ‘자기’가 빠진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결국, 둘은 씨알도 없는 ‘빈말’들 속에 어지러이 놓이게 된다. 이러한 ‘대화불가능성’ 속에 존재하는 이 둘에게 진정한 토론은 없다.

다음으로는 교수와 학생이다. 이는 보다 복잡한 문제인데, 모순되게도 그 교수는 당시 ‘양성 평등’ 에 관한 내용을 수업에서 다루었다. 앎과 삶의 분리다. 이를 차치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문제는 교수가 가진 이중성에 있다. 나는 수업 시간에는 분명 칭찬받는 ‘한 학생’이었는데, 수업을 마치고 나자 ‘여자친구’로서는 부적합한 ‘여학생’이 돼 있었다. 즉, 교수가 발견한 것은 ‘당차게’ 발제를 마쳤던 ‘한 학생’이 아니라, ‘억센’ 혹은 ‘기가 센’ ‘여학생’이었다. 아니면, ‘고분고분하지 못하거나’ ‘귀염성이라고는 하나 없는’ 여자였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머리에 내제된 ‘젠더박스’는 어수선하고 너저분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바짝 쏘아붙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교수와 나 사이에 흐르고 있던 권력관계를 지나치게 유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성적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우선은 그가 갖고 있는 지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의 지식은 위계를 만들었고, 그 위계를 깰 만큼의 지식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의 지식은 (그의 것뿐만 아니라 그 누구의 것도) 절대 ‘객관적’일 수 없지만, 교실에서, 심지어는 교실 밖에서도 그의 지식은 ‘객관’이나 ‘보편’으로서 작동되었다. 그러기에 그와의 시간은 선택과 배제로 채워진다. 잠깐 한눈을 좀 팔라치면 누군가는 이미 배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세련되게 작동되는 것이 그의 지식이고 권력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기분이 몹시 나빴다’는 것에 있다. 권력이고 나발이고 간에 나는 그 불쾌함을 드러냈어야 했다. 비록 그 불쾌함을 설명하는 과정이 그의 지식에 비해 ‘비이성’적이고, ‘비논리’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보다 확실하게 내가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불쾌하다’라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기분과 마음은 본디 ‘이성’과 ‘논리’보다 앞서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교수 면상에 대고 ‘나는 불쾌하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궁극적으로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위계와 권력에 대고 쏘아붙여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 것을 계산하지 못했더라도 ‘나의 불쾌한 마음’을 드러내 보였어야 했다. ‘기분 나쁨’, ‘분함’, ‘언짢음’과 같은 느낌은 비이성적인 것들이지만, 이러한 비이성적인 것들이 이성보다 뒤서는 것이 아님을 대학원에 들어가서야 안 것은 개인적으로는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고분고분 하지 않게’ 사과 요청을 했을 것이다. 나의 ‘기가 센’ 면모를 사랑해주는 남자친구가 한 둘이 아니었음을 덧붙여 밝히며 말이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그 교수도 그렇고 그 선배도 그렇고- 그들이 나아졌는지가 궁금해진다. 여기서 ‘나아지다’라는 말의 의미를 ‘비이성’이게 ‘비논리’적이게 표현해 본 것이 바로 ‘말랑말랑’과 ‘흐물흐물’이다. 이 표현의 동기는 우리가 가진 사고와 지식, 혹은 우리가 만든 삶의 경계들이 흐릿해지고 모호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온 것이다. 그 교수의 이성관은 그 교수만의 것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강요될 수 없다. 더불어 그 교수의 여성관은 조금 더 그것의 경계를 ‘말랑말랑’하게 만들 필요가 있겠다. 그 선배 역시 ‘나이’에 대한 생각을 조금 많이 ‘흐물흐물’하게 무너뜨릴 필요가 있다 하겠다. 나아가 글의 전반에 흐르고 있는 내가 가진 ‘페미니즘’이나 ‘반 연령주의’ 같은 틀에도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타협의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가진 이념이나 지식으로 인해서 또 다른 권력이 형성되고, 그것으로 인해 위계와 배제가 발생하는 것에 대한 ‘앞선 반성’일 것이다. 

이러한 ‘앞선 반성’은 이제 연재 될 교육에 대한 소고(小考)이자 소고(小故)인 부족한 나의 글의 바탕이 될 것이다. 이렇다 저렇다 교육에 대한 정의가 많지만, 그것을 정의하는 순간, 다시 배제와 선택의 굴레에 갇힐 수 있다. 교육이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만큼 우리의 일상을 가만 바라보고 탐구하고 느끼고 비판하는 것 자체로 교육일 수 있겠다. 서술했듯, 권위는 단 두 사람 사이에서도 나이, 성별, 지식 등의 이유로 쉬이 발생된다. 대학의 한 교실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지독한 모습으로 예배당 안에서도 발생된다. 이러한 것을 알아차리고 꼬집어 보게 하는 것이 교육의 힘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의 작업을 조금 거창하게 말하자면, 명쾌하고 환원적이고 권위적이고 ‘동일성’ 안에 놓여있는 것으로부터의 도주를 시도해 보는 것이다. 보다 친밀하게 말하면, 규율, 규제, 순응 등에 대한 비판이고, 느낌, 마음, 비이성적인 것들에 대한 재고이다. ‘교회 학교적’으로 말해 본다면, 수련회와 ‘천로역정’, 순종과 아멘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시도의 첫 삽을 뜨는 것이었다.

어젯밤 막 읽기를 마친 모리스 블랑쇼의 책 <기다림 망각>의 내용 중 나의 글쓰기 의도를 내 마음보다 더 내 마음처럼 표현한 구절이 있어 옮겨본다. (내용은 옮긴이 박준상 교수의 해제 부분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저자는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명제도 제시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다. (…) 또한 어떠한 철학적, 도덕적 메시지나 교훈도 주기를 포기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저자가 독자에 대해 가질 수도 있을 우월하거나 주도적인 모든 위치에서 스스로 내려왔던 것이다.’ 

글을 쓰는 나 자신과 또 이 글의 주된 소재인 교육이 도덕적 메시지나 우월성에 전복되지 않으려 부단히 달음박질 쳐야 할 것 같다. 조금 더 모호하고, 조금 더 불확실한 방향으로 말이다. 이는 순전히 말랑말랑하고 흐물흐물한 교육을 하기 위함이겠다.

<필자 소개>

김정원

한신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한 후, 영국 킹스칼리지런던에서 조직신학 석사 졸업.

한국기독교장로회 목사

 

김정원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3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